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태건 Dec 25. 2023

비등(沸騰)하는 인물, 비등(飛騰)하는 이야기

-손보미 「폭우」를 바탕으로

 제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름과 다르다. 이름은 논리 안팎을 드나들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또는 무엇을) 무어라 부를 때, 거기에 모종의 타당성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제목은 임의가 아니라 논리를 따른다. 무엇의 제목을 말하는 경우라면 우리는 응당 어떠한 논리를 기대하게 된다. 문학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소설의 제목이라면 그것은 이야기를 아우르거나 관통할 수 있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처럼 말이다. 저 유명한 「멕베스」나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작품들은 아예 그 이야기의 주인을 제목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이 가능하다. 만약 텍스트의 값어치를 비교할 수 있는 천칭이 있다면, 그것의 한쪽에 제목을 그리고 다른 쪽에 소설의 본문을 매달았을 때, 저울은 수평을 이루리라는 것. 다시 말해 소설은 소설가의 상상과 창작으로 이루어진, 그것의 제목에 대한 긴 뜻풀이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폭우」의 경우 앞의 가정은 언뜻 위태롭다. 소설을 이루는 두 구심점(어쩌면 셋) 중 하나인 눈먼 남편과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a)는 폭우 속 국도에 정차한 부부에 대한 이야기(b)와 달리 ‘폭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물론 a는 b가 숨기고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b에 종속되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a와 b의 서사적 ‘가치’는 대등하다”[1]는 신형철 평론가의 문장을 경유할 때, 우리는 a와 b 모두 ‘폭우’라는 단어가 환기하는 감각에 포섭되리라고 믿게 된다. 그러므로 본고의 생명력은 다음의 문장에서 출발한다. “「폭우」의 제목은 왜 ‘폭우’가 되어야만 했을까?” 아울러 이 의문은 손보미가 꽤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그리고 「폭우」가 그 뛰어난 결과물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성립되었음을 밝히고, 그것의 적절한 답변을 찾아보고자 한다. 


소설의 정취: 김화영의 시선


손보미의 「폭우」는 그 매혹이 어디에서 오는지 끝내 의문이 풀리지 않는 기이한 작품이다. (중략)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소리, 천중번개 소리, 비냄새. 외국어 번역문체를 연상시키는 서술, 고의적으로 의미와 표현 사이의 틈을 벌려놓는 작가 특유의 언어는 자동차의 와이퍼처럼 거울 위에 쏟아지는 빗물을 닦아내지만 그 위로 다시 쏟아지는 빗물은 거울을 다시 흐려놓기 때문에 그 암시적 여운이 오래 남는다. 이 기이하고 매혹적인 작품은 말과 침묵 사이의 틈새로 흐린 욕망의 풍경을 언뜻 언뜻 드러낸다. 언어가 말을 더듬을 때까지 벼랑으로 몰고 가며 태연하게 연출하는 이 잔잔하고 불안한 한 편의 연극은 그 어떤 단정적인 해석도 거부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그 잔상이 길게 남는다. - 김화영, 『2012 젊은작가상』, 301~302면


 김화영 선생의 문장을 근거로 말하자면, 소설의 정취가 곧 폭우로 수렴하기에 그것의 제목이 ‘폭우’다. 소설이 만들어내는 감각이 ‘폭우’가 상기하는 감각의 넓은 품 안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폭우의 감각이란 어떤 것인가. 우선 끊임없이 낙하하는 소리가 있다. 그것은 빼곡하게 공간을 점유한다. b의 부부가 언쟁을 벌이는 부분에서 거센 빗소리는 그것의 운동 방향과 반대로 비등(飛騰)한다. 부부의 침묵은 침묵으로 존재할 수 없다. 남편-아내-폭우의 대화로 들릴 지경이다. 그런가 하면 a는 “계속 자판을 치”는 남편의 모습을 결말에 둔다. 손가락이 낙하하고 자판을 강타하여 집 안을 메우는 타자 소리를 빗소리로 이해하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니까 a와 b 두 이야기는 모두 폭우의 ‘소리’로 끝맺는다. 거대한 삶의 불행이 한차례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여전히, 그리고 끊임없이 낙하하는 소리만 남는 정취. ‘폭우’는 우리가 소설을 읽고 난 후 다시 상기하게 되는 제목의 자리에 있다는 점에서, 소설의 결말과 맞물려 그것의 생명력을 얻는다. 

