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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든 May 05. 2018

뾰족한 나의 하루

마냥 말랑말랑할 수만은 없는 타지에서의 삶

또다시 이사를 했다. 카나리 워프를 떠나 이번에는 런던 남동쪽의 뉴 크로스로. 묘하게도 학교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계속 남쪽에 있다 보니 이쪽 지역을 계속 멈돌고 있는 기분이지만 익숙한 곳에 계속 머무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다. 짐이 적지 않을 테니 적어도 하루 이틀은 걸릴 이사가 부담스럽지 않을 부활절 휴일의 일요일로 이사를 계획했다. 토요일 오후에 시작한 짐싸기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고 곳곳에 숨어있던 짐은 대형 박스 열 개와 캐리어 두 개로 나눠 담았다. 미리 예약한 애디슨 리의 이사 차량은 일요일 오후 1시에 오기로 되어 있어서 짐은 미리 현관문 안에 옮겨두었었고 업체 기사가 30분 정도 늦게 도착한 것 빼고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난 편이었다.


그런데 화요일 아침, 한참 일을 하다가 개인 이메일을 열었는데 업체에서 보낸 영수증이 하나 와있었다. 이미 하나 받은 것이 있어서 이사가 끝나고도 재확인용으로 하나를 더 보내주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내용을 확인해보니 짐을 싣고 내리는데 20분 정도 소요가 되었으니 10파운드를 추가로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내가 황당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짐을 싣고 내리는데 소요되는 시간에 추가 요금이 붙는다는 것은 전혀 몰랐던 내용이고 두 번째, 이건 결제 요청이 아니라 일방적 통보였다는 점이었다. 애플 페이로 서비스 이용료를 미리 결제했기에 업체는 내 결제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이미 10파운드는 나도 모르게 지불 완료가 되어 곧 인출될 예정이었던 것이다. 괘씸한 마음에 바로 짧지만 불쾌한 마음이 가득 담긴 이메일을 보냈다. 그랬더니 거의 하루 만에 고객 서비스팀에서 답변이 와서는 미안하다며 환불해 주겠다는 것이다. '환불을 해준다니 다행이군’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내심 이런 업체의 행동 자체가 고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청구해 놓고 나처럼 항의를 하는 사람들에게만 환불을 해주는 것인가 싶어서.


최근 주변 몇몇의 사람들 - 나처럼 한국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 과 점점 성격이 날카로워지고 있는 것 같다는 비슷한 생각을 공유한 적이 있다. 타지에 나와 산다는 것은 낭만적이면서 동시에 비낭만적이다. 이렇게 눈 뜨고 코 베일 일들이 꽤 존재하며 가만히 입 다물고 있다 보면 내가 손해 보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5년이 넘게 영국에서 살고 있지만 아직도 관광지나 시내 중심에 나가면 핸드폰이나 지갑이 제대로 있는지 종종 확인을 하고 혹시나 낌새가 이상한 사람이나 상황이 있다면 그 자리를 피하는 편이다. 서비스가 내가 지불한 금액에 상응하지 않거나, 계산 실수나 주문 오류가 있었다면 득달같이 바로 잡곤 한다. 내가 바라던 상황이 아닐 때 다른 사람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거나 얼굴을 붉히며 말을 쏟아내는 과정이 나도 결코 편하지 않다. 하지만 자칫 무슨 일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방인은 항상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고 자신의 권리를 직접 쟁취해야만 한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대신해 주지 않기에. 


한동안 프렛의 코코넛 라테에 빠져 매일 회사로 가는 길에 한 잔씩 사서 출근하곤 했다. 과거의 경험상 보통 메뉴만 말해 주문하면 찬 것도 아닌 것이 따뜻하지도 않은 애매한 온도의 커피를 건네주기 때문에 꼭 'extra hot'으로 부탁했다. 그날도 여김 없이 "Extra hot coconut latte, please."라고 했으나 국적을 알 수 없는 프렛의 직원은 첫 주문받기에 실패했다. 두 번째에는 천천히. 또 실패. 세 번째에는 extra hot만을 따로 떼어내 말했음에도 그 남자 직원은 "샷을 추가한 라테를 말하는 거야?"라고 반문을 하기에 나는 순간 짜증이 나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약간 목소리 톤을 높여 "No! I said extra hot!"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내 주문을 알아들은 직원은 미안하다면서 드디어 내 주문을 바리스타에게 전달했다. 커피를 받아 나오면서 내가 보인 반응에는 조금은 후회했고 내가 취한 태도에는 많이 놀랐다. 나도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면서 주문을 한 번에 못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험악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는데. 평소에는 은근하게 달콤했던 코코넛 라테가 그날만큼은 유독 씁쓸했다. 


이렇게 별 거 아닌 일에 과민반응을 보이면서 날카롭게 대응하는 나의 모습에 깜짝 놀란 경험을 가끔 되새겨 본다. 언젠가는 온몸에 뾰족한 가시가 돋아나 뜨거운 사막에 외롭게 우두커니 서있는 선인장처럼 변해버리지는 않을까. 그건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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