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농담킴 Dec 19. 2019

길동시장

@우리호프

혜진은 가끔 궁금했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길동초등학교 6학년 2반 아이들. 혜진이 처음으로 연애편지를 꾹꾹 눌러써서 건넸던 친구도, 혜진의 책상 서랍 속 깊숙이 이름 없는 쪽지와 레모나를 넣어두었던 친구도, 그 사이 어딘가에서 눈 흘기며 질투하던 친구도, 할머니가 되어서도 같은 노인정에 다니며 친하게 지내자고 약속했던 친구도, 전부 6학년 2반에 있었다. 다만 초등학교 졸업은 곧 유년시절의 졸업이었고 각자의 청소년기로 바쁘게 접어들며 연락은 자연스레 끊겼다. 이후 학교 근처를 지날 때마다, 책꽂이에 꽂힌 졸업앨범을 볼 때마다, 혹은 그 나이 또래쯤 되는 아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혜진은 그들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지곤 했다.


졸업 후 5년쯤 흘렀을까. 바야흐로 넷상에 동창들을 찾아주는 ‘다모임'이라는 신세계가 열렸다. 옛 친구들이 거기 다 모여있다는 듣도보도 못한 신비로운 세계. 벌써 다모임을 통해 동창회 정모에 다녀온 반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혜진은 그 곳 이야길 듣자마자 가장 먼저 6학년 2반이 떠올랐다.


집에 오자마자 PC를 켜고, 약간의 설렘과 함께 그곳의 문을 처음 열었다.


-[시간이흘러] 님이 입장하였습니다-


시간이흘러] 안뇽^^ 오랜만!!

시간이흘러] 나 김혜진이야

시간이흘러] 여기 다들 모여있었구나!!!^-^

오날파보컬] 헉... 김혜진이다

초콜릿공장] 하이 혜진~~~ 나 소라~~~~ 이게 얼마만~~~~♡

나는나일뿐] 헉~~~ 김헤지니도 와ㄸㅏ

오날파보컬] 난 자홍이. 기억하려나. ㅋㅋ

시간이흘러] 너무 신기하다ㅜㅜ 다들 잘지냈지?


북적대며 혜진을 기억해주는 채팅창이 그저 신기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듣는 이름들이 새삼 반갑기도 해서, 밤늦도록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다다음날도, 혜진은 집에 오자마자 PC부터 켰다. 45명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도 꽤나 학급 일에 적극적이었던 스무 명 남짓의 친구들이 혜진을 반겼다. 알고 보니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친구도 있었고, 먼 데로 이사한 친구도 있었다. 혜진이 좋아했던 친구는 연락이 두절되었고, 혜진의 서랍에 쪽지를 넣었던 친구는 철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24시간 접속해 있는 것 같은 친구도 있는 반면, 드문드문 존재감을 알리는 친구도 있었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시끌벅적한 채팅창에서 반장이었던 승훈이 이야기를 꺼냈다.


둔촌고매너] 얘더라!! 우리 한 번 모일까?

지존스마일] 오~~~ 좋쥐! 역쉬 반장!!

화이트앤젤] 헐 ㅡㅡ 난 이제 거기 안사는디 ㅡㅡ 대략난감......

오날파보컬] 택시타고와라 ㅋ

초콜릿공장] 보자보자~~~~~ 넘조아~~~~~~^0^


모임 추진은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약속 장소는 초등학교 정문 앞. 다음 주 토요일 6시. 혜진은 일주일 동안 먹는 양을 반으로 줄이고 원피스를 새로 샀다.


정문 앞에 도착한 시각은 6시 12분이었다. 네 명이 먼저 나와있었다. 뒤따라 세 명이 더 왔다. 좀 늦는다고 한 세 명을 제외하면 모두 모인 셈이었다. 처음 참석해보는 동창회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다들 주춤거리는데, 무리 멀찍이 서서 짝다리로 바닥에 연신 침이나 뱉어대던 진표가 “갈데 딱히 없으면 우리호프나 가자”고 말했다. 자기가 거기 주인형을 잘 안다며.


교복을 입진 않았지만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심 움찔움찔했다. 생애 처음으로 들어가 본 술집.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달리 가게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하니 토요일 저녁 6시부터 술집을 찾는 사람들은 없으므로 조용한 건 당연한 것이었다. 아마 그들이 그날의 첫 손님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본 서로가 어색한 것인지 처음 와본 술집이 어색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다들 최선을 다했다.


