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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Sep 15. 2021

셀프 경력단절

그리고 전원생활 ('월든' 병)

‘그냥’으로 시작하는 대답을 들으면 힘이 빠진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저렇게 간파하지 못하는 건가. 나랑 말하기 싫은 건가.

왜 ‘그냥’이라고만 말하는 거지?


너 왜 그곳으로 여행을 갔어?

너 왜 그 학과를 갔어?

이런 굵직한 질문에

- 그냥

거기서 뭐 했어?

-그냥 놀았어

그 영화 어땠어?

-그냥 액션이었어


이런 반응은 진짜 별로다.


'그냥'은 아무 생각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듯한 모습이 쿨 해 보인다는 생각일 수도 있고,

오래 말 섞는 것이 싫어서 일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그냥'이라고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한때 나도 ‘그냥’으로 대답하는 항목이 하나 있긴 있었다.

사람들에게 갑자기 양평으로 왜 이사 갔냐? 는 질문을 들었을 때다.


가급적 건축을 합니다. 시리즈를 기록하며

최근 이력서에 적었던 경력의 순서대로, 시간의 순서대로 복기 중에

셀프 경력단절 시기를 회상하다가

그 시절에 내가 ‘그냥’이라는 말을 참 자주 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그때 말했던  ‘그냥’을 잘 풀어 보려고 한다.




아를의 밀밭

남편과 결혼생활 중 은퇴하면 전원생활을 하자는 말을 자꾸 하다 보니 우리 인생의 결말은 ‘전원에서 농작물을 가꾸며 사는 것’으로 자동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H건축을 퇴사한 뒤로 소속감이 없어서 허전하기도 하면서 직장이 없는 자유로움을 무언가 타이틀화 하고 싶기도 했다.

적절하게도 나에겐 어린 시절에 고무신을 신었고 돼지 오줌보로 축구를 했고 동네에 갓쓴 어르신들을 흔치 않게 볼 수 있었다고 허세를 부리는 남편 아이템이 있었다.

마치 조금만 더 떠들게 놔두면 황소 타고 만주 벌판을 달렸다고 할 것 같은 태생적 시골출신 남편이 특히 전원생활을 원했다.


우리 둘은 어느 날 내가 펼쳐놓은 제도판을 대충 밀어놓은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야식에 맥주를 곁들이며 길고 긴 대화를 하다가 꼭 은퇴하고 전원생활을 할 필요가 있냐, 살고 싶은 일상을 뒤로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프리랜서나 집에서 하는 일을 찾아서 살아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속전속결, 서울 근교의 전원주택들을 구경 다니기로 했다.

지역별 부동산을 대충 인터넷으로 찾아서 예약을 하고 남양주, 마석, 퇴촌, 양평, 가평, 수동 등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살아볼 만한 전원주택을 찾아다녔다.

시골의 전원주택들은 인터넷에 나와있지 않은 매물이 많아 직접 발품을 팔아야만 했다.


건축설계를 하면서 보고 익힌 게 있어서인지 집장사들이 지어놓은 듯한 집들은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자연채광 자연환기의 기본적인 조건이 충족이 안되고, 층고 높은 거실을 만들어 놓고 상부로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는 구조라던가, 결로가 생겨 있는 창고, 집 크기 대비 주방의 서브 공간의 부족 등 기능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님아 제발 그 디자인 재능을 발휘하지 마오..’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조잡한 샹들리에라던지 꽃무늬 박힌 큐빅이 반짝이는 벽지들을 무수히 만났다.

지역별 부동산들의 특징을 모아 엑셀로 표를 만들 정도로 몇 달을 보러 다닌 것 같다.


가지고 있는 자산 대비 둘 다 눈만 높으니 나중에 땅을 사서 가성비 있고 마음에 드는 집을 직접 짓는 걸로 하고 당장은 서울에서 살아야겠다.라는 생각 반,

꽃무늬패턴에 의한 신경쇠약으로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을 정도면 된다.라는 체념 반으로

양평의 어느 집을 찾게 된다.