 폭우의 감각은 소설 전반에서도 감지된다. 신수정 평론가의 문장을 빌리자면, 「폭우」는 ‘일상적인 사건과 일생일대의 절망적인 사건을 전달하는 목소리가 같’다.[2] 어느 사건에 방점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 모든 일이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듯 서술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이렇게 적는다. “이 작가는 여타의 한국 단편소설들이 가장 감상적인 말들을 늘어놓을 것 같은 대목에서 어김없이 입을 다문다.”[3] 감정의 굴곡 없이 묘사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어떤 면에서 몹시 차가워 보인다. 그래서 소설은 폭우와 닮았다. 빗줄기의 거센 힘은 소설에 없다. 그러나 폭우의 균일함이 있다. 일정한 틈새를 비워둔 채 같은 무게로 낙하하는 빗방울의 균일함을 소설은 갖췄다. 그러므로 「폭우」를 읽는 일은 문장을 빗줄기 삼아 한 번의 폭우를 경험하는 일과 같다. 소설의 서스펜스가 밝혀지는 부분 부분은 천둥과 번개로 남겨두고, 미스터 장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비가 그치는 것을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장치: 이혜경의 시선

 

손보미의 「폭우」는 ‘폭우 속에서 슬픔과 분노 때문에 멈춰버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의 불행이 ‘멍청함’ 때문이라고 생각한 한 여자에게 싹튼 교양에 대한 선망, 그녀는 그 교양을 익히려 노력하고 그 세계에 다가가려 한다. 그 과정에서 생긴 오해가 증폭되면서 빚어지는 일들이 마치 희곡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이혜경, 『2012 젊은작가상』, 312~313면      


 “폭우 속에서 슬픔과 분노 때문에 멈춰버린 사람들”은 소설의 문장이다. 그러므로 이혜경 소설가의 문장에 의하면, 소설이 이미 표기한 바와 같이 ‘폭우’는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장치다. 먼저 다소 명징해 보이는 b와 폭우의 연결을 짚고 넘어가자. b는 부부의 하룻밤 간 일정을 그린다. 그들은 폭우를 뚫고 식당을 방문하였고, 비가 그쳤을 때 집으로 갔다가, 기숙학교에 있는 아들을 데려오고자 다시 자동차를 몰고 나온다. 그들이 얼굴에 부자연스러움, 분노 그리고 슬픔을 매달고 식사할 때, 빗소리는 조용하지만 불안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들렸으리라. 마치 서스펜스를 암시하는 영화음악처럼. 부부가 식당을 떠나려는 때 비는 그친다. 배경음악의 부재로 미스터 장은 부부의 표정을 깨닫는다. 그런가 하면 더욱 거세진 빗소리는 위태로운 언쟁의 배경이 된다. 문장이 입을 다문 장면에서 비는 내린다. 자동차라는 작은 공간을 에워싸고 내리는 폭우로 인해 그들의 시야는 흐려지고, 옴짝달싹 할 수 없다. 오직 빗소리와 말소리만 겹쳐지는 공간. 비를 잠시 그치게 함으로써 작가는 이야기의 결말부 휘몰아칠 감정의 폭포수를 예비했다. 부부의 불안이 치솟는 만큼 빗소리도 고조된다. 손보미는 단정적이고 지시적인 문장 대신 폭우의 감각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 바탕이 오직 언어로 이루어지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폭우」의 독자성이 발생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b는, 제때 멈추고 제때 휘몰아칠 줄 아는 폭우에 힘입어, 한편의 잘 짜인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폭우」를 읽자면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더 있다. b의 서스펜스를 책임지고 있는, 부부의 아들이 낸 불은 이야기의 관점에서도 소설 장치의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부부는 각자 ‘불이 나던 날’ 갖게 된 의문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남편은 묻고 싶었으나 참았고, 아내는 기다렸지만 먼저 물었다. 그러나 그렇게 우발적으로 서로의 의문을 상대방에게 던진 그 시점에서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들의 ‘불’은 소화되지 않은 듯하다. 남편은 아내를 때리고 싶은 욕망을 느끼고 아내는 남편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마음에 불을 품은 채 묻고 변명하고 주장한다. 자동차 밖으로 쏟아지는 폭우는 그들의 불을 진화할 수 있을 듯하지만 그들은 꼼짝 않는다. 그렇게 도로 한복판에 놓인 자동차와 그것을 강타하는 폭우의 이미지는, 인간의 어떠한 어리석음, 그러니까 차라리 차 문을 열고 나가서 폭우에 몸을 내던진다거나 하는 결정을 끝내 유보하고야 마는, 그렇게 불타는 마음을 내버려 둔 채 다시 일상에 편입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욕심을 우회적으로 비웃는 장치로도 읽힌다.


