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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Jul 31. 2021

프롤로그

40대를 앞두고 하는 이직 준비

39년을 ‘멋’ 있게 보이려고 노력하며 살았는데 최근 이직 준비를 위해 ‘나’라는 인간을 스스로 서류로 정리하며 나는 확실히 ‘멋’ 있지 않다.라고 생각했다.

다니던 회사에서 '파국을 견디느니 퇴사를 하자' 결심을 실천한 지 세 달 만이었다.

싫은 것을 생각하기 전에 대책을 세우는 편인데 정말 싫었나 보다.

전에 다녔던 회사가 싫었던 감정만 확실한 상태로 퇴사를 하고 한몇 달 동안 일을 주도적으로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끌려 일하고 싶은 불확실한 태도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세팅하며 이제까지 나를 규정하고 앞으로 더 키워나갈 기초작업이 필요했다     

취업 포털 사이트 양식에 맞춰 나를 알아주기 바라는 온갖 말들을 써 내려갔다.

건축가를 농부로, 디벨로퍼를 셰프로 비유하는 등 다채로운 기교를 부리는 문장들로 채워진 몇 장의 문서를 만들었다.

그 문서들은 나의 신상노출과 함께 뿌림을 당하고 몇 개의 면접을 성사시켰고 개인취향으로는 발길 향할 일 없는 강남대로에 면한 건물들에 면접을 보러 다녔다.     

면접을 보면서 어떤 패턴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매 면접마다 면접관을 너무 고려한 대화를 하다 보니 스스로가 밍밍해져 버리고 

그러다 보니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아니지 내가 원하는 것이 그냥 취직하는 것 말고 있었나…? 자기 의도가 어렴풋한 사람이 이끌어 가는 대화들은 더 맛을 잃고 장황해 지기만 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나에게 외출 준비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양말 서랍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양말을 골라 신고 거기에 주로 반스나 나이키 운동화를 신는 일이다.

그런데 면접을 보기 위해서는 외출 준비에서 제일 재미있는 부분을 삭제하고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는 불편한 신발을 신어야 했다. 그런 준비 과정에서부터 오늘 일진이 안 풀릴 거라는 생각이 다른 그 어떤 생각보다 강렬했다. 불편한 발로 서울 중심지를 걸어 다니고 면접을 보고 소개팅이 망한 것과 같은 찜찜한 기분과 아파진 발을 끌고 암사역에서 1킬로 남짓 되는 집에 걸어왔다.

그 길을 걸으면서 면접은 소개팅도 아닌데 나는 왜 앞으로 함께 일할 회사에 내 경력보다 나를 제대로 드러내고 나의 글을 제대로 읽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태까지 일해 온 모든 곳에서는 나의 창의성과 생산성을 높이 사주었는데 그런 개성이 오히려 독이 되는 면접도 있었다. (최지원 씨는 너무 창의적인 분이시라... 이런 유의 일은 아무래도 못 견디실 것 같… 이런 피드백은 정말...!)

몇 주를 미간에 주름을 잡아가며 퇴고를 반복한 자기소개서를 제대로 읽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씁쓸함을 자기 전에 일기장 어플에 끄적이면서 씁쓸함을 지우려고 했다.

매일 밤 표정으로 요약되는 앱으로 일기를 쓰고 있는데 선택할 수 있는 감정의 옵션이 - 우울해/정말 좋아/설레/그저 그래/피곤해/기분최고/평온해/짜증 나/걱정돼 -였다. 그중에 씁쓸함이 없어서 자기 전 또 한 번 씁쓸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누구에게 쫓아다니면서 말할 수도 없는 내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은 욕구는 아마 어떤 형태로든 글을 쓰는 모든 사람에게 있을 것이다.

내가 쓰는 글들은 나의 생각을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쓰고 있지만 아무도 안 본다면 과연 정리로 만족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차피 아무도 안 읽을 수도 있는 거 내가 즐거울 수 있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해 본다.

