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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Sep 07. 2021

건축사자격증

끝맺음이 아닌 더 자라기 위한 마디를 만드는

각자의 총량

오스카 니마이어, 필립 존슨처럼 호호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건축가로서 실무를 하면서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고 매번 실패를 거듭한다는 인터뷰는 흔하다. 건축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저 나이에 저런 말을 할까.

동시에 직업으로서의 건축가를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던 것도 80세 노인이 될 때까지 학생 같은 마음으로 계속 건축설계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지점이다.

길고도 외로운 인생에 건축이 있어서 - 냉소적이고, 인간관계도 협소하고, 취미도 내세울 것이 없고, 자식도 없고, 애완동물도 없고, 대단히 무언가를 갈망하지도 않는 나에게 평생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어서 - 정말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어느 직업과 회사를 선택하는 그동안은

내가 업으로 삼을 것,

내가 속할 조직에 대한 속성에 대해서만 집중했었다.

직업과 조직의 기반만 잘 갖춰져 있으면 그에 순응하며 성장할 나라고 확정했었기 때문이다.

평생 한 분야를 지속적으로 직업으로 삼는 것 에는 그 분야의 속성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 다른 조건들도 수반되어야 한다.

건축의 속성은 무궁무진해도 나의 체력이 무궁무진하지 않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더라도 스스로가 유사한 패턴으로 무언가 습득하고 생산하는 것을 지속가능하게 받쳐 주는 끈기와 열망이 받쳐주지 않았다.

나에 대한 오해와 이해의 균형 속에서 삶을 이어가다가 차츰차츰 나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을 때 나에 대한 객관화를 바탕으로 내가 인생에서 직업으로서 건축설계를 할 수 있는 총량이 얼마나 될지가 대략 측정되었다.

그건 고작 H건축을 그만두는 약 10년 차 일 때,

아무래도 총량을 다 채운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 건축설계를 할 수 있는 총량은 딱 요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설레고 배우는 중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죽기 전까지 건축을 갈망할 총량이 주어졌겠지만 나에게는 H건축까지 만 10년의 시간 정도를 쌓는 것에서 다 써버린 듯했고 뭐야 벌써 다 쓴 건가? 두리번거리며 손바닥을 털고 H건축 퇴사로 직진을 멈췄다.     


나란 놈을 고작 말 몇 개로 답할 수 있었다면... BTS, Persona    

그래서 건축을 기반 삼아 다른 것을 좀 해보기로 했다.

그래봤자 34살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에서 승진에 목을 멜 나이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둘째를 가져볼까 하는 나이 이기도 하겠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가는듯한 주기로 이직을 하는 사람이었고 남편과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상태이니 그냥 어디서 무엇이든 적응하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엇에 도전할까 하다가 10년 정도 해온 건축의 마지막 페이지를 건축사 시험으로 마무리 하자로 생각이 수렴되었다. 아니... 건축의 종지부를 건축사가 되는 것을 마무리하려고 하다니… 뭐야. 어차피 또 건축을 하겠다는 소리잖아. 너는 포기할 힘도 없냐, 그렇게 다른 삶을 살 콘텐츠나 다른 비법이 없냐 라는 자문자답이 이어졌다.

하지만 시시해할 스스로나 누군가에게 답하자면 한 분야의 커리어에서 다른 분야로 환승을 할 때는 내가 가진 전문성의 매듭을 잘 묶고, 그 매듭을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이 큰 무기가 된다. 는 확신이 있었다. 그 당시에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10년 가까이해 온 일이 천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과 계속 쉬지 않고 일은 하면서 사는데 일에 대한 나의 사고가 또렷해지지 않았는데 그냥 그만둔다면 경력 이렇게 말리는 건가...? 싶은 느낌으로 무언가를 마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종지부를 찍는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는 앞으로 더 길게 자라기 위한 마디가 될 수 있다고 내심 기대를 한 것도 감추지는 않겠다.


건축사 학원과 세 번의 시험

건축사 학원을 등록하면서 건축사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만났다.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의 목적은 대략 세종류다.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하기 위해서

-건축사 자격증을 기반으로 다른 기관이나 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 나처럼 건축에 종지부를 찍을 목적으로

나랑 비슷한 사람이 많아서 위로받았다. 합격률도 더럽게 낮은 이 힘든 시험을 준비하면서 부귀영화나 실무 업그레이드를 위한 사람이 없는 점에서는 씁쓸했다.

H건축을 그만두기 몇 달 전 건축사 학원을 등록했다.

건축사 학원은 대표적인 3개의 학원이 있다.

무슨 공부를 하며 선생 탓은 안 하는 편이기도 하고 각 학원별로 커리큘럼도 같고 합격수기도 비슷해서 2016년 1월부터 같은 본부 K팀장의 추천으로 D건축사 학원을 골랐다. 1년에 한 번 있는 가을시험을 준비하며 토요일 12시간 정도를 학원에서 보냈다. (2022년 현재는 건축사 시험이 1년에 2번 있다.)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 외에도 일주일에 3일 이상 퇴근 후 3시간 정도를 투자해야 완성할 수 있는 양의 과제가 주어졌다. 건축사 시험은 1과목에 3시간, 3개의 과목, 총 9시간을 손도면을 그려서 제출하는 시험이고 3과목을 3년 안에 합격해야 되는 시험이다.

5년제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3년 설계사무소에서 실무를 쌓아야 한다.

