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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Aug 17. 2021

두 번째 건축사 사무소 E건축

전문성과 즐거움의 비례관계

전문성과 즐거움의 비례관계

업무에 관계없이 어디를 갈 수 있다거나, 장소를 선택할 권한이 주어지면 새로운 시도를 볼 수 있는 공간을 물색한다.

재료를 특이하게 사용하거나 거대한 규모, 김봉렬의 한국건축이야기에 나온 고건축을 주제로 국내외 건축답사를 다녔고 구마겐코나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물들로만 루트를 계획하여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나의 여행기들을 본 지인들은 건축을 전공해서 감상이 깊어 재미있겠다고 부러움 섞인 이야기를 건넨다.

정말 그런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를 살아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영화를 전공하면 영화관람이 즐거울까 와 비슷할 것 같다.

오히려 ‘전문성’은 ‘즐기기’라는 종목에서는 좀 처지는 스펙일 수 도 있다고 본다.

나의 경우에는 어느 공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할 때가 확실히 자주 있다.

일단 누군가가 너무 잘해놓은 공간에서는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건물 주변의 맥락 (도로, 조망, 방향, 주변건물 디타등등)을 잘 읽어내고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 누군가의 건축물을 보면 나에겐 언제 이런 공간을 만들 기회가 주어질까 부러움과 경외심 그리고 머릿속에서 내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떠올리며 나는 어떻게 하고 있지,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으로 이어진다.

멋진 공간을 즐기지 못하는 일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누군가가 터무니없이 이상하게 만들어 놓은 공간을 보면 더 복잡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을 때 조도가 불균형하거나 눈에 거슬리는 조명을 발견했을 때 ‘아… 저거 설치해 놓고 후회 좀 했겠어.’라는 생각이라던가 ‘벽면 재질이 소리를 하나도 못 받아 줘서 사람들 대화소리가 울리나 봐.’ ‘여기다 통로를 만들면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정신이 없잖아.’ 같은 생각에 평면과 치수를 떠올리면서 서있는 자세도 아니고 걷는 자세도 아닌 몸의 움직임을 하기도 하고 아마 이거.. 내가 했어도 이거 다 지어진 다음에 이상하다고 깨달았겠지? 그렇게 휴식을 취하러 왔다가 업무로 연결되는 생각은 굴비처럼 엮이고 엮이다가 ‘공사 중에 이상하다는 거 깨달았겠지, 그리고 이거 수정하려면 돈이 얼마지? 계산을 해보면, 못 본 척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돌아서다 심장을 부여잡으며 외면하려다가 직업인으로서의 양심이 눈치 없이 고개를 들고, 이거 혹시... 수정이 가능할지요...? 그리고 현장소장님한테 나라를 팔아먹은 죄인처럼 석고대죄, 현장소장님 이거… 저 진짜 큰일 나요…’로 이어지는 앞머리가 덥수룩한 어느 건축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상영된다.

다양한 감상이 일어나는 것을 즐거움으로 느낀다면 일종의 재미도 있다. 

남이 만들어 놓은 공간들을 비교하고 평가하고 남에게 알려주고 혼자 생각하는 놀이를 즐긴다. 누군가 여행 가는데 방문할 만한 공간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나는 그 사람의 성향과 동행인과 근처에 가볼 만한 곳까지 고려해서 말해준다. 이 공간을 디자인한 사람이 했던 다른 공간도 말해주고 그러고 나면 상대방은 왜 자판기에 천 원 넣었는데 생수가 열개나 나오고 난리야 그만 나와… 이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때도 있지만 지원이 네 말 듣고 보니 달리 보이더라. 이런 피드백받으면 보람을 느끼곤 한다

그런 즐거움보다는 흐린 눈을 하고 불편한 감정을 덜 느끼려고 할 때가 있다.

그 공간을 스스로에게 무해하고 그 시간과 공간을 무용하게 보내는 소비자로서 즐기고 싶기 때문에 몰딩이나 걸레받이를 트림이 나오기 직전의 소화불량 표정으로 뚫어져라 쳐다본다거나 벽의 바탕 재질 알기 위해 괜히 중지의 관절 부분으로 벽을 쳐보거나 카페에 있는 의자를 나중을 위해 알아두려고 상표 확인을 위해 의자 밑에 얼굴을 집어넣거나 하지 않는다.

정정해야겠다…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자제해야겠다…


두 번째 건축사 사무소 E건축

신입시절에는 ‘이 업무만 하면 앞으로도 이 업무만 하게 돼서 나는 이 업무밖에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건가.’로 이어지는 업무편향저주설을 신봉한다. 나 역시 신입시절에는 다양한 업무를 경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지금도 새로운 업무를 할 때에 경험이 확장되는데서 오는 안정감을 느끼는 성향이 남아있다.

최근에는 면접관으로서 면접을 진행할 경험이 종종 있었는데 모든 신입들이 저는 다양한 경험을 추구합니다.라는 말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사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S건축을 그만두고 이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요즘의 신입이나 내가 신입이었을 때나 마찬가지로 다양한 업무를 하고 있어야 불안감은 해소되었기에 나 역시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두 번째 회사를 찾는 프로젝트의 대 주제는 해보지 않은 새로운 용도를 설계하는 회사를 찾자 로 시작하였다.