이윽고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렸다. 늦게 온다는 세 명이 줄지어 들어왔다. 진표는 아주 능숙하게 맥주 열 잔을 주문했고 찰랑대는 500cc 열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어디서 본 건 있는 승훈이 반장답게 잔을 들고 일어났다.


“이렇게 많이 와 줘서 고맙다. 우리 앞으로도 이렇게 주기적으로 모이자. 6학년 2반을 위하여!”


승훈의 어른스러운 건배사에 다른 아이들이 따라서 “위하여!”를 외쳤다. 여전히 앳된 얼굴을 한 아이들이 손에 맥주잔을 들고 건배를 하는 모습은 혜진이 최근 본 장면들 중에 최고로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노랗게 기포가 올라오는 맥주를 눈 앞에 두고 있자니 호기심이 일어 혜진도 건배 후 조금 홀짝여봤지만 차고 쌉싸름한 맛에 혀를 내두르며 곧바로 손을 뗐다.


보아하니 몇몇 아이들은 맥주를 물인 양 잘도 들이켰다. 테이블에 점점 빈 잔들이 늘어났다. 더 시간이 지나자 그 몇몇 아이들은 취하기 시작했다. 괜한 욕지거리를 하고, 이유도 없이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를 찢어놓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때 옆반 선생님 가슴이 컸다는 둥, 담임은 바지만 입고 와서 재미가 없었다는 둥, 알콜에 섞인 날 것의 언어들만이 요란하게도 오고 갔다.


늘 궁금했던 티 없는 그 아이들은 오직 혜진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있었다. 팽팽하게 부푼 마음을 들고왔건만 시나브로 바람이 빠져나가 종국엔 완전히 납작해져버린 것만 같았다. 혜진은 계속 그 광경을 보면서 거기 앉아있을 자신이 없었다. 눈에 띄지 않게 겉옷을 챙겨 먼저 일어났다.


가게문을 겨우 밀고 나오는데 누군가가 혜진 뒤를 황급히 따라 나왔다. 철민이었다.


“같이 가자.”


둘은 가게를 나와 걷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애들 생각을 너무 많이 했나 봐. 생각했던 6학년 2반 애들이 아닌 거야. 술들은 왜 이렇게 잘 마시니? 엄소라랑 우진표는 담배도 피더라?”

 

열내며 얘기하는 혜진 옆에서 철민은 그저 웃으며 걸음을 맞췄다.


“고2밖에 안 된 것들이 말이야. 진짜 걱정이다 쟤들. 원랜 다들 순딩이었던 거 같은데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건지... 난 오늘 솔직히 실망이 너무 컸고... 당분간은 애들 볼일 없을 것 같애.”


철민이 멈춰 섰다.


“...나도 안 볼 거야?”


질문이 꽤나 느닷없고 묵직했다. 아마도 철민에겐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순간 같았다. 혜진은 애써 당황한 기색을 지우며 웃음으로 둘러댔다.


“아. 너랑은~ 당근 계속 연락하고 싶지~ 넌 뭐 그런 생각 없이 구는 애도 아닌거 같고...”

“그럼 나, 니 휴대폰 번호 좀 알려주라.”


철민이 혜진의 흔들리는 동공을 빤히 바라봤다. 철민의 눈빛은 뭔가를 말하려 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혜진에게 철민은, 여전히 반에서 가장 키 작고 축구를 좋아하던 남자애. 딱 거기까지였다.


“나 휴대폰이 없어. 엄마한테 뺏겨서... 우리 그냥 다모임으로 계속 연락하자.”


순간 철민이 조금 화난 표정으로 혜진의 손목을 잡아챘다.  손아귀가 제법 단단했다. 혜진은 그 손을 있는 힘껏 뿌리치고 집 쪽으로 무작정 달리고 또 달렸다.


모임 다음 날.

그다음 날.

다다음날.


6학년 2반 게시판과 채팅방에는 인적이 뜸해졌다. 혜진도 예전처럼 열성적으로 그곳에 접속하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났을 무렵부터는 더 이상 새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더 이상 서로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또 한 번 자연스레 아이들은 연락이 끊겼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혜진도 그 즈음부터였다. 때때론 서랍 속 깊숙이 넣어뒀던 것들을 굳이 꺼내보지 않은 채 그냥 두는 편이 더 낫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누굴 만나든 진심을 꾹꾹 눌러쓰지 않게 된 것도. 마음을 100% 팽팽하게 부풀리지 않게 된 것도.


전부 그즈음부터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