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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 Feb 19. 2018

그게 싫으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

결혼의 좋은 점만 누리면 왜 안 되나요?

시어머니는 집안의 제사와 명절마다 꼼꼼히 음식을 마련한다. 남자들이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낸 후에는 여러 식구들이 먹을 식사 준비도 해야 한다. 가장 마지막에서야 상 앞에 앉는데, 그것도 가장 부엌과 가까운 자리다. 명절에는 여태 한 번도 친정에 간 적이 없었다고 하셨다. 매년 몇 번이나 반복하는 집안 행사가 왜 힘들지 않았겠는가, 아마 그래야 하는 줄로 알고 살아오셨을 것이다. 자식을 뒷바라지하고 집한 행사가 있으면 묵묵히 부엌일을 해내는 것이 집안의 여자로 살아가는 법이었을 것이다. 


다만 다음 세대에게 물러줄 만한 유산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모두들 알고 있다. 올해 설에도 어머님은 일찍 오면 음식 준비를 해야 하니 ‘밤 9시 넘어서 와라’ 하고 문자를 보내셨다. 어머님이 고생하신다는 것은 알지만, 그 짐을 내가 기존의 방식대로 물려받거나 나누어지겠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내가 우리 집도 아닌 남편 집안의 제사를 위해 뭔가를 한다면 적어도 기존의 전통에 동의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여야 했다. 하지만 음식 사서 간단하게 지내자고, 온 가족이 그냥 외식이나 하자고 말해도, 시어머니도 친정 엄마도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 그 가운데 남자들은 논의에서 아예 빠져 있다. 어머니들은 앞으로 또 몇 번의 명절을 이렇게 묵묵히 견뎌내야 할까. 


결혼 후 밀려드는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의무에 몸을 움츠리고 벽을 세우는 내게 시어머니가 한 번은 한숨처럼 말씀하신 적이 있다. “결혼했으면 이제 너희 마음대로 살 수는 없는 거야.” 그건 가르침보다는 오히려 체념에 가까웠다. 당신의 삶에 대한 회한처럼 들리기도 했다. 할 말을 좀처럼 참지 못하는 나지만, 그때만큼은 “저는 그래도 마음대로 살 거예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참고 견뎌온 어머니의 삶을 무색하게 만들 수 없어서였다. 


결혼했으니 불평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 폭력적 발상 


결혼하고 나서 며느리의 의무 같은 건 짊어지지 않고, 결혼 전과 마찬가지로 한 명의 성인으로서 내 결정과 판단에 따라 살아가겠다고 결정했다. 그런 맥락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아마 이랬던 것 같다. 


그럴 거면 혼자 살지, 결혼은 왜 했어? 


그럴 거면 왜 결혼했느냐는 말은 정말이지 막막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결혼 제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그럴 거면 왜 결혼했느냐’는 말은 결혼 제도를 바꿔나갈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결혼을 했으면 날아다니던 발목에 족쇄를 묶고 집안의 조신한 며느리가 되는 게 당연하다는 발상이 일종의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사회의 잔재로 남아 있는 특정 ‘지위’의 여성으로서 살기 위해 결혼한 것이 아니다. 결혼이라는 행위를 통해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전통에 묵묵히 동의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며느리로 일하는 명절을 보내는 게 싫으면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한다. 며느리로서 시부모님을 섬기고 남편에게 내조하고 싫은 전통이라도 기꺼이 따르며 살 게 아니라면, 여성으로서 집안의 불합리한 제도의 부속품으로 살아가지 않을 거라면- 도대체 결혼을 왜 했느냐고 묻는 사회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해야 할까. 


애초에 답답한 기존의 결혼 관념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결혼을 결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혼은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결혼으로 인한 불합리한 의무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살 자격이 없다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사회는 여성에게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권장한단 말인가?


‘남들도 다 하는데 뭐가 힘드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심지어 ‘정작 주부들은 별 생각 없이 명절 증후군이라 할 것도 없이 명절을 보내고 있는데 언론 등에서 마치 명절에 여자가 힘들어야만 한다는 듯이 주지시킨다. 그럴 거면 미풍양속도 다 없애라는 것이냐’는 댓글을 보기도 했다. 실은 우리 엄마도 나처럼 꼬박꼬박 따지는 며느리가 들어올까 무섭다고 말한다. 


사회 초년생들이 열정 페이를 받으며 젊음을 다 바쳐 일하는 것을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합리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사회 초년생이 노력에 비해 적은 급여를 받는 것과 여자들이 명절에 일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본인이 괴로움을 토로하지 않는다고 해서 명절을 유지하기 위한 엄마들의 희생이 당연한 일이 되는 건 아니다. 미풍양속?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전통이 어떻게 미풍양속인가.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세뇌를 시켜 놓고선 ‘어차피 본인들이 괜찮다는데’라고 말하는 건 너무 뻔뻔한 게 아닌가.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탓하는 사회에서 결혼 제도의 문제를 깨닫자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일까. 남성이 성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하니까, 그래서 여자가 불평하는 대신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세상이 안 바뀐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결혼을 할 것인가 


시간을 돌리면 다시 결혼할 것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 같은 며느리는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 그래, 나도 시간을 되돌린다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며느리 도리와 불평등한 결혼 제도에 대한 이 지겨운 논쟁이 언젠가 잦아들고, 내가 투쟁해서 나의 권리를 찾지 않아도 그저 남편과의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결혼생활이 가능해졌을 때 다시 결혼을 꿈꿔보겠다. 결혼 이후 피치 못하게 발을 들이게 되는 이 지긋지긋한 전쟁터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른 누군가가 열심히 싸워 전쟁이 끝났을 때쯤 얌체처럼 바뀐 세상의 혜택을 누려볼까 싶다. 


시댁에서 제사도 안 지내고 마음대로 여행도 다니고 싶으면 왜 결혼했냐는 질문이 도리어 우스워지는 세상, 그저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게 그리 황당한 일일까? 어떻게 결혼했는데 좋은 것만, 신랑이랑 알콩달콩 사는 것만 하고 싶어 하느냐는 질문에는 도리어 묻고 싶다. 왜 결혼하면 싫은 것까지 해야 하는 게 당연할까? 싫어하는 걸 잔뜩 짊어져야 한다면, 그럴 거면 도대체 왜 결혼을 하죠? 


어차피 결혼 후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무리한 역할은 언젠가 사라지고 바뀌어야 한다. 결혼은 오로지 두 사람의 관계에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집중할 수 있는 제도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결혼 후 은밀히 전승되던 여자의 무거운 짐이 점점 세상 밖으로 드러나고 있는 지금, 결혼은 더 이상 매력적인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현실을 깨닫는 속도를 사회 변화와 제도가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뭣 모르고 결혼한 세대가 아니고서야, 이제는 ‘비혼이 답’을 외칠 수밖에. 


결혼이 더 이상 낡고 버거운 관습이 되지 않으려면 지난한 갈등을 털어내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는 이미 결혼을 했고, 투쟁하지 않으면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여성으로서 살아야 하는 세상에 발을 디뎠다. 그러니까, 난 투사가 되고 싶은 건 결코 아니지만, 내 삶을 위해서일 뿐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조금이라도 불편하다고 말하는 소극적인 투쟁이나마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결혼은 두 사람의 독립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부모님 세대로부터 가치관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두 사람의 판단이 아닌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을 따른다면 결과적으로 결혼생활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갈등은 피곤하지만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다. 결혼 제도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거라면 왜 결혼했냐고? 그 질문, 너무 어리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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