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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Aug 08. 2021

첫 번째 건축사 사무소 S건축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건축과 시절과 신입사원 시절에 나와 더불어 꼭 전공이어서가 아니라 건축을 취미, 일, 그 이상으로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요즘은 그런 걸 ‘건축에 진심’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그때는 그 정도의 간결하고 찰떡같은 표현은 없었기에 설계를 잘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쏟는 시간으로 표현했다.

좋아하는 분야 생길 때 내가 그것을 매개체로 다른 세계의 문이 하나 더 열리게 되는 일을 경험해 보았는가. 나는 웅장하게도 그것을 건축을 통해 경험했다.

학창 시절 연예인을 열렬하게 좋아해 본 적도 없고 운동을 열심히 해보거나 취미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나에게 무언가를 좋아해서 그것을 깊이 알기 위해 덕질도 해보고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들의 끈끈함을 느껴본 많지 않은 경험을 건축을 통해 했다.

그 당시 나와 친구들의 건축에 대한 진심을 나누고 있는 모습을 지금의 내가 멀리서 바라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어리다, 실컷 고생하기 전이라 저렇구먼.’ ‘틈틈이 주식공부나 하는 게 나을 텐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 당시에 누가 들으면 낯 부끄러웠을 법한 열정적인 건축에 대한 아이디어들과 그 당시 열망하며 읽었던 건축에 대한 책들, 전 세계로 발바닥 아프게 보러 다닌 건축물들에 대한 영감들을 주섬주섬 모아놨다가 내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투영시켜 재생산했다. 그런 것들이 현재에도 나에게 자양분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걸 보면 그때 조금 더 극성맞았어도 되었다.

그 당시의 건축에 진심이던 나의 친구들은 어찌 되었냐고?  건축 디자인을 해서 도시를 바꾸자며 단단한 생각들을 교환하곤 했던 친구들은 설계사무소를 3년도 다니기 전에 건설사나 금융권, 공무원 등으로 전업했다.     

대학 졸업 후 다들 건축설계사무소의 초년생으로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야근하는 날들이 다채로워졌다. 스케줄을 조정할 수 없는 뽀시래기들이라 다 같이 완전체로 만나는 건 하늘의 별따기여서 그나마 여러 분할된 조합으로 친구들을 만났다.

그럴 때마다 건축사무소는 야근도 너무 많고 박봉이고 몸만 축난다고 하는 소리들만 하다가 헤어졌다. 나는 힘든 몸을 이끌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씩 영혼이 일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다들 힘들구나….’ 아니면 ‘겨우 그런 것에 지치다니... 약한 것들...’ 속으로 생각했었다.

건축설계를 한다는 것은 버티기다. 생각 한편으로는 나도 사회 구조적으로 상한가를 치는 산업의 자리에 올라타야 하지 않을까…라는 때때로 했고 또 한편으로는 학과를 정하고 졸업을 하고 전공에 맞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사실이 소소한 충격이었다. 그런 충격은 지금도 이어져 내일모레 40인 지금도 계속 진로 고민 중이다. 아무래도 죽는 날까지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을까에 대한 진로(?)에 대해서도 고민한다고 하니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보면 진로 고민의 릴레이 일수도, 애당초 억울해 말고 인생진로고민 총량에서 직장 진로 고민에게 지분을 먼저 내어주는 게 속 편할 일이다.


효용감과 내적눈치

나도 여러 번 돌아설뻔한 순간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지탱하는 감정은 효용감이었다.

누구에게나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를 스스로 느끼는 게 일과 인생에서 중요하다. 건축물을 계획하고 지어지는 걸 보는데서, 그리고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시각화하는데서 가장 큰 효용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마치고 이 회사는 여기까지다… 하고 퇴사는 몇 번 했지만 ‘건축을 그만둬야겠다. 다시 태어나면 다른 직업을 가져야지’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효용감도 나를 지속하게 했지만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내적인 눈치라고 해야 되나, 스스로의 눈치를 봤다.

그래서 건축사 사무소를 2~3년 정도의 주기로 이직하면서 3개의 건축사 사무소를 다녔다. (나는 현재 6번째 직장 생활을 경험하고 있다. - 이력서가 많이 지저분…)


최사원 시절의 서막

20대 중반에 최사원이 된다. 그전에 대학생활을 하면서 북촌에서 한옥설계를 하는 회사에 다닌 경험이 있긴 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일을 하는 파트타임으로 하는 일이었다. 

파트타임 잡은 누가 스케치 해준 한옥 도면을 그리거나 오래된 한옥 건축물을 실측하는 일이었고 한옥건축 특유의 곡선으로 이루어진 선들을 그리면서 캐드를 다루는 실력은 그 당시 주변 사람들이 보면 놀랄정도로 향상되었다. 