중력을 넘어서가 아닌 중력에 맞서서 


 소설에 부쳐진 질문의 답변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저자의 견해를 얻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해답이 되기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손보미의 문장은 해답을 제시하기는커녕 더 중요한 물음을 독자에게 떠넘긴다. 손보미는 2012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작가노트에서 “처음에 구상했던 소설의 제목은 ‘중력을 넘어서’였다”고 밝힌다.[4]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그 소설은 완성되지 못했고, “대신 엉뚱한 소설 - 「폭우」 - 이 완성되었다.”[5] 다른 소설 이야기를 왜 「폭우」의 작가노트에 적나 싶지만, 그 까닭은 곧 밝혀진다. 두 작품에는 전체적인 분위기나 정조 등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폭우」를 쓰게 된 계기가 「중력을 넘어서」를 완성하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그런데 흥미로운 부분은, a를 구상할 때만 해도 제목은 여전히 ‘중력을 넘어서’였으나, 어느 날 상기한 b를 소설에 사용하려는 아이디어를 거쳐 소설의 절반을 완성했을 즈음, “이 소설의 제목으로는 ‘폭우’가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6]

 과감하게 말하자면 본래 서사 a는 ‘중력을 넘어서’를 제목으로 둘 수 있는 텍스트이지만, 그것이 b와 결부된 이후로는 ‘중력을 넘어서’는 내용은 없고 ‘폭우’의 감각을 갖도록 변질되었다는 것. 정반대의 의미로 전환된 것이기도 하다. 어째서 정반대인가? 그것은 ‘폭우’라는 단어가 환기하는 하강의 이미지에 근거한다. 소설의 원제목이 ‘중력을 넘어서’였음에 반해 ‘폭우’는 중력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수많은 물방울의 낙하를 말한다. 저항(defy)은 없고 무력함이 있다. 서사 a가 변하지 않고서 ‘폭우’라는 단어가 제목의 논리를 장착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러한 화학작용의 가능성은 일견 희박해 보인다.


 실마리는 인물에 있다. 소설은 적극적인 감정의 표출을 소거하여 인물들을 묘사하지만, 우리는 분명 저마다의 대립과 대비를 감지했다. a의 인물을 먼저 살피자. 아내는 삶의 변화를 열망하는 인물이다. 남편이 사고로 죽었으면 하는 마음을 몰래 간직한 채, 지적 수준의 고양을 위시하며 산다. 그녀에게 불행은 극복 가능할지도 모르는 것으로 한때 생각된다. 이러한 아내를 다시 불행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남편이다. ‘우리’의 불행의 면면을 제대로 확인시키고자, 음악 강사를 집으로 초대하고, 아무도 웃지 않는 농담을 이야기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아내는 불행을 넘어서고자 하는 인물이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다는 것. 오히려 불행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인물에 가깝다는 것. 이렇게 해석할 때, 불행은 일종의 불가항력이라는 점에서, 중력에 대응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서사 a는 중력을 넘어서려는 아내의 이야기를 그 중심에 두어 ‘중력을 넘어서’라는 제목을 갖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b의 인물들이 서사를 갖게 되면서 소설(a+b)의 형질은 변한다. b의 부부 중 불행을 ‘넘어서’려는 인물은 없다. 넘어선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행은 변함 없는데 그것이 더 이상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중력처럼 넘어서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설령 불행을 넘어서더라도) 불행은 언제든 다시 닥칠 수 있으며 그것의 정도에 있어 인간은 언제나 수동태다. 그러므로 불행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기실 허상에 가깝다. 어쩌면 불행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리라. b의 부부는 진실로부터 도피할지언정 불행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외려 꽁꽁 언 빙판이 갈라지는 틈을 빙판 한가운데에서 불안하게 지켜보는 인물들에 가깝다. 거기서 그들은 빙판의 틈을 봉합하려고 시도하거나(아들을 데려오려는 아내) 틈이 더 깨어지지 않게 조심히 서 있는다(불이 난 날 아내의 행방을 묻지 않는 남편). 그러므로 b의 서사가 소설에 추가된 순간 ‘중력을 넘어서’라는 제목은 그 효용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제목이 ‘폭우’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소설에 서사 b가 추가되는 ‘경험’을 겪으며 작가가 깨달은 바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것은 노래 「중력을 넘어서」의 원제목인 「defying gravity」를 ‘중력에 맞서서’로 바꿔 번역하여 소설에 기입한 것에 주목할 때 비로소 보인다. 맞선다는 것은 넘어서는 것과 몹시 다르다. 불행에 맞서고자 하는 이들은, 불행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종내 그것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불행을 탈피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더라도 그들은 우선 저마다의 방식으로 버텨내기를 선택하는데, a의 아내의 경우는 그것이 강의를 들으러 나가는 일이었을 테고, 남편은 끊임없이 자판을 두드리는(지나치게 해석하자면 텍스트를 창작하는) 행위였을 테다. 이들의 의지는 끊기지 않는다. 아내가 ‘우리의 미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조소 섞인 체념을 뱉을 때 그것은 자신을 향한 말이다. 아내는 자신의 처지를 비웃을지언정 변화를 향한 열망은 여전할 것이다. 남편은 자판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불행에 맞서는 자신만의 방식이므로. 

