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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Oct 24. 2021

40살

겨우 이직

내일모레 40인데 뭐 이래?

S, E, H건축 그리고 B 디자인까지 이로서 나는 4번의 건축사무소 퇴사를 하게 된다.

앞선 세 개의 회사는 직장생활을 통한 자아실현을 하려다 안 돼서 퇴사를 하였다면 마지막 회사는 그럭저럭 자아실현은 되었는데 회사 자체의 문제가 있어 퇴사를 하게 된 경우였다.

각각의 사연은 앞선 시리즈에서 실컷 이야기했으니 이제 가장 최근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 다니는 회사로 이직하기 전까지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나는 퇴사를 하고 -  심신의 재부팅을 위해 어디론가 떠나고 - 충전된 자신을 확인하고 다시 방전을 하기 위한 취직으로 연결되는 패턴이었다.

이번에도 패턴대로 라면 여행을 하며 일상과의 단절을 겪고 ‘잠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버릴 테얏!’ 청춘 에세이 모드를 장착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의 퇴사는 달랐다.

이제야 좀 건축을 알겠구나 싶고 ‘가급적 건축’을 주제로 일도 할만하고 업계에서도 나 좀 인정받는 건가 하는 와중에 기반이 흔들리는 일이 생겨버린 셈이었다.

앞으로 이 자리에서 승승장구하겠구먼! 싶어 끼고 앉아 있었던 위치는 그만두고 보니 형체도 없었던 것 같다. 아주 그냥 얻어걸렸던 것이었나 보다?

후… 내일모레 40인데 뭐 이래? (담배 있냐)

수틀리고 기분 나쁠 때 별 고민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도 안정될 수 있는 삶은 도대체 언제 오는 것일까.(이런 생각을 39살에도 한단다. 애두라?) 이런 생각을 한 1분 정도 했고,

이번엔 쉬거나 떠나고 싶은 생각으로 퇴사한 것이 아닌 만큼 더 많은 고민과 준비가 필요했다.

이제까지 살아온 나를 증명하며 앞으로 살아갈 나를 위해 투지를 불태울 생각에 조바심을 기본으로 장착돼 있었다.

여행을 가고 일상과의 단절을 해봤자 결국 일상으로 돌아와서 회복을 위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 자명한 현실, 이걸 자주 경험해 버린 어른 인지라.




통계상의 '쉬었음'과 '실업자'

사람과 함께 있으면 힘이 나는 성격이었는데 점점 사람 만나는 게 꺼려지더라.

엔트제이(ENTJ-*MBTI유형 중 외향적이고 강한 리더십 성향을 보이는 유형) 사람인데 한동안 일기 쓰면서 자기 연민에 찌든 글을 쓰며 하루를 곱씹고 그랬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면 명함 달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명함 없는 삶…이었고, 예전에 건축 뭐 했었고 뭐 할 거고 이런 자기소개 귀찮아졌다.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실업자입니다.라고 답하는 일이 몇 번 있었다.

개인작업이 몇 개 있어서 프리랜서라고 대충 말할 수 도 있지만 나의 특징 중 하나는 프리 한 형식으로는 돈이 안 벌린다는 것. 프리랜서라는 말은 나에게는 너무 거품이었다.

 

내가 실업자라고 소개를 하니까 '네가 무슨 실업자야?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면 어디 가서 실업자라는 말하지 마' 라며 부연설명 달린 맨스플레인을 한 번들 었고 정말 그러한가? 싶어 ‘실업자’의 의미를 찾아봤다.


대한민국 통계청에서는 만 15세 이상 인구를 노동 가능 인구로 보고 노동 가능 인구를 크게 ‘경제활동인구’와 ‘비경제활동인구’로 나누고

‘실업자’는 일을 하려고 면접도 보고 이력서도 쓰고 하는 ‘경제활동인구’로 포함시켜 놓았다는 사실을 몇 번의 검색만으로 알게 되었다.