공식취업을 위해 여러 회사들을 면접 보려고 계획을 세우고 서류를 접수하고 면접 일정을 시작하려는 찰나 첫 번째 면접 본 회사에서 다음 주부터 바로 출근 가능하냐고 해서 그냥 그러겠다고 했다.

그 당시 학부시절 만든 포트폴리오가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내심 그 덕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회사가 사원 한 명이 아쉬울 정도로 많이 바빴다. 그 당시는 잡플래닛, 블라인드 같은 회사 내 분위기, 복지등의 정보를 얻는 커뮤니티도 없었고 가족이나 주변 친구들 정보가 다라서 구직에 대해 다채로운 생각을 도와주는 툴이 별로 없어서 어리둥절해하며 입사했으나 그때의 단순한 결정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취업 당시 그간 했던 파트타임이나 다른 건축 관련 인턴생활도 경력으로 인정해 줘서 신입사원은 아니고 사원 2년 차로 입사시켜 준다고 했다. 그냥 사원이면 사원이지 사원 2년 차는 또 뭔가 2학년 같은 건가 하고 무심히 여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였다.

왜냐면 거의 대학생 마인드로 입사했는데 1년도 안되어서 대리로 진급해 금방 후배가 생겨 난감해졌기 때문이다. 사회 초년생이 직장생활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할 때가 일을 가르칠 후배가 생길 때부터라고 하던데

나의 경우는 너무 부담스럽더라고.

누가 누굴 가르쳐…?     


S건축의 사람들

나의 첫 건축사사무소는. 그 회사에서 지은 오피스텔의 지하에 위치했다. 택배나 배달이 올 때마다 ‘건물 지하로 내려오시면 돼요’라는 말을 했었다.

회사에 처음 면접 보러 갔을 때 사무실이 지하라고…? 일단 면접 연습으로 본 다음 마음에 안 들면 후보군에서 걸러야지 했는데 지하공간임에도 높은 층고와 불규칙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쌓여있는 도면과 모노톤으로 제작된 건축모형, 학교 도서관에 있을법한 원서로된 건축책이 많은 공간이어서 좀 멋있었다. 조금 더 넘쳤다면 허세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공간인데 지하에서는 좀 배운 티 내는 사람인척 해도 자만해 보이지 않으니까, 지하라는 조건과 현학적 톤 앤 매너가 적정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공간이 그 당시의 나에게 이 회사는 ‘건축에 진심’인 사람들이 일할법한 공간처럼 보였었다.

편의상 나의 첫 건축사사무소를 S건축이라고 하겠다. 이곳은 대표 소장과 부소장 P과장, K 대리, 임 대리, 장사원, 김사원, 경영관리과장이 있었다. 내가 입사했을 때 이미 2-3년 정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막역한 사이처럼 보였다. 특히 과장과 대리 3명 조합은 소장님과 회의할 때 외에는 거의 반말과 심한 장난이 수용될 정도로 친해 보였다.

P과장은 느글느글한 눈빛을 지닌 사람이었고 설계하는 사람 치고는 엉덩이가 무겁지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디자인 실력을 주변에서 인정해 주는 것에 기반을 둔 자신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입사하고 며칠 만에 퇴사했기 때문에 실제 교류는 없었다.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P과장이 잘했지… 이런 이야기만 구전으로 전해 들었다. 그 사람은 약 10년 정도 후에 S건축에 소장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만 역시 구전으로 전해졌다.

나는 주로 K 대리와 임 대리를 보조하면서 일을 했는데 두 사람 다 보조가 필요 없을 정도로 혼자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K 대리는 날쌘돌이 같은 사람이어서 평소에 밥 먹는 것, 말하는 것, 걷는 것, 하는 행동마다 1.2배속 느낌이었고 도면을 그리거나 모델링을 하고 있을 때 모니터를 훔쳐보면 빨리 감기 하는 화면처럼 보였다. 그 당시 저 사람은 지구에서 가장 빠르게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그에 반해 임 대리는 얼굴에 장난기가 넘쳤고 장난치려고 회사 출근하는 사람 같았다. 캐드로 도면 그리는 모습도 타닥타닥 소리를 크게 내면서 게임하는 건가? 의심할 정도로 혼자 뭔가 신나게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일도 성격도 무난해서 회사에서 사람들이 다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장사원은 나이가 대리들보다 많은데 공부를 많이 해서 회사 입사가 늦은 사람이었다. 박사까지 건축을 공부한 것이 자부심인 사람이었는데 건축 박사라기보다는 척척박사 같았다. 잡학다식했고 매사에 아는 것이 많았다. 나에게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같은 책을 재미있다고 선물해 줘서 선물 받고도 내심 아니꼬울 때가 종종 있었다. 지식을 뽐내던 그 당시 그 사람의 이야기들 중 주가 전망 이라던지 부동산 입지 같은 것은 몇 년 뒤에 그대로 된 일 들이 몇 개 있어서 별안간 놀라는 경험을 몇 번 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김사원은 이 시끌벅적한 남자들 사이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유일한 여자 직원이었는데 내가 들어가서 여자 사람은 두 명이 되었다. 야근을 그렇게 많이 하는 회사였는데 집에 일찍 가는 게 소원인 사람이었고 회식할 때는 또 절대 빠지지 않고 취할 때까지 술을 먹어서 당최 예측이 불가능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술이 취했을 때 일이 힘들다며 엄청 서럽게 울었다.     