 서사 b의 부부 역시 그렇다. 그들에게 당면한 목표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장의 불행에 맞서야 한다. 진실을 묻고 아이를 데려오는 일이 남편에게는 더 큰 불행의 착륙이고, 아내에게는 불행을 해소할 영양제였다. 물론 그들의 갈등으로 인해 자동차는 고속도로의 갓길에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되지만, 그들에게 닥친 거대한 파열은 그들의 삶(불행)을 뒤바꿀 수도 있는 일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불행에 맞서는) 서사 b를 추가함으로 인해 자신이 창작한 서사 a의 인물들에게서 ‘중력을 넘어서’려는 열망이 아닌 ‘중력에 맞서’고 있는 모습을 새롭게 발견한 것인데, 이것은 소설의 신비이자, 이 소설이 서사 a와 b의 단순한 합이 아닌 곱으로 이루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설은 a와 b를 번갈아 가며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오독을 고백할 차례다. 앞서 폭우를 ‘중력을 넘어서’에 반하는 ‘무력한 하강의 이미지’로 해석했으나, ‘중력을 넘어서’는 이제 소설에서 무화된 어구이므로, ‘폭우’를 다시 읽어야 한다. 소설이 주목한 폭우의 이미지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아니라 바닥에 있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힐 때, 그리고 잠시 튀어 오를 때 지면(地面)은 마치 차갑게 비등(沸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곧 중력의 현현이자 중력에 맞서는 처연함의 현현이다. 따라서 폭우가 지속되는 한, 소설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그들은 자신의 방향대로 다시 튀어 오르기를 반복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올바른’ 방향이 아닐지라도. 그리고 소설은 각 이야기의 막바지에 어떠한 진실을 ‘깨닫는’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그들의 행위가 변화될 가능성을 남기지만 정확히 보이지는 않는다. 아직은 빗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비등(飛騰)하는 이야기 


 본고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폭우」의 제목이 ‘폭우’가 되는 까닭은 첫째 빗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 소설을 읽는 일이 한 번의 ‘폭우’를 경험하는 일과 같다는 점에서 그것이 소설의 정취를 표상하는 단어라는 것, 둘째 서사에서 ‘폭우’의 기능이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 셋째 ‘폭우’가 불행이라는 불가항력의 작용과 그것에 맞서는 인물들의 처연함을 현현하는 단어라는 것. 

