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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담킴 Dec 09. 2019

안양 일번가

@캔모아

확실히 기말고사 직후다. 모든 줄 세우기가 끝나고 방학을 코 앞에 둔 시점. 안양은 물론 과천, 광명, 의왕까지 이 근처 모든 중고등학교의 교복들이 해방을 맞은 듯 전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역시 가장 지분이 많은 부류는 손가락 하나 넣을 틈 없이 통을 줄인 조끼와 바짝 길이를 줄인 상의, 무릎을 훌쩍 드러내는 타이트한 치마 차림의 여학생들. 그 뒤를 잇는, 거의 쫄바지에 가까운 교복 바지를 입고 각선미를 자랑하는 남학생들. 그리고 왕왕 눈에 띄는, 눈을 다 덮을 듯한 앞머리와 귀를 둥그렇게 판 숏컷에 벙벙한 교복 바지를 입은 여학생들.


진경은 확실히 마지막 부류였다. 진경과 비슷한 머리를 하고 비슷한 교복을 입은 민아의 손을 잡고, 안양 일번가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생애 첫 데이트였다.


안양 일번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안양 일번가])


대뜸 먼저 잡은 진경의 손에 땀이 차 올랐다. 아는 누군가와 마주치진 않을까. 문득 겁이 났지만 먼저 잡은 손을 먼저 놓을 용기까지는 없었다. 손과 손 사이에 작은 공간이 벌어졌다. 일번가의 소음을 뚫고 진경이 먼저 애써 입을 뗐다.


“그거 읽어봤어? 흑혈 님이 어제 새로 올린 거.”

“어. 이번 껀 좀 별로더라.”

“맞아…”


좁은 계단을 한 명씩 올라야 하는 생과일주스 집 입구에 이르러서야 둘은 축축해진 손을 놓는다. 진경은 이번 달 용돈을 탈탈 털어 주스 두 잔을 샀다. 커다란 유리잔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창가에 마주 보고 앉으니 민아의 얼굴이 처음으로 제대로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오빠들에 대한 이야기였을 거다. 오빠 이야기를 할 때에만 살짝씩 비치는 맞은편의 웃는 표정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 웃음을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평소보다 자신이 말을 많이 하고 있다는 생각도. 도무지 수심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호수 앞에 저 혼자 서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잔을 비우고 나온 어둑한 거리에는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진경이 우산을 찾으려 캔모아 입구에 그대로 서서 백팩을 뒤적이는데 “눈인데 뭐 어때”라며 민아는 성큼성큼 네온사인 가득한 길로 나섰다. 여자 남자 쌍을 이룬 아이들이 ‘존나’, ‘시발’, ‘미친’이 90%를 이루는 영양가없는 말들, 순도 낮은 웃음소리들과 함께 이리저리 둘을 스쳐 지나갔다. 민아는 때때로 곁눈질로 그 아이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말없이 길을 걷던 둘은 조흥은행 앞에 우뚝 섰다.

“갈게.”

민아는 뒤돌아 버스정류장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끝끝내 작아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진경은 오래 남은 앞으로의 삶이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간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후 둘은 만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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