S건축에서 나는 주택가에서 쉽게 만나는 그런 소규모 건축물보다는 주로 대로에 면해 있거나 고속도로 근처에 있는 인프라 사업의 일환인 건축물을 설계하는 일로 보내온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건축사협회 홈페이지 구인란에 업데이트된 회사 중 홈페이지에 수행 프로젝트소개탭에서 내가 접해본 용도의 프로젝트들은 피해서 지원대상을 선별하였다.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고 선별의 선별을 거쳐 두 개의 회사에 지원했는데 두 개다 면접을 보고 최종 합격했다. 그때만 해도 백전백승이 왜 이렇게 쉽지? 생각하던 시절이었지….

첫 번째 면접 본 곳은 20명 정도의 공동주택 현상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다.

면접 보러 갔을 때 사장님 방에서 일대일 면접을 보았는데 냉장고에 비싼 음료수가 많아서 인상적이었다. 면접 내내 저는 매우 똑 부러지는 3년 차입니다. 정말 그래 보이시죠?라는 초롱한 눈빛 뒤로 저 음료수는 사장님 전용인가 직원들도 꺼내먹을까 딴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아파트 시장이 호황이라 높은 재화가치에 따라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만들려고 애를 쓰지만 그때만 해도 아파트는 살기 위한 기계에 불과해 보였고 아파트 설계하는 사람은 건축가 라기보다 엔지니어라는 생각이 면접 후 회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점점 확고해져 최종 선택에서는 제외되었다.

두 번째 면접 본 곳은 200명 정도 규모의 회사인데 주로 학교와 일반 건축물을 설계하는 회사였다. 면접 대기실에서 면접자들이 함께 대기하고 있다가 호명당하면 여러 명의 면접관 vs 면접자 1인 구도로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면접대기실에서 처음 보는 면접자들끼리 긴장을 해소하려고 했던 건지 전에 있던 직장과 연봉 정보 등의 매우 사적인 정보들을 서로 교환하고 각자의 포트폴리오도 같이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게 좀 이상해 보였다.

내 이름이 호명되고 면접장에 들어서니 머리카락의 검은색보다 흰색 비율이 약간 더 많은 임원 두 명과 실무자 한 명이 있었다. 임원 두 사람다 어린아이 같은 눈웃음과 웃음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면접 순서 중 포트폴리오에 있는 프로젝트 중 한 가지를 설명하라는 면접관의 말에 S건축에서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끊임없이 스케치하고 디벨롭하여 관철시킨 계획안과 납품 후 현상설계 탈락 과정을 겪은 개인적인 설움, 그러나 그것을 통해 강해진 나 자신으로 연결되는 전형적 세바시 재질의 스토리를 쇼맨십을 발휘해 거창하게 말하는 나를 좋게 봐주었는지 합격으로 연결되었다. 면접은 면접관과 면접자가 서로를 평가하는 자리라면 면접자인 내 눈에 그분들은 꽤 오래 묵은(?) 직장인임에도 건축과 학생처럼 건축에 대한 열정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남아있어 나에게도 합격이었고 저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조건 E건축 합격하면 가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합격했는데 그분들과는 전혀 다른 본부에 배정되고 E건축 다니는 동안 그분들과는 두 마디 정도의 대화를 나눠봤다.

그때 경력직 공채라는 시스템을 몸소 이해했다.


2년 반 동안 세 번의 본부 변경

E건축에 머무는 동안은 이명박 정부 시기여서 4대 강 사업 진행이 한창이었다. 학교를 많이 짓는 회사였기에 학교설계 프로젝트를 기대하고 갔는데 입사초기 1년간은 4대 강 사업을 홍보하는 전시관, 4대 강 주변에 있는 취수탑, 전망대 등의 강 주변에 있는 인위적인 건축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대부분 꼼뻬형식(타 업체와 경쟁 후 당선된 경우 실시설계)이어서 몇 달에 걸쳐 계획하고 보고서 쓰고 설계단계 납품은 했는데 사업이 불발되어 공사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1년이 지나고 대대적인 본부 개편이 있었다. 내가 있던 본부의 본부장이 영업부서로 발령 나면서 팀원 전체가 다른 본부들로 흩어졌다.

새로 이동한 본부는 적응하기 어려움 소모임에 초대된 느낌이었다. 그 소모임 아니 새로운 본무의 부장님은 아침마다 팀원들을 카페로 데려가서 지난밤 집에서 있었던 일을 4~50분가량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주제는 아니고 어제 부장님의 5살 된 아이의가 했던 말, 행동, 남편과 먹은 메뉴 등의 사적인 이야기를 계속 듣는 시간이 아침마다 이어졌다. 내심 이건 인생낭비다 싶었는데 이미 그 본부 사람들은 그게 익숙했는지 다 같이 경청하고 공감하는 모습들이 그냥 억지 사회생활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고 있는 동안 딱히 그 본부에서 했던 프로젝트는 없었다.