 

마치 고흐의 그림 중 아를의 밀밭 같은 노란 벼들이 해 질 녘의 빛을 받아 빛나는 장면이 내려다보이는 양평의 어느 2층 집이었다.


살짝 집을 알아보는 일에 지쳐있었던 때였다.

그저 순간적으로 고흐를, 아를의 밀밭을 떠올린 나 자신이 너무도 기특했다.

그냥 이 집에 살면서 여긴 아를의 밀밭이 보여라는 썰이나 풀어야겠다는 맥락으로 그 집은 우리의 마음에 들어왔다.

이런 장면을 보고 아를의 밀밭이라는 소리를 했지, 그때는 가을이었다.

집안 내부도 지나친 디자인 재능이 심하게 발휘되지 않아 딱 견딜 수 있는 정도의 데코레이션만 있었다.

집 근처에는 100년 정도 된 은행나무가 있는 초등학교가 있었고 그 학교를 중심으로 50여 가구가 모여있었고 상업시설이라고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슈퍼가 하나 있는 정도였다.  

마트가 있는 읍내는 차를 타고 10분 정도 가야 하는 위치였다.  


나는 살아본 적도 없는 시골에 대한 정겨움과 향수가 느껴지는 이 동네에 끌렸고 태생적 시골 사람인 남편도 좋아했다.

무엇보다 주변은 시골이지만 집 내부는 신축건물이고 평수가 전용면적으로 40평에 가까웠다.

이래저래 이사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그 당시 운전이 미숙했던 내가 차도 별로 없고 시골치고 넓은 도로를 통해 진입하는 주차장도 마음에 드는 요소로 더해져서 우리는 양평의 아를의 밀밭이 보이는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효리네 민박 아니라고요

결혼해서 처음으로 함께 살던 아차산의 집보다 거의 3배 가까이 커진 집에 이것저것 가구와 취미들을 채워나갔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 스펙과 연봉을 최대로 키우는 지점으로 삼는데 우리 부부는 양평의 전원생활에 취향저격을 당해서 이렇게 한가해도 되나 마치 은퇴 후 삶을 사채로 땡겨쓰는것인가 싶은 불안감이 불쑥불쑥 찾아올 때도 있었다.


그래도 급격한 일상의 변화를 기반으로 하루하루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어느 날은 집에 있다가 노트북 바탕화면이나 바꿔볼까 하며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가 은행잎이 가득 쌓인 장면을 만나기도 했고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를 만들기도 하는 가히 핀터레스트 적(핀터레스트에 올라올법한 인공적으로 완성된 이미지스러운)인 행동을 하기도 하였고

겨울철 실내 난방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면 핫초코를 들고 테라스에 있는 소파에 나와 앉아있었다.

(물론 5분 정도 사색 이후에는 바로 인스타 그램이나 휴대폰으로 뭔가를 했었지만)


그 당시 효리네 민박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지원이네 집 완전 이거 효리네 민박이잖아.라고 많이들 말해서

여러분 이곳은 민박이 아니라 가정집입니다.라고 정정을 몇 번 하기도 했다.(정작 시골에 있으면 시골을 배경으로 한 프로그램이 재미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주말엔 지인들이 고기와 술을 사들고 놀러 왔다.

매주말마다 가족이나 지인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예약을 해서

이번달은 다 찼습니다- 같은 멘트를 간간히 했었다.

펜션처럼 즐기고 난 뒤 사람들이 떠나고 난 뒤 펜션에 홀로 남겨진 느낌으로 마음 한구석이 서늘할 때도 있었지만

사진으로만 본다면

한때 행복의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는 듯한 해시태그 ‘#킨포크’적인 일상이었다.