나는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을 때 쓰고 있는 사람이 입은 옷, 그 사람의 책상, 그 사람의 표정 같은 것을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상상하며 읽는 습관이 있다.

누군가 나와 같은 습관을 가진 사람이 이 글을 읽었으면, 그리고 볕이 드는 창가에서 평온하게 글을 쓰는 내 모습을 상상해 주었으면, 그런 생각으로 요즘같이 누구를 만나기도 어려운 날들을 보내며 일 마치고 퇴근하고 돌아와서 맥주 한 캔 먹고 지나간 드라마 한 편 보고 잠에 드는 지루한 일상에 글을 쓰는 시간을 끼워 넣는다.




건축가의 이미지

‘건축가'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심각한 얼굴로 스케치하는 어느 중년남성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건축가는 뿔테 안경을 쓰고 입에는 수염이 거뭇하게 나있고 외출하기 전 낡은 재킷을 급하게 집어 입은 듯한 모습을 매일하고 있다.

그런 어렴풋한 이미지를 따라가며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여자로 태어나 아무리 노력해도 중년 남성 건축가의 이미지는 될 수가 없었다. 건축가의 외형적 이미지를 추앙하는 마음 말고도 건축학과와 건축업을 선택한 나의 속내 중 하나는 예술가처럼 보이고 싶었던 마음이다.

돈 벌기 선수들이 주도하는 세상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인간의 마지막 기능인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 특유의 그 번뇌의 아우라 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순수 예술가가 되기에는 스스로가 잠재되어 있던 재능을 터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금세 자가 진단 되었기에 살면서 적정선을 찾은 전공이다.

학창 시절 읽은 낙천주의 예술가(다니엘 리베스킨트 자서전)에 저자의 어머니가 “건축을 해라, 돈도 벌고 예술가도 될 수 있다”라는 조언을 한다. 그 말에 내 마음을 들켜버린 듯했다. 그 당시 우리 어머니 말씀은 잘 안 들렸는데 별안간 다니엘 리베스킨트 어머니 말을 귀에 때려 박혔다.


저는 긁지 않은 복권 입니다만?

건축을 공부하던 시절, 세계적인 건축가인 프랑크게리나 자하하디드처럼 이런 건축물이 공사가 가능해..? 하고 다소 불안정하며 괴이한 형태를 건축으로 구현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건축가가 될 줄 알았다. 그러면서 머리 쓰는 일은 최소한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몇 만 평 땅도 에이포 용지 한 장으로 축소해서 그 위에 트레싱지를 겹쳐놓고 마치 온다... 온다... 영감이 온다... 하면서 두꺼운 펜을 종이에 휘갈긴 다음, 보조 디자이너에게 던져주면 몇 년 뒤에 선생님! 이 땅에 몇 년 전 구상하신 건물이 준공되었습니다. 기념식 테이프를 끊으러 가시죠. 하고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는 상상. 

다음 작품 구상을 하느라 심연의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그 건축물을 보고 우와! 설마 저게? 보고 뜨악하면서도 마치 의도한 것처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의 촉감이 느껴지는 환유의 풍경이 나왔군... 하고 아무도 못 알아들을 어학사전 의미 13번째 정도의 단어들을 사용해 가며 인터뷰하는 거장의 삶(거장처럼 보이는 삶)처럼 망상을 하며 마치 이미 대업을 이룬 것처럼 이불속에서 홀로 흐뭇해했다.