‘비경제활동인구’는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을 하지 않거나 일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구성되고 그중에서도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일을 할 의지가 없는 사람을 ‘쉬었음 인구’라고 한다고 하다는 또 다른 개념까지 덩달아 알게 되었다.


나 실업자 맞네.

나 완전 직장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고 경제활동 시급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나는 생산활동에 참여할 의지가 있는 경제활동인구 통계 중 ‘실업자’ 카테고리에 속한다고 한동안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굳이)

한동안 그렇게 ‘실업자’로 지냅니다...

(후... 생각해 보니 ‘저는 실업자입니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 뭐 대수라고… 폭풍 검색을 했네… 아니야… 맨스플레인은 못 참지. 또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니까. 흠흠)


출처 : 경제활동인구 상태별 분류 - 통계청 자료를 참고한 네이버 백과사전


백수

'백수는 강인한 정신의 영웅적 표현이다. 아돌프 로스'

출처 <아돌프로스 - 잘 입어야 하는 이유> 중

통계청기준상의 ‘실업자’나 ‘쉬었음 인구’나 싸잡아 보면 다 그냥 ‘백수’로 치부된다. (뭐 별수 있겠나)

그러던 중 우연히 ‘장식은 죄악이다.’라는 다소 과격한 말을 한 아돌프로스(건축가)의 글을 읽었다.

아르누보에서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시절에 시대의 풍광을 바꾸려면 저 정도 아가리파이터는 있어야 했나 보다 싶었던 그 박력 넘치는 아돌프로스 가 이런 말도 했었더라고


"백수는 강인한 정신의 영웅적 표현이다" 

(원문이 상당히 궁금하긴 하다)


아 진짜…? 백수생활이 이렇게까지 칭찬받을 일인지 몰랐다니까.


아돌프로스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부유한 인물이 일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삶을 영웅적이라 칭할 수는 없지만, 한 푼도 없으면서 돈벌이가 되는 직업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영웅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골에 짱 박혀 살기 좋은 명분을 주는 문장들 이후에 또 이 문장에 감명받아

나도 ‘한번 사는 인생 영웅로 살아볼까?’ 흔들렸다.


그러나 생각보다 퇴직금은 빨리 떨어지고 조바심은 더해지더라?

영웅이 되어 보겠다는 설렘과 달리 나의 하루하루는 실업자라 쓰고 조바심이라 읽는 그 자체였다.

그 와중에 15세 이상 노동 가능 인구 분류에 속하지 않는 우리 집 세탁기와 건조기도 주말과 평일 구분도 없이 일하고 있었다.

다 같이 일하느라 활기찬 집안에서 나만 홀로 현학적인 체하면서 글을 읽고 앉아 있는 것도 미안하더라.

역시 영웅은 안 되겠어...

나는 세탁기와 건조기에게 미안하고 돈벌이 없음을 버티지 못해 나만 보는 일기마저 잘 써지지 않아 경제활동인구로서 자아를 또 한 번 강하게 느꼈다.




지속 가능하게 건축을 하는 방법

스스로의 능력치가 객관적으로 파악되면 마음이 쓸쓸해질 때가 있는데 대놓고 인정하고 말하고 다니면 약간은 위로가 된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이를 먹다 보니 디자인 툴을 다루는 것도 새로운 비주얼이나 컨셉을 생각해 내는 것도 재능과 순발력이 드릉드릉 표출되고 있는 주니어들 앞에서

나 약간 무디잖아...?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이런 생각들과 여러 상황을 종합하여

건축설계라는 절대 기술을 기반으로 경험과 연륜을 활용할 수 있는 관리자로서의 일을 찾기로 하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문장으로 써놓으니 간단해져 버리는 것이 좀 서운하다.

실제로는 ‘관리자’라는 말을 인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해… 는… 데…)


건축을 시작할 때의 나를 생각하면 내가 잡은 커리어 경로가 이거 뭔가 계획에서 크게 벗어났는데? 싶은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나는 오래 공간을 만드는 일에 관여하며 효용감을 느끼고 건강하게 내 일상도 살아가기 위한 직업이 절실했다.