디자인 매뉴얼을 만들려고 회의만 여러 번 하고 이것저것 프로젝트 검토를 하다가 불발되고 다른 본부에서 당선된 설계안 실시설계 관리하기 전 필요한 잡다한 일을 챙기고 그러다가 합동사무소에 다시 또 홀로 파견을 나갔다. E건축을 다니는 기간 동안 본사에 있을 때는 파견 나가기 전 약간의 쉬는 기간, 그리고 다시 파견 나가서 일상을 끊고 주 7일 일하기 패턴을 유지했다.

그리고 파견을 나갔다가 오면 본부가 바뀌어있고 그런 식이었다.

그 시절 외부로 파견을 오가며 하루동안 주어진 일만 감당하기도 벅차서 그 회사의 전체 틀을 이해 못 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본부장들이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 춘추전국시대를 겪는 중이었나 보다.

그 와중에 E건축을 다니면서 결혼도 하고 신혼여행도 다녀와서 평상심을 유지하기 힘든 것까지 더해져 나 같은 프로이직러 (물론 이때는 이렇게까지 이직을 많이 할 줄은 몰랐지)에게는 더 자리 잡기가 힘든 회사가 되었다. 공채로 들어온 고인 물들이 오래도록 자리 잡고 있었고, (건축설계는 2-3년 주기로 많이들 옮기는데 이런 회사도 있어야 세계의 균형이 맞는 건가.) 장기근속이 이어지고 있으니 어찌 보면 꽤 안정적인 회사다. 결혼하고 외부 파견 프로젝트를 하나 마쳤고 피차간에 별 볼일 없어 보여 퇴사를 하기 위해 마지막 면담을 했었다.

퇴사할 때 사장 면담까지 진행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평소 대화 한번 나눈 적 없던 사장님이 내 얼굴을 보면서

‘이제 결혼도 했으니 출산하고 일을 쉬면 되겠네’라는 말을 했다.

그 당시에 내가 퇴사하는 남자 직원한테도 그렇게 말씀하실 건가요?라고 말했다고 멋지게 써버리고 싶지만 ‘하하... 네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고 털털한 웃음을 보이고 그 방을 나왔다.


시절을 저장

내가 거쳐온 많은 회사들과 다르게 E건축은 퇴사 후 연락을 유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 와중에 몇 년 동안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서 서로 관찰하고 가끔 디엠 보내고 연락하는 나보다 3살 어린 최 씨 동생이 있다. 최근에 그 최 씨 동생이 결혼을 한다고 나를 찾아와서 함께 밥을 먹고 천안에서 치러진 결혼식에도 찾아갔다가 심히 놀라는 일이 있었다.

내가 회사 다닐 때 보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직 E건축에 다니고 있어서 나의 어느 시절을 그대로 저장해 놓은 외장하드를 열어본 느낌을 경험했다. (그럴 일인가 모르겠는데 나는 약간 소름이 끼쳤음) 심지어 지인 최 씨는 E건축을 다니는 직장동료와 결혼까지 했다. 씨족사회처럼 회사 안에서 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느낌으로 그 결혼식과 피로연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곳을 이미 수년 전에 빠져나와서 다른 삶을 사느라 거의 잊고 있었지만 그곳에서는 나를 E건축을 스쳐간 사람 유형 중의 하나로 가끔 회자했다고 한다.

이 회사에 대한 좋은 기억이나 나쁜 기억은 1도 없다.

나는 크고 작은 6군데의 회사를 다녔는데 회사를 다니다가 궁지에 몰리거나 외롭거나 맘에 드는 이가 없으면 억지로라도 예전의 좋은 기억을 끄집어내어 입속으로 그때는 그래도 00이라도 했었는데… 를 하곤 했다.

예를 들면

그때는 사수라도 있었지

그때는 디자인이 필요해서 하는 야근이니까 했지

이런 식의 부분 소환을 통해 과거의 기억들을 미화시키는 습관이 있는데 E건축만큼은 딱히 소환 거리가 안 생긴다. 잊어버리기 적절한 어느 시절이었다. 이렇게 정리해 보니 E건축은 그냥 한마디로 ‘맹탕’

E건축을 그만두자마자 교회에서 잠깐 친하게 지냈던 K언니의 인테리어 현장을 도왔다.

그때 나는 한창 건축사 예비시험을 준비하던 때였고, 그 시험을 매일매일 하루종일 시간을 다 써서 공부하고 준비해서 불합격하면 부끄러우니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나는 왜 이럴까) 인테리어 현장은 경험도 없고 본 적도 없는데 현장을 보조할만한 사람이 없대서 갑자기 하게 된 일이었다. E건축에서 받았던 월급보다는 적은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서 압구정에 있는 어느 병원 인테리어 공사를 주, 야간으로 상주했기에 근무시간은 짧지 않았는데 내가 생각해 봐도 나는 딱히 인테리어 현장에서 효용성은 없었다.

그 언니는 친한 주변 사람들에게 지원이랑 함께 일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지원이는 너무 비싼 인력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그 말을 몇 번 듣고 빨리 다른 회사를 알아보고 취직하게 되었고 그곳은 H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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