또 다른 상상도 있는데 대단히 돈이 많은 회장님 소유의 땅에 도착한다. 배산임수의 조건을 가진 땅을 마주하게 된 나는 음... 대지 높낮이 좋고... 조망도 좋고… 실눈을 뜨면서 대단한 깨달음이 정수리에 탁 앉은 것처럼 주변 사람 아랑곳하지 않고 갑자기 슥슥 스케치를 한다. 여기 낮은 자리에 이렇게 황금비율의 입면을 가진 이런 건축물이 좋겠네... 중얼중얼하면서 목탄으로 스케치한 무심한 스프링노트 한 장을 조심히 뜯어서 회장님께 건네드리니 회장님께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설계비는 얼마라도 좋으니 자네 이 땅에 건축을 꼭 해주겠나...? 이런 상상을 하면서 (지금 생각해 보면 꽤 행복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나는 진짜 대단한 건축가가 될 거 같아. 나는 긁지 않은 복권이라고 이 사람들아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무지를 무기 삼아 목소리가 큰

대학을 졸업하고 신입사원으로 회사에 들어가니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많았다. ‘여러분들은 눈치 못 챘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미래의 자하 하디드…’라고 속으로 생각 중인 나에게는 너무 부당한 벽이었다. 내가 뭔가를 하는 족족 3년 차 대리님이 나보고 뭐 하는 짓이냐는 말을 자주 했다. 퇴근하게 빨리 끝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내가 열심히 해서 무언가 들고 가면 실장이 뭐 이렇다 저렇다 지적도 없이 그냥 처음부터 다시 본인의 디자인을 했다. 슬쩍 실장님 디자인을 훔쳐보니 디자이너의 자질을 어떻게든 숨기려 하는 것처럼 모던하고 반듯한 것이 평범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스케치… 저분 건축잡지도 안 보시나 왜 저런 고리타분한 디자인을 하는 건지...  

그래도 월급 받으면 그만큼 일해야 된다는 생각은 있었는지 ‘거장이 겪는 어린 시절의 시련 같은 거라면 달게 받겠어….’라고 자신을 달래며 시키는 대로 실장님이 그린 도면을 채색하고 모델링해서 디자인 패널을 만들고 건축주를 만나는 회의에 쭐레쭐레 쫓아다녔다.

그런데 그런 단정한 디자인을 건축주에게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건축주는 더 단정하게 해 달라고 했다. 심지어 무조건 저렴한 외장재로 다 바꿔 달라고 말했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아니 왜 이런 방식으로 일할 커면서 미래의 자하 하디드를 뽑았는지...? 소장님 방에 찾아가서 나를 뽑은 이유에 대해 해명이라도 요청하고 싶었지만 자밍 아웃(자하 하디드+커밍아웃)을 주저하느라 소장님 방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내가 아는 건축 거장들은 건축주를 망하게 해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형태로 건축물을 짓던데 왜 우리 소장님들은 그냥 지으라는 대로 짓는 거야 진짜 건축가의 자존심 같은 거 없나 진짜 너무 답답했다. (무지한 인간은 위험하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가끔 친구가 어디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오면 나는 쫓아가서 대신 따져주고 일을 더 크게 만들고는 하는 성향이었다. 그때는 의리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무마되고는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말도 안 되는 오지랖 쟁이었다.

학창 시절의 뜨거움이 직장생활 초기에도 약간 남아 있었는지 착하고 순진한 소장님이 가는 디자인 미팅에 내가 대신 가서 건축주와 싸워주고 싶었다. ‘여봐요 건축주 양반, 시그니처 디자인 모르시나요? 우린 우리의 시그니처 디자인대로 일할 거라고요.’ (정작 그 시절 우리 회사의 시그니처 디자인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나름대로 계속 열심히 디자인 - 사수들이 다시 디자인 -  건축주와의 디자인 회의 - 결국 건축주의 불만족으로 점철되는 나의 신입사원과 대리 초기 시절 퇴근길은 울분의 도가니였고, 매일의 일기장은 데스노트에 가까웠다.

-답답한 인간들. 영혼이 없다 없어. 돈밖에 모르는 건축주들. 부끄러운 줄 알아라- 같은 내용들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런 생각을 하던 시절은 생각보다 빨리 끝나 버렸고 나는 생각보다 굉장히 빠르게 월급 받는 노동자가 가져야 할 자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최대한 일을 적게 하고 돈을 버는 행위, 이것이 노동자의 가장 순수한 모습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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