건축 관련 직종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조언도 듣고 직업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때 했던 인터뷰들로 인터뷰집을 만들려다 지금 정리가 안 돼서 손을 놓은 상태)

내가 바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면서도 확장과 피보팅이 되는 분야는 부동산 개발사업에서 설계와 공사 등을 관리하는 직무, 디벨로퍼의 한 영역인데 건축 전문성을 기반으로 토지를 구매해서 건물을 짓고 분양 또는 임대하는 전 과정 중 물리적인 부분을 다루는 일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이직을 시작했다.


여러 사람의 조언이 있었지만 나의 이전 시리즈에서도 등장한 커리어 메이트 백 씨가 어느새 시행사에 먼저 다니면서 건축을 기반으로 부동산 개발에서 기량을 펼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또 뭐 별 수가 있겠냐. 나도 한번 해보자 라며 따라간 것이 사실 나의 이직의 실체일 수도. (이 정도면 백 씨가 인생 조정자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배움에는 나이가 있다.

나이별 배움은 다 다르다.

10대에 하는 공부는 진학을 위해서

20대에 하는 공부는 취업을 위해서

30대에 하는 공부는 실용성을 위해서

40대에 하는 공부는 20대에 했던 공부를 써먹기엔 세상이 변했고, 기반이 흔들림을 경험했고, 그러면서 다시 한번 출세의 꿈을 위해(?)...  하는 차이가 있기에 배움 자체에는 나이가 없으나, 배움의 항목에는 나이가 있다.


배움을 좋아하나 그다지 지식이 많지 않은 편인 의문투성이의 나는 40대를 준비하는 여러 실용적인 공부를 했다. 실용보다는 무용한 공부와 독서를 하는 것이 로망인 사람인데 그런 시절이 또 오겠지- 미래의 나에게 일단 미뤄두었다.

주로 T자형 인재가 되기 위해 가로축에 해당하는 지식을 쌓기 위한 공부였다.


세로축의 전문성을 깊이 살리고 가로축을 확장하는 인재유형 (이것도 B디자인 B대표가 늘 하던 소린데 이걸 여기에 적고 있네) - 그림출처 victor님의 네이버블로그


실제로 내가 자기소개서에 넣었던 다이어그램, 저 화살표의 박력을 보시라.

위의 다이어그램처럼 내가 목표한 직업은 건축설계의 전문성으로 개발사업을 두루 관리하는 직무다.

적성과 효능감 외에도

주니어 디자이너 들과 오래된 경영진들만 남는 뼈다귀 구조의 산업보다 나에게 앞으로 직장인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을 더 늘려줄 것이라 생각한다.

직장생활 수명을 보았을 때 가로축의 공부가 지금 이 시기 이 상태의 나에게 적절한 조치다.


시행사(부동산 개발업을 하는 회사)를 가기 위한 최소 자격을 갖추려고 부동산 개발 전문인력이라는 자격을 수료하고 그간의 기술인 등급들을 정리하기 위해 밀려둔 승급교육 등을 듣고, 서류상의 경력을 준비하고 관련 도서들을 섭렵하며 준비했다.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성취감 때문에 약해지고 우울감에 빠지려 하는 나에게 강하게 저항하며 단순한 운동, 단순한 여행들을 꾸준히 했다.




들숨에 사람인, 날숨에 잡코리아

이력서 내기가 무섭게 취업이 되던 그 전의 많은 도전과 달리 피봇팅을 위한 구직활동에서는 처음으로 고용불안을 느꼈다.

유명하지만 그냥 들어갈 수 있다고 쉽게 생각했던 시행사나 자산운용사 몇 군데에 박력 있게 이력서를 넣었는데 무소식이었고 속담과 달리 무소식은 희소식이 아니었다.


