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를 모르는 척 하는 불쌍한 어르신, 제가 봐드려요
1. 전철을 탔다.
장난끼 많은 초등학생들이 서 있었다.
키가 큰 나를 보고 신기해하는 표정과 속삭임들.
예민하던 어린 시절엔 이런 것 하나하나가 짜증났는데,
나이가 들며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음을 느꼈다.
남학생이 내 옆에 서서 키를 재보길래,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어 볼을 쓰다듬어 줬다.
민망한지 놀랐는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얼굴과 지하철 어딘가 사이를 웃으며 보다가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하고는 친구들 무리로 돌아간다.
귀엽다는 생각마저 든다.
2. 한달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고등학생들이 쳐다보길래 씩 웃어줬더니,
아저씨 키 몇이냐고 물어보고 내가 대답하던 순간.
건방진, 혈기 넘치는, 무섭게 눌러줘야하는
그런 대상으로 보이지 않고 귀여운 조카로 보이더라.
나이가 드는게 이럴땐 퍽 불편하지 않다
아예 아저씨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도 내 아저씨라는 포지션에 맞는 리액션이 불편하지 않다는 그런 “사회의 질서”가 성립된다는 것
3. 감정의 임계치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던 것들도 쉬 받아들여지고,
오히려 그러려니 했던 것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지는 경우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나는 안다.
사회 초년생때는 불의가 못마땅했고,
10년차 쯤 되니 내게 피해만 안오면 됐고,
15년차가 되니 내게도 네게도 각자의 회사 내 삶이 주어진만큼 있음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고쳐지지 않는게 하나 있다.
너그러워질 수 없는 한가지는 바로 ‘무질서한 꼰대의 폭력성’에 대한 저항감이다.
충분히 나이를 먹었고 배울만큼 배운, 직장 생활 경험도 충분한 어르신이 “질서를 모르는 채 하는 꼰대”력을 발휘하는게 싫을 뿐. 알량한 직책.
4. 지금의 나는 꼰대의 나이가 되었지만,
더한 꼰대에게 압박을 받는 상황에선 소년이 되는
우스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아직 회사에서 내게 뭐라할 수 있는 윗선이 많다는 것을 보며 적당한 안정감(퇴직과의 거리)가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도 내가 하고 싶은 업무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불편함도 가득하다.
물론 내게 지시하는 그 어르신도 이런 것들을 겪어 왔기에, 본인의 편안함을 마음껏 이용 하겠지.
한참이나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브런치에 글을 썼고
적당한 후련함을 느끼며 발행을 미뤘다.
이유? 그것 또한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다.
아직은 모르니까. 아직도 한달 앞을 나는 모르니까.
나이가 들수록 과거 경험에 근거해 내일을 예측할 뿐, 진짜 다가올 미래는 아직 모르기 때문에.
참기보단 ‘놔둬볼까’ 한다.
내가 더 어른이니까. 백발의 꼰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