그 당시 전원생활에 정서적이나 사상적으로 취해있어서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마치 나였나?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노동에 시달리는 인간은 매일매일 고결한 삶을 살 여유가 없으며 사람들과 진정으로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할 여력도 없다. 자신의 지식을 쉬지 않고 이용해야 하는 사람이 어찌 자기의 무지를 기억해 낼 겨를이 있겠으며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 월든 중

이런 문장들로 구성된 월든을 자주 읽고 인용하면서 말이다.


일을 하지 않고 전원생활을 즐기는 한가한 사람의 따꼼거리는 양심을

절대적으로 보호해 주는 완벽한 문장이지 않은가.

그 당시 나뭇가지를 주워다 만든 크리스마스 오너먼트 - 핀터레스트에서 다운로드한 거 아님



주요 일과

그 당시 전원생활 즐기기와 취미활동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개인적으로 의뢰받아 진행하는 설계 프로젝트가 몇 건 있었다.

학생이나 직장인으로 어딘가 소속되는 게 습관이라 그런지 시골에 뚝떨어져 있으니 세상에서 내가 흐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래서 쉬지 않고 이것저것을 하였다.

1년 정도 가죽공예에 몰입했다.

가죽공방은 어떻게 하다가 합정동에 있는 곳에 인연이 닿아 일주일에 한 번은 장거리 공방행을 했고, 한 1년 정도 집에서 가죽에 바느질을 거의 매일 했다.(전원생활에 바느질이라니)

디자인하고 제품을 만들어 sns에 이것저것 올리면서 판매를 하기도 했다.

그 당시 모르는 사람에게 주문을 받고 택배를 보내고 리뷰를 듣는 일, 손으로 하는 일에 푹 빠져있었다.(이때 개발한 제품을 현재 공장 생산해서 판매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컴퓨터를 켜고 블로그에 뭐라도 적었다.

sns의 여러 계정을 거느리는 공유 정신이 투철한 나에게 가장 편한 매체는 네이버 블로그였는데 핸드폰 사진이 어느 정도 쌓이면 그것을 업로드해서 정리하는 용도로 글을 써오다가 시골생활을 하는 동안은 거의 매일 아침마다 몇 줄이라도 블로그에 글을 쓰고 그날 할 일을 생각하는 루틴을 만들었다.


굳이 굳이 많이 했던 생각의 끝에는-

양평에 정착을 하니 지인들이나 부동산 아주머니나 가족들이

젊어서 그런지 아주 겁도 없이 시골생활을 하고 있군.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안 젊다고 생각했는데 젊다는 말을 자꾸 들어서이고,

어찌 보면 서울에 오가는 것이 조금 더 빡센 곳으로 이사를 한 것뿐인데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이 느껴져서 우쭐했다.


심심해서 만든 취미들에 몰두하다 보니 먹고사는 것에 관계없는 일을 아닌 다른 일을 하는 나를 만날 때 내가 인간임을 알게 되는 것일까 생각이 다다랐고

그러다가 먹고사는 일을 할 때는 잠깐 동안 인간 답지 않아도 될까에 대한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충분한 시간과 체력으로 맞은 아침을 맞은 후 이제 무엇을 해볼까 고르는 삶을 살 때만 인간다운 것일까에 대한 생각도 굳이 했다.


나는 양평에 있는 동안 별의별 생각을 많이 했고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생각을 많이 할 시간이 없는 사람과 대화의 충돌이 가끔 있었고 그때마다 혼자 긴 글을 썼다.

여유로운 은퇴 후 컨셉의 삶은 점점 나에게 조바심을 주었고 그냥 여유로운 일상의 루틴보다는 팀을 만들어서 건축설계 프로젝트가 하고 싶어졌다.

시간이 많다 보니 아이디어도 많아져서 혼자 건축공모전을 서너 개 참여했고 (그중의 하나는 입상도 해서 상금도 꽤 받았다.)


