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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Oct 13. 2023

슬픔의 공동체가
삶의 공동체가 될 때까지

타인을 연민하는 것은 사랑일까, 동정일까? 니체는 “우리가 보다 강력한 사람, 돕는 사람으로 나타날 수 있을 때, 박수갈채를 받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 불행에 빠진 사람들과는 반대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느끼기를 원할 때, 혹은 불행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권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때” 타인을 동정한다고 말했다.

지난 8월부터 나는 제주에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교실에 모인 문우들의 얼굴 면면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글을 쓰려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크게 세 종류의 동기를 지니고 왔다. 1. 자기 치유, 2. 트라우마, 3. 자아 탐구. 이 중에서 우울증과 불안장애 등 정신과 상담과 치료 중에 있는 분들이 여럿 있었고, 이별이나 죽음 등 상실을 경험한 분도 있었다. 저마다의 이유로 슬픔에 빠진 이들이 풀어쓴 글을 읽을 때 나는 일종의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이 사람을 동정하는가, 공감하는가, 이해하는가? 나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자기 정의가 필요했다. 나는 이들을 동정 또는 연민하기보다 이들이 써낸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할 필요를 느꼈다. 그 문장에 집중하려면 연민보다는 ‘이해하려는 마음을 쓰는 것’이 필요했다.

같은 종류의 상실을 경험했어도 그 슬픔의 결은 저마다 다르고, 층위와 깊이도 다르며, 느낌과 질감도 다르다. 그러므로 타인의 슬픔에 공감과 이해의 제스처를 섣불리 보내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그 경험의 결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 타인의 슬픔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마음의 자리를 내는 것이 우선되어야 했다. 

지난 7월, 서이초 교사의 자살 소식을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나는 한동안 그와 관련한 동영상이나 뉴스를 찾아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또 하나의 유족과 자살 생존자가 생겨났구나, 하는 비통함 때문이었다. 유족들은 자신이 원해서 유족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폭격받은 상황과 같다. 그 폭격의 세례 속에 놓여 있을 그들을 생각하면 뉴스를 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돌아가신 교사의 유족들은 물론 그의 친구, 친척, 동료, 지인, 제자 모두가 자살 생존자가 된다. 언론은 사건 전후에 있던 사실관계, 교사가 처한 노동 환경, 주변인 인터뷰, 가해 학부모의 배후에 대한 정보를 전했다. 우리는 TV나 핸드폰으로 그 뉴스를 접하면서 일종의 무력함을 느낀다. 가해자에 대해 분노하며 인터넷 댓글을 달거나, 직장동료와 점심을 먹으며 교권 침해의 심각성을 성토하고 나면, 우리의 분노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 것이라는 허무함이 찾아든다. 우리는 언론에서 제공하는 뉴스를 접하고 반응하고 잊어버리는 수순을 밟는 미디어 소비자의 자리에 머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 전국 교사들의 추모 집회가 시작되면서 교권에 대한 인식은 우리 사회의 중대한 이슈이자 시급한 현안이 되었다. 

교육감이 참석한 기자 간담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한 남성이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서이초 교사의 유족이 아닌, 다른 사립학교 기간제 교사의 아버지였다. 그분은 ‘우리 딸의 죽음도 세상 사람들이 알기를 바라며 대책위의 진상 조사에 포함시켜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추모 집회가 열리던 8~9월, 이 기간에 서울 양천구, 군산, 용인, 제주, 대전, 청주에서 또 다른 교사들의 죽음이 연이어 일어났다. 두 달 사이에 7명의 교사가 세상을 떠났다. 

자살에는 전염성이 있다. 자살자의 주변에서 그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지켜본 사람은 그 일과 깊숙이 연루된다. 이 연쇄적 현상은 우리가 타인의 죽음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소식을 접한 또 다른 동료 교사와 그 가족들, 그들을 알고 있는 주변인들, 또 그 주변인을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까지 연결되면, 우리는 잠재적으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살아가는 자살 생존자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슬픔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그 공동체로서의 인식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슬픔에만 머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자리에 머물지 않은 채, 공동체로서의 책임감을 통렬히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뉴스를 통해 영상, 사진으로 전송되는 유족들의 얼굴을 목격하고 대체로 분노하고 안타까워한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 연민하는 것으로 선량한 시민의 의무를 다한 것이라 위무한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잊어버린다. 

우리는 그 선량한 위선에 대해 수치스러워할 필요가 있다. 그 선량함에는 무력함이 내재되어 있다.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저 사람의 고통과 내 삶이 아무 연관이 없으며, 나는 아직은 안전하다는 생각이 전제된다. 그러기에 우선 타인의 불행 앞에 연민을 느끼며 눈물 흘리기를 멈춰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는 말을 익히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리의 상상력은 현실에 가닿아야 하며, 그 현실을 변화시키는 행동으로 이어질 때 의미를 가진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 수전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154쪽


젊은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 나는 그녀가 교실 안 창고에서 목숨을 버리던 순간과 내 어머니가 옥상에서 몸을 던진 순간을 오버랩한다. 나는 자살 유가족이며 자살 생존자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내 손으로 수습하면서 그녀의 고통의 실체에 대해 알기 위해 노력했다. 알고자 함은 나로 하여금 행동을 촉발한다.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그 고통에 대하여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보다,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는 편이 나를 자살 고위험군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생각한다. 말해질 수 없는, 숨겨진, 그 고통들의 실체를 끊임없이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이야기하는 것. 개인의 고통은 결코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내 삶의 영역이 타인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 고통을 내 삶에 접속하여 숙고하는 것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말하게 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함께 그것의 실체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 “실재하는 고통만이 진실하다”라고 말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처럼, 타인의 고통이 지금 바로 내 곁에 있음을 아는 데에서 연대의 움직임은 시작된다. 슬픔의 공동체가 삶의 공동체가 될 때까지. 이야기하기를, 연대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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