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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논문은 다 짜깁기라고?

누가 그런 개소리를 합니까?


오늘도 열이 받아서 글을 쓴다(역시 글쓰기의 원동력은 원한과 분노이다). 몇몇 유명인들의 석사논문이 표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유명인에 대한 의견이야 뭐 항상 분분한 것이니까 이상할 것은 없지만, 나의 버튼을 눌리게 한 것은 바로 이런 말이었다.


석사논문은 어차피 다 짜깁기임. 표절 안 하는 사람 없을걸?
창의적인 논문 써가도 교수들이 통과 안 시켜줌.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저런 말이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저런 말을 헛소리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석사논문을 표절한 유명인들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다. 특히 최근 논란이 된 설민석 씨의 경우, 학부 전공이 연극영화라는 이유로 역사에 대한 전문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우리가 학부 전공을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직업과 전문성 전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논문을 표절한 유명인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떠나서, 표절은 분명히 학문적 범죄이며 비양심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나는 곳곳에서 사람들이 석사논문의 표절에 대해 '그럴 수 있다'라고 관대하게 말하는 것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아마, 사람들이 그런 관대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석사논문과 표절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 헛소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편의를 위해서 이후부터는 석사논문과 표절에 대한 위와 같은 관대한 생각을 그냥 '헛소리'라고 칭하겠다. 지금부터 저 헛소리가 왜 헛소리인지를 살펴보자. 



석사논문은 짜깁기일 수밖에 없다?

석사논문이 결국 짜깁기라는 헛소리는 석사논문의 성격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소리다. 물론 학교와 전공마다 다르겠지만, 학계에서 '석사논문'이 가지는 포지션은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합의가 되어 있는 편이다. 그 포지션이 뭐냐면,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학습했다는 증명이다. 석사논문이 학문적으로 매우 많은 기여를 할 것이 기대되지 않는 이유는, 석사논문이 학계에서 가지는 포지션 자체가 가장 기초적인 자격증 수준이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 매우 훌륭하고 학계에 기여하는 석사논문이 나오기는 하지만, 모든 석사논문에 그 정도의 성취가 기대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석사논문을 쓰고 심사를 통과해서 석사를 받았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해당 학문의 영역에서 공부를 해나갈 수 있는 기초적인 능력과 태도를 갖추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운전면허 시험으로 따지자면 필기시험과 같은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석사논문에 요구되는 것은 독창적이고 뛰어난 학문적 성취보다는, 학문적 글쓰기로서 충실한 요건과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석사논문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독창적인 주장을 전개하는 것보다는(물론 이것도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떤 주제에 대한 선행연구들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 선행연구들을 새롭거나 조금 다른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석사논문은 결국 짜깁기일 뿐이다"라는 말은, 석사논문이 본래 선행연구 분석을 주요 목표로 삼는 글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더 나아가서 '선행연구 분석'을 '짜깁기'로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석사논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학술적 글은 선행연구에 의존한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논의의 장이 어떻게 펼쳐져 왔는가를 잘, 그리고 새롭게 읽어내는 사람이 연구를 잘하고 논문을 잘 쓰는 사람이다. 선행연구에 의존하지 않는 논문은, 아마 글쓴이 혼자만 창의적이라고 생각할, 게으르고 엄밀하지 못한 글일 가능성이 크다. 학술논문이라는 것은 원래 이전의 논의들이 무엇이었으며 그에 더해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는가를 내용으로 삼는 글이다. 여기서 '이전의 논의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서술하는 부분을 "짜깁기"라고 한다면, 인간이 쌓아온 모든 학문의 총체가 결국 짜깁기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석사논문 쓰면서 표절 안 하는 사람 없을걸?

아닐걸? 너만 표절했을걸? 

표절에 대해서 대중적인 오해가 아주 심각하게 있는 것 같다. 단순히 두 개의 글이 대충 비슷할 때 표절이라고 말한다는 오해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이, "석사논문을 비롯한 학술논문이 기존의 연구들을 참조하고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라는 사실에 대한 소박한 이해와 결합하면, "다른 연구 참조해서 쓰다 보면 어쩌다 표절할 수도 있지"라는 아주 유해한 결론을 낳는다.


