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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홈스쿨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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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 Jan 17. 2020

아들과 아빠의 한국사 공부

6개월 홈스쿨링 동안 가장 잘한 것을 뽑자면...

이제 8살이 된 첫째 아이가 나보다 월등하게 잘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사일 것이다.


홈스쿨링이 시작되고 1달 정도 되었을 때였다.

호기롭게 시작한 스케쥴링은 다 망가졌고 나는 오전 내내 일을 하느라 아이들은 아침만 먹이고 방치했고, 오후엔 아침 일로 지쳐서 점심만 겨우 만들어줄 그때,


보다 못한 남편

이맘때 아이들은 스펀지 같아서 쭉쭉 흡수한다는데, 너무 안 가르치는 거 아냐? 이럴 거면 차라리 학원이라도 보내.


누군들 모르나...

그저 내 에너지가 안될 뿐. 그리고 내 일을 줄이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방치된 상태에서도 아이들이 재밌게 노는 방법을 아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하는 나의 자기 합리화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때였다.


하나의 잔소리로 들렸고, 또 아픈 곳을 찌른 것도 맞기에 나는 짜증만 벌컥 내고 뒤돌아버렸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나를 알던 남편은 나를 너무 잘 알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계속 얘기했다간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저 여자는 일을 줄이고 그 시간을 아이들의 교육적인 시간으로 채울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는지. 남편은 며칠 후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해볼까? 나 역사 좋아하니까, 그걸 같이 해볼까?'


어찌나 기특하던지! 나의 큰 짐을 덜어준 셈이었다.

올레! 이런 걸 아웃소싱이라고 하는 것인가? 홈스쿨링이 모두 나의 소관이라고 생각했던 그때, 난 아웃소싱이 절실히 필요했었다.

선생님을 쓰지 않고 아들과 아빠의 유대관계도 톡톡히 다지면서 함께 공부하는 모습.

왠지 모르게 유대인들의 하부르타 같기도 하고,

오랜 외국생활로 저절로 애국자가 된 우리 부부에게 역사공부는 완벽한 홈스쿨링 주제였다.

아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둘의 한국사 책 읽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적어보겠다.

 




며칠 후, 택배가 왔다. '처음 읽는 우리 역사 시리즈'로 총 20권의 책이 왔다.

남편이 인터넷으로 찾아봐서 고른 책이라고 했다. 시리즈는 어린이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이렇게 4파트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7살이던 첫째가 읽었던 책 중 그림이 가장 적은 책이었다. 내심 나는 속으로 '잘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더 궁금했던 건 남편이 이 책을 첫째와 어떻게 읽을 것인가 였다.


보아하니, 남편과 아들의 미팅 포인트는 매주 일요일 저녁이었다. 둘은 회사원들이 가장 우울해한다는 일요일 저녁에 서재방에서 따로 만났다.

책을 훑어보며 일주일 동안 읽어야 할 양을 정해주고,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동그라미를 치라고 했다고 한다.


그 일주일 동안 줄곳 그 책을 읽는 첫째의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은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주었고, 첫째는 주로 아침에 일어나서 동생이 일어나기 전까지 또는 배가 너무 고파지기 전까지 이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아직은 어둑어둑한 아침, 작은 스탠드 불을 켜고 책을 보는 모습이란 너무나 경이로웠다. 밤에도 잠자기 전 책을 읽어준 후 혼자서 따로 독서등을 켜고 조금 더 읽기도 했다.


제일 첫 단원인 고조선의 시초 단군왕검에서 7세 첫째가 모르겠다고 동그라미를 친 단어들은 아래와 같다.

환인, 환웅, 까마득한, 공손히, 물음에, 꾀, 저희들끼리, 다투거나, 일들을, 품고, 분명히, 간직하여라, 태백산, 제단, 질병, 신령스러운, 성미 급한, 견딘, 신단수, 정성껏, 평양성에   

모두 모를만한 단어들이었다.

신단수는 나도 모른다는...


그렇게 읽고 그 주 일요일에 둘은 만났다.

둘의 'history book'이라는 노트에 남편은 직접 문제를 적었다. 내가 매일 초등학생 필기체라고 놀리는 그 손글씨로 10개의 문제를 만들었다.


남편의 아주 큰 장점 중 하나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하는 걸 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제도 아이 수준으로 만들었다. 특히나 초반에는 최대한 100점 가까이 주기 위해 일부러 쉬운 문제들을 냈다. 10번의 예를 들겠다.


10. 주몽이 태어난 곳은?  
1) 잠원동
2) 흑석동
3) 강원도 양구
4) 알


아이가 이 문제를 보고 '아싸~ 이거 너무 쉽잖아!' 하고 씩 웃었을 생각을 하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당당하게 4번을 찍었을까. FM 스타일인 나는 이런 게 약했다. 난 아마도 그럴싸한 4개의 초이스를 만들었을 것이다.