삼겹살

첫 출근날에 컴퓨터 세팅을 하고 캐드 프로그램의 단축키들을 바꾸면서 워밍업을 하고 있는데 내 옆자리로 임 대리가 출근했다. 오전 11시가 다된 시간에 태연하게 큰소리로 전화를 받으면서 출근하길래 무슨 영문일까 궁금했는데 전날 거의 해가 뜨는 것을 볼 정도로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난 뒤의 출근이었다고 나중에 들었다.

회사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들을 훑어보다가 저녁이 되었는데 내가 출근한 첫날 이어서 인지 그날 저녁에 삼겹살집에서 회식을 하자고 했다.

회사 근처 삼겹살집으로 다 같이 걸어갔다. 창고형 건물에 드럼통 테이블에서 두툼한 삼겹살을 구워주는 집이었다. 테이블이 20개 정도 있었고 문 밖의 인도까지 드럼통 테이블이 있는 대형 삼겹살 집이었다. 소장님이 직원들에게 굉장히 후하게 이것저것 시켜주는 분위기가 좋았다. 윗사람 눈치 안 보고 직원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그런데 그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그 다다다음 날도 그 삼겹살집에서 회식을 했다. 나의 축하 회식이 아니라 그냥 그 회사의 주식이 삼겹살에 소주였다. 그때 나의 체내의 주요 구성요소가 거의 삼겹살이었다.

매일 오후 6시 30분 정도가 되면 회사에서 도보 5분 거리의 사거리 앞에 있는 삼겹살 집까지 다 함께 걸어가고 삼겹살을 사람 수대로 시키고 소주를 두어 병 나눠마시고 마지막으로 김치말이 국수까지 먹으면 8시 30분 정도가 되는데 그 시간에 다시 회사에 돌아와서 자정까지 일을 하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일이 일주일의 반 이상이었다.

진짜 이렇게 까지 매일 삼겹살을 먹는다는 사실이 어디 뉴스에 나올 일이 아닌가 싶었다. 출근했던 주말을 포함하여 일기장에 삼겹살을 먹은 날을 적어본 적이 있는데 저녁으로 13일 연속 삼겹살만 먹은 적도 있다. 삼겹살을 먹지 않는 날은 무엇을 먹었냐면 갈빗집에서 양념갈비와 비빔냉면을 먹었다.

그때는 전국적으로 주 5일 근무 의무적용되기 전이었는데 S건축은 토요일은 오전 근무만 하는 규정이었다

두어 달에 한번 정도 문화 데이라는 이름으로 주말에 전시회를 봤는데 어떤 날은 토요일 아침에 모여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를 관람하고 그 뒤편의 우면산으로 등산까지 하고 내려와서 다시 사무실에 와서 일을 하고 저녁에 또 삼겹살을 먹었다.


크리틱

그 당시 S건축의 대표인 M소장님은 나에게 굉장히 큰 산 같은 존재였다. 아침에 같은 시간에 회사를 출근하는 매일매일이 올림픽 출전 하는 듯한 부담감을 지닌 신입사원에게 설계를 20년 이상 사업으로 해온 사람은 너무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소장님과 교류하는 경우는 가끔 점심을 같이 먹을 때나 일주일에 한두 번 평면이나 입면을 계획해서 소장님 방에 들어가서 약 한 시간 정도 크리틱 시간을 가지는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설계 스튜디오의 방식과 매우 비슷했는데 아마도 그 당시 소장님이 어느 대학의 건축과 스튜디오를 맡은 교수였기 때문인 듯했다. 한 시간 동안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스케치하고 모형을 수정하면서 설명해 줄 때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꼿꼿이 앉아 노트에 받아 적으면서 경청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지만 몇 달에서 몇 년 소장님의 스타일에 맞추다 보니 어느 한 사람의 취향을 어렴풋하게 흉내 내는 정도는 터득이 되었다.

그러다가 한 1년 정도가 되니 최대리가 이제야 입면 좀 만지네, 이런 소리를 들었다. 칭찬받고도 꺼림칙한 느낌이었는데 소장님 방에서 들었던 그 멘트를 나중에 술자리에서 임대리가 성대모사해서 입을 틀어막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지나고 그런 시간들을 통해 뭐가 체득되었나 생각해 볼 때가 종종 있었다.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 당시 소장님 방에서 들었던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명쾌하게 알아들을 만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이야기가 끝날 때쯤 자기가 요즘 보는 어느 건축가의 작품집을 꺼내면서 평면과 입면을 짚어주면서 이런 식으로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붙여서 그 책을 받아 들고 나오면서 그 시간은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소장님이 요즘은 무슨 책을 보는지에 대해서 직원들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는 했다.     


