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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Aug 22. 2021

H건축(상)

기초를 깊게 심으며 스스로를 세우는 일


관계가 지속되는 이유 중 가장 쉬운 것은 서로 같은 처지 일 때다.

한 시절 열심히 자주 모이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교회에서 만난 결혼한 지 1~3년 된 부부 모임이었다.

나이와 결혼시기들이 비슷하고 다들 이름만 들어도 업종을 확실하게 알만한 직장에 다니거나 전문직 자영업을 하고 있어서 일에 관해 이야깃거리가 풍부했었고, 모임은 점점 커져서 6~7쌍의 부부, 다 모이면 열댓 명 정도가 되는 어른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다니면서 함께 여행도 다니고 집을 오가기도 했다. 지금은 출산유무로 라이프스타일 대조가 극심하게 나뉘어 출산을 하지 않은 우리와 다른 한 부부만 연락하며 지내고 소원해졌다. 자녀가 생긴 사람들은 대화 주제의 99퍼센트가 임신, 출산, 육아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직접 겪은 적은 없어도 사람 얼굴만 바뀌면서 똑같이 반복되는 그 이야기를 들어줘야 했다. 나는 ‘육아를 하지 않아서 남는 에너지로 하고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기 일쑤였고 육아에 절어있는 사람에게 ‘언감생심 나는 그런 거 꿈도 못 꾼다’의 자조적 답변을 듣게 되고는 했다. 나의 일상 이야기가 육아의 고충을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 불편한 감정으로 변환될 수도 있어서 나는 화자보다는 청자 쪽을 택하며 화자의 인중이나 미간을 바라보면서 딴생각을 했고 ‘그래서 지원이 너는 출산 언제 할 건데? 노력은 하고 있어? 안 생기는 거야 안 낳는 거야?’를 간간히 들었으니 관계들이 잘 유지될 수가 없었겠다. (나는 아마도 미간을 찌푸리며 싫은 티를 냈을 거다.) 일거수일투족을 나누고 호호 할머니까지 변치 않을 것 같던 고등학교 친구들의 경우도 그렇다. 대학교와 전공이 나뉘면서 대학생활의 각기 다른 근황을 나누며 이어져 오던 만남은 결혼의 유무로 나눠지면서 또 위기를 맞지만 근근이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다가도 출산, 육아라는 매머드급 전환장치는 친구들의 관계를 몇 년간 추억 속에 묻어버리게 하기도 했다. 하물며 성인이 되고서 알게 된 사람들의 관계는 더 선택적이고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겠다.

각자의 자녀 유무의 스펙(?)으로 나뉘기 전 떼로 모이던 그 모임 중에 부모님의 재력이 월등하게 앞서는 멤버가 있었다. 어느 날 자조적으로 ‘나는 살면서 나 스스로 이룬 것이 하나도 없어. 다 부모님의 손을 빌렸지’라고 말했다.. 그때는 다들 30대 초중반의 나이였고 우리 모임에 혹시 나도 모르게 마크 주커버그 라도 있었던가. 다들 취업한 지 5년 내외의 직장인, 아니면 ‘OO사’가 되어 이제야 첫걸음을 뗀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었다. 우리 중에 딱히 뭘 이뤘다고 거창하게 말할만한 사람 없는데 왜 저런데? 싶으면서 그냥 부모님이 너무 부자인 게 미안하면 저런 소리를 하나 싶었었다. 아마도 결혼하고 강남에 살면서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데 생산성이 없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어쨌든 누군가에게 길러지고 있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고 그 길러짐에서 오는 자조적인 멘트였을 수도 있겠다. (가끔은 너무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이 툭 던진 한마디는 딱히 명언도 아닌데 나에게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이렇게나 긴 생각을 하게 한다.)

몇 년 전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다는 전시가 있었고 매우 흥행에 성공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복잡했던 것이 떠올랐다. 시간과 돈이라는 재화를 양손에 쥐고 세상아 덤벼봐라 살면 좋겠다만 평생 이루어질 일이 없는 상황을 ‘기분이 어떨까?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생각보다 나쁘려나?’ 어렴풋한 상상은 핑크빛 상상임에도 입가에 웃음기조차 떠오르지 않아 자제하는 편이다. 멍 때리고 앉아 있느니 나는 스스로 기르는 삶을 살기 위해 계속 일을 하고, 지나고 보면 계속 직접 안 겪어도 됐을 경험까지 직장생활에 무수히 끼워 넣으며 스스로를 양육하는 나에겐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이야기가 불편했나 보다.

