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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여자#21] 생각만 해도 슬픈 음식

센비키야의 멜론

by 꼰대 언니 Mar 27. 2025

기차와 배를 갈아타고, 꼬박 이틀 걸려 도꾜대학 병원 입원실에 도착한 변동림(a.k.a. 김향안)은, 다다미에 누워 있는 이상을 보자마자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알았다. 무엇이 먹고 싶어? 스물여덟의 김해경 (a.k.a. 이상)은 세상 무거운 눈꺼풀을 움직이지 못한 채 겨우 내뱉는다. “센비키야의 멜론”. 병원 근처 과일 가게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멜론을 결국 한 조각 넘기지 못한 그였지만, 향취가 좋은 지 감은 눈 밑 입술엔 짧은 순간 미소가 엷게 번졌다. 센비키야의 멜론은 그렇게 요절한 시인이자 소설가, 구한말 모던보이의 유언이 되어버렸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내게도 죽음이 코앞에 오면, 무엇인가 생명의 날 것 그대로의 음식을 떠올릴 듯하다. 새콤함에 눈썹 찌푸리지만 이내 입안을 적시는 살구, 갓 잡아 올린 광어의 탱탱한 살점, 알싸한 고추냉이가 올라앉은 참기름 바른 육회 한 조각 따위.


새벽 요양 병원에서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어머니의 다리에는 꽃무늬 몸뻬 마냥 보라색 꽃무늬가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허겁지겁 옮긴 세브란스 응급실, 그 무늬를 본 의사의 미간이 말해주고 있었다. 곧 돌아가실 환자를 받을 침상은 없다는 것을. 서울 반대편의 낡은 병원으로 앰뷸런스는 다시 내달렸다.


낯선 대방동, 초라한 외관의 병원 구관 2층 중환자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한 어머니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키위와 바나나를 갈아 보온병에 차갑게 가져간 주스가 그녀의 마지막 메뉴였다. 음식 반입이 안되는지라, 짧은 면회시간 간호사의 시선이 자리를 비운 사이, 허겁지겁 그녀는 생명의 신맛을 처음 맛보기라도 하듯 들이켰다. 그 주스마저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그녀의 마지막을 추억할 염치조차 없을 터다.


꿈에서 나는 반복한다. 마지막 일주일이 다시 내게 주어진다면, 병원이라는 허울 좋은 감옥이 아니라, 집으로 모셔야지. 진통제나 놔줄 의사나 간호사는 부르면 되고. 모든 가족이 그녀의 침대를 둘러싸고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게 해야지. 그동안 나는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을 모아, 날마다 다르게 그녀의 밥상을 채우겠다. 

수많은 날, 아침잠이 많은 나를 깨우기 위해, 눈감은 나의 입에 넣어 주었던 사과 조각처럼, 과즙이 넘치는 열매로 그녀를 깨우고, 깊은 육수로 헛헛한 속을 달래고, 온갖 좋은 살점으로 배를 채우리라. 


어머니의 못 들은 유언은 센비키야의 멜론이 아니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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