그러면서 내가 진정 무엇에 만족하는지 무엇이 나를 나아가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도 자꾸 깨달아지는 것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퇴사 후 생활이 1년 반이 넘어가면서 나는 건축설계를 하는 직장인의 삶을 동경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피곤한 얼굴로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나만의 밭을 가꾸는 것이 내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혼자 많은 시간 동안 내 밭을 가꾸는 일에 지속적인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나 자신을 온종일 마주하게 되면서 ‘종일 마주하기에는 벅찬 남’이 존재하듯 '종일 인식하면 피곤한 자신'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다 쓰고 난다음 자투리로 주어진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 투하하는 것 정도가 만족스럽고

오로지 나만 볼 수 있는 나의 정원보다는

정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두리번거리는 것이 나에게 적정한 조치라는 것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 셈이 되었다.

 

'일하지 않는 나 자신을 알아보러 떠난 여행'에서

'일하지 않는 나에게는 사실 별게 없구나'라는 기념품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온 꼴이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없는 삶,

눈떠서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고 지칠 때까지 하다 잠드는 일상은 공허했고

2년도 채 되지 않아 수많은 한계에 부딪히고 상처받고 헤매던 시간들이 그리워졌다.

젠장!

이것은 그 아를의 밀밭에 들어가서 쥐불놀이를 하고 있는 저의 모습입니다.


후회… 하니?

그 시간들을 몇 번 후회했다.

지금도 간간히 후회한다.

'2년 동안 다른 커리어를 준비했으면...'

'영끌을 해서 서울에 집을 살 시기였는데...?'

같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때 내가 심취해 있던

"농부가 집을 장만하면 부유해지기는 커녕 더 빈곤해진다. 그가 집주인이 되는 게 아니라 집이 그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 문장을 인용하며 청약통장도 해지했었는데 하하하…


'만약 나에게 그때 그 시간이 없었다면...' 생각을 해본다.

나는 아마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의 나를 너무도 궁금해할 것이고,

있지도 않은 나의 자유롭고 풍부한 발견되지 않은 자아를 흠모하며

무언가 중요한 것을 집에 두고 회사에 온 사람처럼 공허해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모습을 확실히 안다.

일하지 않는 나는 일하는 나를 갈망한다는 것을

그리고 어디에 도착해 있는 나보다 어딘가를 향하는 중인 나를 갈망한다.

많은 사람은 과정을 불안해 하지만 나는 과정이 아닐 때를 못 견디는 것 같다.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이 아닐 때의 나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확실히 대면한 뒤에 바로 다시 일을 하기로 했다.



가급적, 아무튼, 모쪼록, 그냥… 건축 직장인

건축가, 건축사, 건축업자. 건축설계사무소 직원… 적당한 단어가 없다.

'건축가'는 너무 폼을 잡는 거 같고,

'건축사'는 너무 자격증 이름,

잠정적으로 '건축 직장인'으로 하자.


흐려지지 않게 농도 진한 사람이 되는 것.  

하루하루 효용 감을 느끼려면 내가 할 줄 아는 건축에 관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강렬했다.

그래서 가급적 건축에 가까운 일을 하자를 주제로 구직을 시작하였다.

아무쪼록 나는 건축가… 이니까.  

내가 뭘 잘했더라?

나는 주로 무엇에 칭찬을 받았었지...?

나는 디자인을 잘한다고 늘 생각했는데 (개중에 괜찮은 것도 있었겠지만) 전반적으로 디자인에는 소질이 없었다.(이 결론을 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도 결론이 난 게 어디냐.

죽을 때까지. 이상하다.. 왜 이렇게 자꾸 내 디자인은 까이지...? 이러다 죽을 수도 있지 않았나…


아무튼 내가 잘하는 일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거나 얽혀있고 복잡한 것을 정리하는 종류의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해결하는데서 효능감도 있었다.


그 당시에 생각하던 이런저런 것들을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자기소개서에 담아 인력시장으로 다시 나왔다.


나는 자신 다움으로 강해져 있었고 시골사람으로도 강해져 있었다.

나방 한 마리에 질겁하던 나는 지네와 뱀을 겪고 나서 바퀴벌레로는 공기놀이도 할 수 있을 용기가 생겼다. (허세가 심했다. 사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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