 이 중 가장 뛰어난 성취라고 생각되는 것은 단연 셋째다. 소설의 재료가 한 번, 소설의 구조가 한 번, 소설의 제목이 한 번 바뀌어 결정된 것이 ‘폭우’라는 점에서 그렇다. 손보미는 새로운 이야기(b)를 통해 기존의 이야기(a)를 새롭게 읽었으며, 두 이야기를 다시 배치함으로써 소설의 제목을 바꿨다. 그로써 불행의 새로운 면모, 그러니까 불행을 넘어서려는 인물과 그것을 무력화하려는 반대의 인물만으로 불행 주위의 사람들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불행에 맞서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손보미는 깨달았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계층에 따른 불행의 상이한 파급효과를 다룬 것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서사 a의 인물들은 멍청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불행을 넘어서려 했다거나, 서사 b의 인물들은 똑똑하고 부유하기 때문에 진실을 추궁하지 않은 채로 불행의 상흔을 봉합하려 시도했다는 식의 해석은 곤란하다. 그 까닭은 첫째, 손보미가 현실의 어떤 삶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재현해내는 노력에 크게 관심 없다는 점[7], 둘째, 손보미 소설에 기대하게 되는 것은 김애란 「침이 고인다」, 황정은 「상류엔 맹금류」와 같은 리얼리즘이 아닌 ‘현실적 상상력’이라는 점에 있다. 분명 현실세계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손보미는 이것이 ‘작성된 이야기’, 그러니까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듯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상상과 전개를 허용한다.[8][9] 그의 단편 소설 「그들에게 린디합을」이나  장편 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특히 그렇다. 소설 바깥의 예를 들자면 손보미가 작가의 말에 이 소설이 어떤 우여곡절을 거쳤는지 적은 것은 독자가 「폭우」를 이 세상의 정확한 단면 (또는 실화)으로 이해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독자는 이 이야기가 이 세상 어딘가 살아 숨쉬고 있는 세상의 한편이라고 믿게 된다. 일단 나는 그렇다. 어느 집 거실에는 타자를 치는 눈 먼 남편이, 어느 비 오는 고속도로에는 갓길에 멈춰버린 차량이 있을 것만 같다. 폭우가 내릴 적이면 불행이란 얼마나 뜬금없이 들이닥치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기란 얼마나 어렵고 또 잔인한지……. 이런 믿음이 가능한 이유는 단연 손보미의 능력에 있다. 그는 자신이 필요한 만큼 이야기를 잘라 적재적소에 붙이는 데 능숙한 이야기-편집자이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편집할 수 없는, 그래서는 안 되는 지점을 정확히 아는 성실한 이야기-관찰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손보미의 소설은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존재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신이한 방법론에 기대어 제목의 ‘논리적 타당성’을 해석한 본고는 이야기의 강력한 힘을 믿는다. 뛰어난 수준으로 직조된 어떤 이야기는 생명력을 지니고 나아가 하나의 견고한 세상을 갖는다는 것. 그래서 독자는, 설령 이야기의 창작자더라도, 이야기를 잘 관찰하고 인물의 행동과 언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야기가 생명을 갖는 이러한 순간은 놀랍고 아름다워 마치 그것이 비등(飛騰)하는 듯한 감각을 느끼게 한다. 손보미 소설이 갖는 매혹의 비밀이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1]

신형철, [심사평], 손보미 외 6인, 『2012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2(이하 『2012 젊은작가상』), 308면.

[2]

신수정, 「소설의 중력에 맞서 날아오르는」, 손보미, 『그들에게 린디합을』, 문학동네, 2013, 250면.

[3]

신형철, [심사평], 『2012 젊은작가상』, 308면.

[4]

『2012 젊은작가상』, 39면.

[5]

같은 책, 41면.

[6]

같은 책, 42면.

[7]

손보미는 단편소설「담요」로 등단하며 이런 평가를 듣고 시인한다. “경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썼지요?”

[8]

덧붙이자면 이 소설은 너무 잘 짜인 나머지 폭우의 기능과 그 효과가 서사에 정확히 부합한다. 이것은 충분히 아름답지만 현실답지 못하다. 이야기에 알맞게 세상을 편집해내는 작가는, 실제 현실-이야기에 없다.

[9]

신수정은 이를 ‘우연’의 쓰임새로 포착하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뻔뻔한 우연이 좋다. <500일의 썸머>에서 조셉 고든 레빗이 썸머와 헤어진 후 만나게 되는 새로운 연인 이름이 어텀인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음악의 은밀한 폭력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