간혹 성사된 몇 개의 면접은 다양했는데 그동안의 나의 장점이 앞으로 일할 곳에서는 단점이 되는 경험을 했다.

인간도 아닌 AI면접 따위의 면접 결과에서 창의적 욕구가 매우 높아 관리직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디자인을 하려는 욕구가 많아 보이는 것이 부담스러운 문제로 여겨지기도 했다.

 

영화 베테랑 -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고 했어요.’ 조태호.


문항당 800자 이상씩 쓰게 하고 AI면접 인간 면접 다 보면서 몇 주에 걸쳐서 보는 대기업의 면접, 그리고 한참 뒤의 불합격 이메일은 진짜 최악이었다고 생각한다.

몇 군데의 기업 면접을 진심으로 보느라고 한 두 달은 간간히 등산 외에는 진짜 아무것도 못한 듯하다. 이런 거였구나 취준생의 설움. 흙.


3-4개의 면접 실패 후 그 이후로 이어지는 면접들을 합격을 하고 고를 수 있는 위치가 되기까지 (면접 보면서 성장하는 케이스…) 음.. 한 30군데는 지원을 한 것 같다.

서로 빗나가는 이야기를 하는 듯 하나 합격이라는 결과로는 맞아 들어가는 아리송한 면접도 있었지만  

면접들의 내용을 복기해 보았을 때(너무 많이 봐서) 그동안 쌓아온 경력이 다행히도 중구난방은 아니었나 봐… 하며 안도했다.

그리고 다양하고 확장된 회사일수록 한 분야의 경력을 오래 쌓아온 사람을 찾는 일에서 나의 경력이 두각을 나타낼 때도 있었다.


면접 유랑 중 직무와 연봉등의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하면서 실질적인 조건들이 끌리는 곳을 찾게 된다.

복장이 자유롭고(정장 스타일의 옷이 없다.), 나보다 연령 높은 여직원들이 있고(나도 귀여움 받고 싶다.), 교육에 대해 관대하고, 10년 이상된 회사(단타 치고 소멸되는 회사들이 간혹 있어서).

약간 연봉을 더 받는다고 계속 어울리지 않는 구두를 사신 어야 되고, 남자 어른들에게 계속 맞춰줘야 하는 분위기는 못 견디지.

그래서 이후의 남은 면접도 다 접고 출근일을 정했다.





그렇게 발주처가 된다.

내가 이직하여 현재 다니고 있는 시행사는 내가 건축을 할 때 간혹 함께 프로젝을 진행하던 발주처의 형태중 하나의 회사다.

요새의 괜찮고 알맞은 아이디어를 잘 수용해서 만든 공간은 디자이너보다 가끔은 행위의 주체(발주처와 건축주)의 의지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건축주가 돼버린 셈이다.


요즘의 나의 일상을 채우는 감정은 직접 설계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너무 잘 알아서 너무 이해가 안 갈 때가 종종 생기기도 하고

혼자 작업하는 시간보다는 거의 하루 종일 말을 하며 보내기 때문에 했던 말과 들었던 말이 너무 많아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지하철에서는 이제까지 공부하고 일해온 것으로 먹고사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마치 추수하는 시기 같은.


5시에 퇴근하고도 아직은 일처리에 여유가 있고

자문을 하고 결정을 하며 일이 돌아가도록 하는 일이라 때로는 건조하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할 수 있는 방법은 건조하고 무심한 표정으로 일을 잘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의 표정은 어떠한가 모르겠네.


한편으로는 연말도 오고 날도 추워질 텐데 직장이 주어진 것이 안심이 되어 또 다른 도전을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게 생각하지 뭐.

일하지 않을 때 힘들었었잖아?


그동안 이직을 많이 했으니 이제 좀 정착하겠지-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어서 피식 웃을 때도 있다.

이직은 하면 할수록 자신감이 붙고 4개의 건축사 사무소를 포함 크고 작은 6개의 회사를 다녀본 나로서는 또 다른 회사가 궁금해지는 걸. (너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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