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히 설명 안 되는 불편함에 대하여
나를 고양이 집사라고 소개할 때 나는 도덕적이고 안전한 테두리 안에 있었다. 고양이를 키우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내가 고양이 집사라는 사실이 세상에 해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내가 고양이를 키운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 수식어를 거리낌 없이 책임질 수 있었다. 나는 고양이를 평생, 내가 할 수 있는 한 고양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환경 내에서 키울 각오와 의지가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글 쓰는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해 본 적은 없었다.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를 떠나서, 페미니스트라는 수식어는 어쩐지 나를 위축시키는 데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자신을 지칭한 이후 내게 쏟아지는 시선이나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페미니즘처럼 거창해 보이는 일종의 이론이 아니라 사소한 나의 일상과 사랑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결혼한 그는 나에게 자주 ‘그게 뭐가 어때서?’라고 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왜 몰라?’라고 분노에 차 반문했다. 여자 친구들끼리는 ‘왜, 그거 있잖아’ 하면 다들 깊게 공감하는 문장이나 상황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남편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편은 남편대로 내가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왜 싸우게 되는지 몰랐다. 우리가 각자 살아온 세계가 얼마나 달랐으며, 그 다른 세계가 만났을 때 얼마나 서로를 상처 입힐 수 있는지를.
너 페미니스트야?
대놓고 질문을 받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와 갈등할 때마다 그가 나를 얼마나 예민하게, 생소하게, 그리고 다소는 염려하며 바라보고 있는지를. 나는 의견 충돌이 있을 때 대개 그래왔던 것처럼 그냥 입을 다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와 다른 의견으로부터 나 자신을 단단하게 보호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라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불편함과 부당함을, 때로는 위험 요소를 이야기하면 세상은 도리어 나를 억압하고 공격하려 할 때가 있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내 편이라 여긴 배우자가 나의 어려움을 ‘별 것도 아닌’ 일로 여길 때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 남편은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국 남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계와 나의 세계가 겹쳐지는 것이 가끔은 나를 아프게 찌르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묵묵히 입을 다물면 그는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안고 혼자 곪아갈 것이 뻔했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때때로 그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를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종종 한국 사회의 여성 대표와 남성 대표라도 된 것처럼 부딪쳤다. 하지만 그때 일어난 균열로 인해 우리는 견고했던 상대방의 세계를 조금씩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세상을 바꾸거나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평범하고 소중한 일상을 위해서였다. 지금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든, 나는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는 결국 우리가 서로의 자유와 행복을 침해하지 않고 건강하게 어우러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프롤로그 中)
저의 책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이 출간에 앞서 텀블벅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
사회 분위기상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는 것은 마치 갈등을 유발하고 성별을 나누어 다투려는 일 같지만, 사실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는 평범하고 안전한 일상을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왠지 답답했던 일들, 남자친구와 언쟁하다가 찜찜함을 남기고 체념했던 일들에 대해서 '너 페미니스트야?'라는 화살에 대한 두려움을 지우고 담담하게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혹 관심 있으신 분들은 텀블벅 밀어주기로 리워드와 함께 만나보실 수 있어요 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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