계속 직장과 이직이야기를 하는 나는 내가 살는 삶이 누군가에게 길러지는 것보다 진짜 인생을 사는 것이기에 스스로 이룬 것이 없다고 자조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보다는 더 초롱한 눈빛으로 내가 기르는 나의 삶, 직장, 이직에 대해 쓰고 있다.      


그래서 또 일하러 - H건축 면접, 연봉협상

E건축을 퇴사한 뒤 두어 달 인테리어 아르바이트, 건축사 예비시험공부 및 합격으로 한 달을 더 보내고 구직을 준비하려는 찰나 건축사협회 구인공고란에서 H건축의 3개월짜리 프로젝트를 위한 경력직 공고가 눈에 띄었다.

H건축은 설계업을 잘 몰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대형 회사라 궁금증도 있었고 주변에 다니는 사람도 있어서 구직준비하기 전 프로젝트 베이스로 일을 한번 해볼까 해서 지원서를 내봤다. 자유로운 프리랜서의 삶이 궁금하던 때고 나에게 정기적인 직장인의 일상보다 프리랜서의 일상이 더 잘 맞을 수 있을 거란 추측으로 3달만 짧게 다녀보자는 생각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을 하자마자 바로 해당 본부 임원진 면접과 며칠 뒤 연봉협상을 위한 면접으로 신속하게 이어졌고 E건축에 다니는 동안 H건축과 컨소시엄으로 몇 달간 함께 프로젝트의 PM(프로젝트 총괄)이 나를 긍정적으로 기억하고 그것이 해당 본부에 참조되어 3개월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으로 제안을 받았다. 제안받은 연봉을 보고 더 높은 연봉을 요구했더니 인사팀 전무가 그 정도는 내부 연봉 테이블과 맞지 않아 안 된다고 했다. ‘인연이 아니었군.’ 쿨하게 그만 가보겠다고 했더니 다시 원하는 연봉을 주겠다고 했다. 거의 동남아 시장 흥정보다 신속한 뒤집기여서 생각보다 연봉 테이블이라는 것이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구나 짐작했다. 1차 제안받은 금액으로 입사했으면 후회했겠다는 생각이 H건축에 다니는 동안 간간히 들었다.


둔한 사람

이름을 무수히 들어본 대형 설계사무소에 들어가니 주변에서 축하 전화가 몇 통 왔다.

대형 설계사무소는 공채 신입으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만 그 당시 경력직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는데 다들 실상은 잘 모르는지 그냥 축하해 줬고 고맙게 받았다.

그 당시 건축설계 10년 이하 경력직은 수요가 많아 이직이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더 심해져서 경력직이 씨가 말랐다는 표현을 써도 될 정도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있다.

아직도 분기마다 일할 사람 추천해 달라고 여기저기서 전화가 온다.

H건축으로 취직이 되어 잠깐 좋았다가 내가 배정받은 본부를 며칠 다니고 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배정받은 본부는 H건축에서 수주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국내외의 개발사업, 현상설계 등 호흡이 짧고 강도가 센 프로젝트만 전문으로 맡는(‘쳐내는’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림) 본부였던 것이다.

지옥문을 룰루랄라 걸어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들어갔고 들어가자마자 발밑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서있었고 옷에 불이 붙었을 때야 지옥인지 눈치채는… 내가 그렇게나 둔한 사람이었나.



불닭볶음면보다 더 매운맛

이름을 무수히 들어본 대형 설계사무소에 들어가니 주변에서 전화가 몇 통 왔다. 대형 설계사무소는 공채 신입으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만 그 당시 경력직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는데 다들 실상은 잘 모르는지 축하를 해줬고 고맙게 받았다. 지금처럼 인력난이라는 표현까지는 쓰지 않았지만 2010년 초반 건축설계 10년 이하 경력직은 수요가 많아 이직이 어렵지 않았다. H건축으로 취직이 되어 잠깐 좋았다가 내가 배정받은 본부를 며칠 다니고 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배정받은 본부는 H건축에서 수주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국내외의 개발사업, 현상설계 등 호흡이 짧고 강도가 센 프로젝트만 전문으로 맡는(‘쳐내는’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림) 본부였던 것이다. 지옥문을 룰루랄라 걸어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들어갔고 들어가자마자 발밑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서있었고 데어봐야 불인 줄 알아채는 나는 지독하게 둔한 사람이다.