표절이란 무엇인가? 표절의 핵심은 '남의 것을 갖다가 씀'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표절의 핵심은 '남의 것을 갖다 쓰면서도 남의 것이라고 밝히지 않음'에 있다. 즉,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문장을 가져다 쓴다고 해서 다 표절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문장을 가져다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밝히지 않은 경우를 표절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다 썼지만,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다른 사람의 것인지를 밝히지 않는다면, 그 글을 읽는 독자는 해당 부분이 글쓴이 자신의 생각이나 문장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독자의 이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는 경우를 모두 표절이라고 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표절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아주 억울해하면서 '그럼 아무 외부자료도 참조하지 말란 말이에요? 전부 제 머릿속에서 만들어 내라고요?'라고 반발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대단한 오해이다. 표절하지 말라는 말은 아무것도 참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어디부터가 남의 것이고 어디부터가 내 것인지를 분명히 표시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학계에는 이미 이 표시를 위한 규칙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인용법'이다. 선행연구를 분석하거나 다른 사람의 논문들을 참조할 때, 해당 부분이 오로지 나의 창작물이 아니라 다른 자료에서 가져왔음을 표시하기 위한 규약이다. 일반적으로 각주를 다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며, '직접 인용'과 '간접 인용'이 있다. 인용법을 지키는 자세한 방법은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의 '글쓰기 윤리'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제발, 대학교 다니면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인용법을 지키자. 수년간 글쓰기 조교를 하면서 인용법을 제대로 지켜서 글을 쓰는 학생을 본 일은 손에 꼽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용법을 대학에서 더 많이, 자주, 빡세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용법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글쓰기 윤리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어디까지가 남의 것인지를 정직하게 표시하는 훈련은 곧 글쓰기의 정직성을 담보하고, 더 나아가서 학문 연구의 정직성을 담보한다. 지난 10년간 학부생들에게 인용법을 더 빡세게 (솔직히 4년 내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르쳤다면, "석사논문 표절할 수도 있지"라는 헛소리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유명인들의 석사논문 표절률을 검사하는 '카피킬러'는 이 인용법에 기초한 프로그램이다. 많이들 오해하는데, '카피킬러'는 단순히 유사도를 검사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인용법에 따라서 각주 표기를 제대로 했다면 그 부분은 유사도에서 배제된다. 즉, 카피킬러에서 나온 표절률은 말 그대로, 글 전체에서 인용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글과 일치하는 부분의 비율이다. 보통, 연속되는 6 어절 이상이 완전히 동일하게 일치할 때 그 부분을 표절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어떤 글의 표절률이 50%라면, 그 글의 절반 정도에서 다른 글과 연속으로 6 어절 이상 일치하는 문장이 발견되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글을 참조하면서 그것이 다른 사람의 글임을 정직하게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글을 참조하면서 그것을 패러프레이즈할 성의조차 없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글쓰기에서 표절은 남의 것을 함부로 가져오는 도둑질일 뿐만 아니라, 아주 게으르고 성의 없는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창의적인 논문을 써가도 교수들이 통과 안 시켜줌.

음... 미안하지만 그런 경우는, 아마 당신 혼자만 당신의 논문을 창의적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교수들이 당신의 논문을 거부한 이유는 그 논문이 너무 혁신적이고 창의적이 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 논문이 석사논문으로서의 요건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의외로 학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보수적이지는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학술논문'의 형식을 거의 갖추지 않았지만 혁신적인 성취를 해낸 글이었고 철학계는 (심지어 그의 글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당신이 비트겐슈타인 급의 창의적인 논문을 썼다면 교수들이 통과를 안 시켜줄 리가 없다. 


창의적인 논문을 교수들이 거부한다는 생각은 아마, '창의성'을 백지에서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 듯하다. 외부 자료를 아무것도 참조하지 않고 오로지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 예술작품이나 뭐 그런 영역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십분 양보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지, 나는 진짜로 예술작품의 독창성이 백지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창의적인 예술가들이 예술의 역사를 더 열심히 공부한다). 그러나 학문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독창적인 연구란 참고문헌이 하나도 없는 연구가 아니라, 기존의 연구와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연구, 기존의 연구들이 사용하는 개념이나 방법론과 조금 다르고 새로운 제안을 하는 연구를 의미한다. 선행연구와 나의 연구가 어떻게 다르며 내 연구가 기존 연구들보다 어떻게 나은지를 성공적으로 보였을 때 나의 연구는 비로소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것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행연구에 대한 언급 없이 독창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주제에 대해서 기존에 어떤 연구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공부가 되어 있지 않다면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창의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선행연구 분석이 성실하고 적절하게 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석사논문이 연구자로서의 기초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선행연구 분석을 성실하게 잘(그리고 때로는 창의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은 학문적 창의성의 전제조건이자, 연구자의 양심을 지키는 능력이기도 하다. 



그때는 다들 석사논문 표절하고 그랬음. 

이건 정말 할 말이 없다. 어쩌라고? 조선시대에 다들 여성차별했다고 해서 여성차별이 나쁘지 않은 것이 되는가? 학문적 글쓰기에서 표절은 '그래도 됐던 것'인 적이 한 번도 없다. 표절을 가려낼 수 있는 장치나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시절이야 있었겠지만, 학문적 도둑질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 유명인들만 표절 가지고 난리냐고? 다른 사람들도 다 했는데 왜 유명인들만 뭐라고 하냐고? 나는 솔직히 지금 석사학위 가지고 있는 학계 종사자들 전수조사해서 표절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다 잘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론. 표절은 정말 나쁘다. 누가 해도 나쁜 일이다. 어쩌다가 그럴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리고 사실 어쩌면 제일 나쁜 사람들은 표절한 논문을 심사에서 통과시켜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책임져야 한다. 논문을 쓰는 사람이건 심사하는 사람이건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최소한의 학문적 양심을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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