충돌

S건축에서는 학창 시절과 닮은 소소한 재미들이 있었다. 소장님 생일에 맞춰 사무실에서 깜짝 파티를 준비한다거나 광주비엔날레 전시를 보고 소쇄원을 답사한 다음 펜션 거실에 둥그렇게 앉아서 공기 시합을 하고 롤링페이퍼를 하면서 놀았다.

평일에 12시까지 야근을 하고도 전주막걸리처럼 한상이 나오는 막걸릿집에서 술을 먹고 새벽 4시까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헤어지는 날도 종종 있었다. 눈이 쌓인 주말에 직원들끼리 만나서 등산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회사에서 야근을 늦게까지 하면서 쉬는 날도 만나서 노는 서로 일도 하면서 같이 노는 친구들이었다.

삼겹살과 소주와 야근으로 나눈 정이 얼만데 매일 같이 지내면서도 다들 한구석씩 모 난구석이 있어 일할 때나 술 마실 때 자주 의견이 충돌했다. 충돌하는 모습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다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자존심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빚어진 충돌로 생각된다.

더 잘하고 싶어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있나 불확실해서, 나를 판단하고, 남을 판단하느라 벌어지는 충돌이었고 건축과 일에 대한 생각들이 다를 때 서로 이해할 때까지 언성을 올리기를 서슴지 않을 정도로 다들 진심이었다.

그래도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면서 풀릴 정도의 충돌이었다. 그때의 사람들은 20대 중후반, 30대 초반이었는데 다들 어렸지만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다들 빠릿빠릿하고 서로 암묵적인 선의의 경쟁을 했고, 술을 마시면서도 좋은 건축, 하고 싶은 건축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젊고 앞으로 건축가가 될 거다라는 자의식 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과 일할 때 꽤 즐거웠다. 그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흐르고 다른 곳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일하게 될 일이 있을 때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충돌을 구분한다. 일에 자존심을 걸기 때문에 생기는 충돌, 아니면 비열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충돌, 전자의 경우는 얼마든지 수용 가능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고생

프로젝트가 많아졌고, 인원도 초기 멤버 외에 3-4명 정도가 더 들어왔다. 신입사원이었던 내가 회사를 반년도 채 못 다녔을 때부터 나를 홀로 합동사무소라는 이름의 외부 컨소시엄에 몇 달간 덜렁 파견을 보내는 일이 빈번했다.

도로나 터널 등을 건설할 때 주변에 필요한 관리사무소 같은 성격의 건축물을 설계하는 프로젝트였다. 요즘에는 없어진 방식인데 건설사와 계약해서 진행하는 ‘턴키’라는 방식이었다. 프로젝트 전체로 봤을 때는 중요도가 높지 않은 건축설계였으나. 도면 그리고 보고서 쓰고 구조, 기계, 전기들을 협의하는 과정이 나의 경험에 비춰 봤을 때 벅차기만 했다.

분야가 다른 남의 회사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물어 가면서 자갈밭에 리어카를 끌고 혼자 걸어가는 듯한 기분을 자주 느꼈다. 누구에게 질문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정도의 무지일 때도 많아서 사무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어떻게 말하고 일해야 할지 몰래몰래 전화로 도움을 청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무책임한 회사와 무식한 직원 아니었는지, 사자 새끼 태어났을 때 절벽에서 던지는 코스프레를 하고 싶었던 건지 나름의 감성적 의문을 품었었는데 그냥 용역비 대비 인력 투입에 따른 이윤에 대한 꽤 단순한 수입구조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조했던 K대리나 임대리는 이런 일들을 혼자서 척척 해결하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냥 나도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힘듦을 미련하게 앞선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의 파견을 왔다 갔다 하면서 스스로를 푹 담갔다가 꺼냈다가 하다 보니 6개월 단위로 직급과 연봉을 올려주면서 나중에는 팀원까지 붙여서 더 큰 건축물을 설계하는 프로젝트에 파견을 내보냈다. 그 당시 나는 갑자기 과장이 되어 있었는데 나보다 3-4 살 많은 사원 두 명을 팀원으로 데리고 파견 나갔던 어느 철도역사 신축공사 합동사무소에 파견 나왔을 때 노력과 버티기의 한계를 느끼고 거의 울지만 않았지… 아니, 울었던가?

겨우겨우 마감만 끝내고 하고 도망치듯 회사를 그만두었다. 

S건축과의 2년간의 시절 인연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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