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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hwa Lee Nov 14. 2019

산책의 시작

매일, 점심이후의 삼십분


나는 봄의 초입부터 새로운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간 생각지도 못한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아무 일 않기란 이런저런 조건들이 맞아떨어질 때나 가능한 일임을 그간의 산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낯선 공간에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편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상황을 유독 피곤해 하기때문인데, 서점이나 전시장처럼 각자 원하는 곳에 시선을 두고 탐색할 수 있는 장소라면 선호하지만 타인과 최소한의 거리도 용납치 않는 대중교통과 밀려드는 인파로 붐비는 길은 나를 녹초로 만든다. 지팡이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나는 쥐스킨트의 소설 속 좀머씨와 다를 바 없는 급한 걸음으로 길을 누빈다. 정작 숨이 차오르면 그제야 피곤을 깨달을 정도로 둔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그간 내가 해 왔던 것은 그야말로 ‘이동’에 가까웠다. 사람을 마주쳐도 내쪽에서 먼저 알아채는 일은 거의 없고, 가끔은 지인들이 나를보고 다가오다 뒤만 좇다 포기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이렇게 된 데에는 유독 숫기없는 나의 성격도 한 몫했겠지만 꼭 나같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도시에서 자신의 속도로 길을 거닐기란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처음에는 앞서 말한 이런저런 이유로 나가는 일을 망설였었다. 하지만 마침, 천변에 있는 나무에서는 새순이 움트고있었고, 흙바닥은 연둣빛으로 물들고있었다. 마음 끌리는 카페 하나 없는 이 동네에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되는 천변은 시간을 보내기에 나쁘지 않아보였다.


처음 일주일은 벤치에 앉아 누군가에게 열심히 전화를 걸었다. 점심은 먹었니? 나는 밥 일찍 먹었지. 아 카페에 간다고? 알았어 다음에 통화해. 시간을 같이 보낼 친밀한 나의 지인들은 각자의 일로 너무 바빴다. 매번 전화를 거는 것도 점점 억지스러운 일처럼 느껴져 곧 그만두고 말았다. 그늘진 곳에 앉아 액정에 고개를 파묻어도 여전히 쉬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뒷목이 뻐근했고, 무엇보다 내심으로는 내가 무언가 보고 싶어서 액정을 들여다 보고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화면은 도피처일 뿐이었으며, ‘산책’은 사무실을 나온다고 시작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침내 휴대전화에서도 손을 놓자 덩그러니 길에 남은 내가 보였다.


‘이제 뭘하면 좋지?’


ⓒ황려진


처음으로 흘러가는 대로 시간을 보낼 마음을 먹는다. 나는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댄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정장 차림의 직장인들도 눈에 띄고, 썬캡을 쓰고 운동삼아 나온 아주머니들도 보인다.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은 대부분 음악을 들으며 길을 걷는중이다. 시선을 물가쪽으로 옮겨본다. 분수의 가느다란 물줄기가 이따금 하트모양으로 교차하며 포물선으로 떨어진다. 녹조가 희끄무레하게 낀 천에는 사람 종아리만한 먹빛 물고기가 제법 득실거린다.광고나 뉴스처럼 이목을 잡아채는게 아니라 그저 계속 발생하는 우연과 자연의 변화 속에서 사방이 미묘하게 움직이는 것들로 가득 차있다.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고 호기심이 차오른다. 같은 풍경을 두고도 나의 귀기울임만으로 몸과 마음이 깬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매일, 점심이후의 삼십분이 앞으로 더욱 소중해질 것이라는 예감을 안고 나는 길을 거닐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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