한 질문에 대한 빵 터지는 답이 있었는데, 첫 퀴즈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주관식 문제였다.


1. 삼국유사를 쓴 사람의 이름은?
-> 편찬위

 

아들이 책의 표지를 보고

'어린이 삼국유사 편찬위원회 글'을 보고 편찬위라고 쓴 것이다. 7세 다운 귀여움. 순진함. 우리 두 부부는 이 답에 대해 그 이후로도  몇 번이고 얘기하고 웃었다.


그렇게 둘의 일요일 만남은 계속 지속되었고,

홈스쿨링 종료일까지 50일도 채 남기지 않은 현재, 지금 '고려사'를 읽고 있다.

질문은 더 어려워졌고 이제는 답을 풀어서 써야 하는 문제가 많아졌다. 글로 쓰기 힘들어하는 답은 아빠에게 직접 이야기를 해주면 맞은 걸로 해주었다고 한다.


한 달 살기를 하는 호주에 가서도 읽는다고 하고, 퀴즈는 남편이 미리 만들어서 나에게 전해주기로 했다.

나는 답도 적어달라고 했다. (혹시나 내가 틀릴 것을 대비하여...)


둘의 일요일을 관찰하자면,

첫째는 아침부터 열성적인 학생처럼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언제 시험 볼 거야?'
‘응 이따 저녁에'
‘잊어먹지 마~'
‘응~당연하지'


그렇게 회사원인 남편도 우울한 일요일 저녁마다 매주 빼먹지 않고 퀴즈를 냈다.

왼쪽은 초반의 퀴즈, 오른쪽은 최근의 퀴즈

나는 처음에 이 퀴즈에 반대를 했었다.

왜 항상 지식을 테스트해야 하냐고. 나는 점수를 낸다는 것에 매우 민감했다.

더 민감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 시리즈를 다 읽으면 선물을 준다는 것이었다.

보상이 있어야만 하고, 보상이 없으면 하지 않는 애가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 내 걱정이었다.


이때도 나는 내 수준대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책을 순수하게 읽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하는 그런 자연스러운 배움의 과정들.


그러나 아이는 당시 7살밖에 안된 남자아이였다.

산만한 스타일은 아니나, 주제에 흥미가 없으면 딴청을 피우는 그런 평범한 7세였다. 어쩌면 내가 홈스쿨링 초반 한 달 정도 가르칠 때 이런 모습들을 봤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도 흥미가 떨어진 게 아닌가 생각했다. 어쩌면 더 아이 입장에서 봤어야 했다. 태권도 학원에 가도 35분은 태권도하고 나머지 25분은 피구 또는 게임을 하듯이, 아이의 재미에 더 신경 써줬어야 했다.


남자인 남편은 아이들, 특히나 남자아이들은, 이러한 게임 같은 식으로 약간 자극을 주는 것이 흥미를 잃지 않게 한다는 것이 남편의 의견이었다. 퀴즈 점수가 게임이 된다는 것이다.


첫째는 얼른 조선왕조실록까지 읽어 이 시리즈를 끝내고 선물을 받는 부푼 꿈을 갖고 있다.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들은 것이 있다. 어떤 행동에 대해서 틀렸다고 벌을 주는 게 아니라 잘한 것에 상을 주는 것은 뭐든 괜찮다고.

그런데 나는 시종일관 '너무 많은 것을 가지면 그것이 당연해져서 감사함을 모른다'가 나의 생각이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 역사공부는 남편 소관이고,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남편에게 맡겼다.


오늘도 아들은 선물을 받을 부분 꿈을 안고 고려사 책을 읽을 것이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계속해서 매주 일요일의 만남을 가지기로 했다고 한다. 이번 책이 끝나고는 세계사로 들어간다고 한다.


홈스쿨링을 하지 않았다면 남편은 아들과 이런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가 살뜰하게 교육의 시간을 많이 챙겼다면, 남편은 자신이 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원래도 좋았던 부자 사이가 더 돈독해졌음을 느낀다. 아이는 책을 읽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고, 어휘력도 좋아졌다. 예전에는 책을 읽고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하면 대답을 못하겠으면 '몰라'라고 했는데 그래도 요즘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곤 한다. 자꾸 나에게 내가 모르는 왕에 대해 물어봐서 날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럴 땐 그냥 ‘아이고 그렇게 어려운걸 어떻게 알아~ 우리 준우가 엄마에게 가르쳐줄래?’하면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에게 설명해주곤 한다.


이렇게 써보니 남편에게 더 고맙다. 홈스쿨링을 밝게 비춰주어서. 아이에게 계속해서 가져갈 추억을 안겨줘서. 고마워 남편. 기특하다 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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