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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대학(원) 생활에 관하여



1. 공부만 하는 삶


바라건대 소원이 있다면 공부만 하면서 살게 해 주소서. 직장인 친구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내가 반쯤 미쳤다고 생각한다. 인문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내가 저런 말을 할 때 가족과 친구들은 나를 만화책에 나오는 현자와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자연인의 중간 쯤 되는 존재로 보는 것 같다. (한편, 공부만 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더니 로스쿨을 강력 추천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너무 많은 활동들이 ‘공부’로 퉁쳐지는 것에 대해 강력한 불만을 품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자.) 하지만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은 대부분 나와 같은 미친 소망을 품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발, 공부만 하면서 살게 해 주소서.


석사 때에는 박사가 되면, 연차가 쌓이면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내가 아직 학생이니까, 내가 어엿한 연구자가 되면 공부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앞으로 내 삶에서 공부만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마 앞으로 절대 없을 것이다. 있어 봐야 명예퇴직 이후쯤 아닐까? 일단 명예퇴직을 하는 것이 가능은 할까? 명예퇴직을 하려면 일단 전임교수가 되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아마 많은 인문대 대학원생들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전임교수일 것이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운이 좋게 교수가 된다고 해도, 아니 교수가 되면 그 때부터는 정말로 공부만 하는 생활은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다. 인문대 교수에게 강의만 시키는 대학은 있어도, 연구만 시켜 주는 대학은, 내가 알기로는 적어도 국내에는 단 한 군데도 없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와서 연구자의 길을 가기로 한 여러 동기 중 하나는 공부하는 일이 나름대로 적성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원에 가면 공부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리고 공부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한동안 나의 소원이요 목표였다. 그런데 나는 이제 그 목표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럼, 나의 삶은 어디로?




2. 대학 생활자


공부만 하는 삶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조금 더 다음 단계로 밀고 나가게 된 계기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임수영의 '공부 노동자의 밥벌이'를 읽은 일이다. 임수영은 생계유지와 연구를 동시에 해야 하는 대학원생의 삶에 대해 말한다. 나는 임수영과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나의 생활은 어떠한가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의 생활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두 번째 계기는 이번 학기에 쏟아지는 채점이었다. 나는 박사과정을 수료한 시간강사인데, 따라서 수업의 조교를 하면서 동시에 다른 수업의 강사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내가 지금까지 채점한 글쓰기 과제는 900여편에 이른다. (물론 이것은 내가 8개 분반을 돌아가며 가르치는 특수한 수업을 맡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쉴 새 없이 채점을 해도 그 다음 채점이 돌아오는 상황에서, 학위논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자기 전이나 샤워할 때 정도이다. 채점과 온라인 강의 녹화, 학생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다 보면 개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정말로 적다. 이를테면 나는 공부만 빼고 다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러려고 박사과정에 진학했던가?

이 상황이 앞으로 얼마나 더 나아질까? 나는 크게 긍정적이지 않다. 박사학위를 받는다면 학위논문에 대한 부담은 확실히 사라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구를 그만두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학위를 받고 나면 나는 더 본격적으로 강의전선에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은 지금보다 나빠지면 나빠졌지 더 좋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상황을 더 낫게 만들려는 시도는 해볼 수 있다. 일단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해 보자. 생계를 스스로 유지해야 하는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들은 대부분 연구할 시간이 없다는 문제를 겪고 있을 것이다.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들이 연구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괜찮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임수영은 아마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공부가 노동이 될 수는 없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공부를 노동화하는 것이 전망 있는 선택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부는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석사과정에 입학하면서 나는 공부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다짐했지만, 사실 공부는 직업이 될 수 없는 종류의 활동이다. 공부는 나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주고, 내가 더 나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와주지만, 그것 자체가 경제활동일 수는 없다. 따라서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이 공부를 직업으로 가지게 해 달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어쩌면 오만에 가까운 요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공부’를 중심으로 대학원생과 연구자들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학원생과 연구자들은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들을 공부하는 인간으로 정체화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경제활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만든다. 공부 자체가 경제활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않는 한 말이다. 대학원생과 연구자들도 땅에 발을 딛고 일을 해서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다른 직장인들과 다름없다. 즉, 대학원생과 연구자들도 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은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인문학 전공 대학원에 진학한 또 다른 나의 동기는 생활에서 멀어지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인문학 연구자이건 아니건 우리 모두는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 연구자들이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공부는 직업이 될 수 없으니 모두 돌아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 말은, 인문학 연구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하면서 좋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연구자들의 ‘생활’이라는 국면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인문학 연구자나 대학원생들을 묶어서 ‘대학생활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대학 안팎에서 자신의 저술이나 강의 능력을 통해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경제활동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강의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인문학 분야에서 강의 자리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일단 강의를 얻는다 하더라도 많은 학교가 대형 강의를 선호한다. 인문학을 가르치는 과는 통폐합되기 일쑤이고, 강의 역시 그렇다. 시급은 한 명에게만 주면서도 백 명을 한 번에 소화할 수 있으니 대학 입장에서는 대형 강의가 훨씬 이득이 된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된 계약서를 쓰지 않거나 강의의 지속 여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기도 한다. 좀 더 사소한 문제를 고백하자면, 나는 심지어 대형 강의의 시험지 출력도 사비를 들여 해야만 했다. 강사법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강사’가 아닌 ‘객원교수’나 ‘초빙교수’라는 직함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한다. 대학의 강사들은 딱 학점 시수만큼의 노동, 즉 일주일에 3시간, 6시간, 또는 12시간만큼의 노동을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실은 그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 대학생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 줄 수 있을 만큼의 양질의 노동이다. 알음알음 사교육에 기대지 않아도 인문학 연구를 했을 때 보장되는 일자리가 필요하다. 거칠게 생각했을 때, 현재의 대형 강의를 30%만 줄여도 강의를 할 수 있는 일자리는 어느 정도 생길 것이다. 만일 대학 안팎에서 생활하는 일이 나쁘지 않게 된다면, 나는 공부만 하는 삶을 살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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