무슨 시험을 보는 거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시험에 대해 설명할 때 굉장히 3을 많이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차피 또 물어볼 것 같은 사람에게는 ‘내 머릿속의 지우개(영화)에서 정우성이 봤던 시험’이라고 설명하고는 했다.

2016년, h건축을 다니는 마지막 해에 첫 건축사 시험에서 1교시에 합격했다.

첫 시험에 1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 실전은 생각보다 너무 어렵구나... 자괴감에 빠졌다.

1교시 때 했던 실수를 떠올리느라 2, 3교시는 무슨 정신으로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 정작 1교시만 합격했는데 멘털관리가 아쉽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의 한 장면에서 ‘시험은 기세다’라는 최우식배우의 대사가 있다.

나는 얼마나 첫 시험에서 '기세'가 없었던가.

얼마나 그 시험을 장악하지 못했던가.

정작 제일 못 봤다고 생각한 1교시를 합격한 못난 첫 시험이었다.

2017년, h건축을 그만두고 양평에서 전원생활하면서 '기세'를 한껏 충전했다.

다른 학원의 인강(학원 탓 안 한다고 했지만 바꿈...)도 보고 개인적 시간이 많았다.

시험을 장악했다고 생각하고 기고만장한 자세로 시험을 봤음에도 남은 두 과목에 모조리 불합격.

'기세' 보다 '실력'이 필요했다.

세 번째 시험은

2018년에 B디자인에 다니면서 본시험이다. 시험 전날까지 업무로 인해 시험에 대해 만은 준비를 못하고 시험을 치렀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1교시 합격했던 것도 날아가는 줄 알았는데 유예기간이 2년 더 늘어나는 법이 생겨있었다. 공부도 얼마 못한 상태였기도 하고 내년에 제대로 보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도 적당히 바빴던 직장생활 덕인지 과몰입에 의한 게슈탈트 붕괴 현상 같은 것 없이 남은 2, 3교시에 합격하여 건축사가 되었다.

합격자 발표 후 상황은 특별하게 기억이 남는다. 발표날인 줄 모르고 청주에 출장 갔다가 남편이 전화로 알려줘서 합격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대한민국 건축 오늘부터 1일이닷! 같은 헛소리를 하며 한창 업되어 있었던 것, 합격 발표 이틀 뒤에 회사에서 해준 내 생일파티에서 덩실덩실 춤을(멈춰...!) 추었던 것이 기억난다.


나의 건축’, ‘건축을 한다’ 

그래서 그 건축사 자격으로 무엇을 할 수 있냐면,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할 수 있고 건축허가를 낼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나의 합격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건축사를 땄으니 언제 사무실을 오픈할 거냐고 물어봤다. 내가 건축사를 따자마자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내가 '나의 건축'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고,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는 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스스로를  표출하거나 창작의 욕구 같은 것이 있어 ‘보이는’ 것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된다. 실제로는 소위 말하는 '나의 건축'을 하기 위한 건축사가 아니라 건축설계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건축사를 따려고 했던 건데 말이다. 심지어 나에게는 '나의 건축'이라는 말 자체가 실무에서 오가는 말 중에 제일 공감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나의 집'도 아닌 '나의 건축'은 도대체 실체가 뭐냐 생각해 보면 소장님이 시키는 디자인이 아니라 내가 소장님이 되어 주도적으로 하는 디자인이 하고 싶다는 소리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선율을 만들고 글을 쓰는 사람은 글로 자신을 표현하고 이야기하겠지만 건축하는 사람은 건축하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혹시나 건축물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하는 건축가가 있다면 그걸 뒷받침해줘야 하는 공사 현장, 건축주의 예산, 함께 일하는 팀원 중 어디 하나는 곪아 터질 것이다.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소위 ‘나의 건축’은 건축행정부터, 건축주 커뮤니케이션, 시공 감리, 요즘은 투자와 수익까지 각종 것 들을 손수 하는 것이 자기 건축을 한다는 것이라고 추정해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이겨내며 건축주를 대변해 주면서 '나의 건축'을 한다는 건 적절하지 않다.

또 건축을 한다는 것은 뭘까. 설계사무소를 개소하고 건축설계를 하는 것 만이 건축을 한다라고 하는 것은 ‘책은 종이로 읽어야 한다’, ‘노래는 비틀스지’ 같은 일부 건축가의 선민사상 아닐까. 정작 이제 건축설계를 하지 않지만 건축물에 관심이 많고 타인이 만들어낸 공간을 찾아다니는 것에 피가 끓는 나, 설계사무소의 설계관리를 하고 있는 나는 이제 무엇일까. 설계사무소 대표인 건축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취미로 건축을 좋아하는 것부터 건축 관련된 일에서 무언가 잘 굴러가게 하는 일에서 효능감을 느끼는 일들까지 계속할 수 없을 것 같다.

매거진 B의 르라보 인터뷰에서 ‘꼭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농부가 될 필요는 없다.’라는 문장을 읽고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셰프가 돼서 좋은 식재료를 전달받아 이리저리 조합할 수도 있고 레스토랑의 지배인이 되어서 좋은 식재료를 찾아내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저 문장을 주제로 지금의 나는 건축설계의 물리적인 형태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만이 건축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가급적 건축을 한다.

그렇게 생각한 뒤로 나의 건축은 재화에 가까움 상품의 개념이 되어가고 있지만 일은 직장인으로서의 하루하루는 나아지고 있고 그런 과정들에 건축사 자격이 좋은 도구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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