앞서 다닌 S건축과 E건축도 건축사사무소라면 응당 젊은이의 청춘을 앗아가며 몸을 지치게 해야지 라는 사명감을 아주 성실하게 실천하는 회사였으나 나의 세 번째 건축사사무소인 H건축 개발(가칭) 본부는 정말 매운맛 중 매운맛이었다. 프로젝트가 항상 갑작스럽게 시작되었고 임원들이 본부장실안에서 나오면서 회의실로 누구, 누구, 누구 들어와로 이름을 지정해 부르는 것이 시작이었다. 회의실에 들어가면 “자. 지금 하던 거 다 접고 이거부터 시작하자.”라는 말과 함께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같은 먼 나라의 도시계획지도를 펼치면서 개략적 용도와 연면적 디자인 방향을 빠르게 전달받았고 짧게는 2~3주 길게는 두세 달 동안 일상과의 단절을 겪으며 제안서와 모형을 제작하는 일들이 분기마다 있었다.

응급상황이 아닌 프로젝트의 계획안은 디자인하면서 소장에게 까이고 본부장에게 까이고 겨우겨우 본부선에서 정리해서 진행하려고 하면 대표에게 까이고 대표까지 승인을 받아도 발주처에게 까이고 살면서 당할 수 있는 까임을 H건축에서 단기에 총량을 다 채웠다.

그때의 동료들과 H건축 이야기를 군대 이야기처럼 회상할 때 그 디테일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 정확하게 무슨 내용의 제안서를 만드느라 그렇게 고생을 했는지가 흐릿하다. 총체적인 기억은 야근과 특근마다 사연 없는 것이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는 것, 그때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겠지 깊게 판단해 봐야 내 몸만 피곤하지’로 고통을 외면하는데서 오는 기억오류다. 월요일 아침 8시에 잡혀있는 미팅 같은 이유였던 것 같기도 하고, 금요일 저녁에 뭔가를 컨펌받았는데 본부장이 집어던졌었던가…?

한 번은 복합시설을 설계하는 한 달 정도 4~5명이서 매일매일 집에 막차를 타고 갈 정도로 모형실에서 각 사람마다 5-6개의 스터디 모형을 만들고 평면스케치를 하고 하루를 꽉꽉 채운 다음날은 본부장의 입을 통해 몇십 개의 모형이 재활용도 불가한 일반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또 한 번은 중동지역에 초고층 쌍둥이 타워를 건설하기 위한 디자인을 했는데 디자인대안 1, 2, 3, …. 37, 38…. 102-1, 102-2… 이렇게 까지 번식시켰는데 다 까였다. 여유가 있었다면 디자인 얼마나 까여봤니 동호회라도 만들어서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든다. 까이고 나면 스스로와 팀원들을 위로하기 위해 디자인을 잘한다고 인정받는 것은 소개팅에서 성공하는 것과 같다고, 소개팅 매번 잘되기는 힘들지만 언젠가 나와 맞는 사람 만나는 날이 올 거라며 디자인도 그럴 것이다.라고 위로를 했었다. 지나고 보니 디자인을 잘하고 못하고는 소개팅처럼 개인의 취향으로 좌지우지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코드가 존재했는데 그것을 못 잡아냈던 거였다. 그러고 보면 소개팅도 매번 성공하는 애들이 있단 말이지.


매운맛을 3년 참은 대가로 얻은 것

주 7일 근무 밤 12시 퇴근을 했던 시기들을 보내며 야근이 없는 날은 조퇴하는 기분과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리번거리면서 회사 밖으로 나왔다. 주말 이틀을 마음 편하게 쉬어본 것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일이라 지인들과의 모임 당일에 갑자기 안 나타나는 사람 또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너희끼리 시간을 잡아 나는 상황 봐서 갈게.’의 아이콘이 되었다.

주변에서 “도대체 왜 그렇게 일을 많이 하는 거야? 돈을 그렇게 많이 버는 거야? 세상일을 다하는 거야?”라는 질문을 듣다 보니 나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점점 체념하게 되고 그럴수록 회사 사람들 하고만 친해졌다. 가끔의 휴일이나 심지어 여름휴가도 회사 사람 중 시간 되는 사람이랑 함께 전시를 보러 가거나 가까운 나라로 프로젝트 벤치마킹을 다녀오면서 보냈다. 서로 징그럽지도 않았는지 평일 밤 12시에 퇴근한 노비들끼리 회사 앞 호프집에서 맥주 마시고 회사이야기를 하다가 새벽 2시에 헤어지기도 했다.

지금도 여행을 함께 다니고 이사할 때마다 집에 초대해 세간들을 보여줘도 괜찮은 사람들은 H건축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매운맛을 3년간 참은 대가로 그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이 나에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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