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봄꽃 사진을 아내에게 전송하는 상상을 하며
버드나무 아래 벤치에 나는 종종 앉아있었다. 이상하게도 이곳 천변의 벤치들은 죄다 그늘이라고는 없는 곳에 놓여 있었는데, 봄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볕에 달궈진 의자에 앉아있으면 마치 건식 사우나에 있는 것만 같이 몸의 표면으로부터 안 쪽 까지 온 몸이 속속들이 덥혀져 왔다. 나는 그게 굳어있던 몸에 온기를 나르는 일 같이 느껴져 살이 타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앉아있고는 했다. 땀이 나고 얼굴이 따가워도 온몸이 은근하게 데워지는 느낌이 들어야 동면에서 깨는 심정이 되어 겨우정신이 차려지는 것이다.
노곤한 오전을 지낸 내가 매일 이곳에 나와 에너지를 얻어가는 동안 땅을 뚫고 부드러운 풀이 고개를 내밀고, 머리 위에서 어른거리는 버드나무 가지에도 여린 순이 올라온다. 봄볕은 세상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깨워 움츠린 생명을 끌어 올리는 힘을 가졌다. 매일 조금씩 따듯함을 축적하며 기다리던 만물이 일순간에 움트는 걸 보면 나 역시 온갖 감상에 젖게 된다. 그런데 가만 보니, 감상에 젖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여느때처럼 길을 등지고 천쪽으로 몸을 돌려 빛이 부서지는 물 표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을 등진 건 되도록 사람을 덜 마주쳤으면 하는 마음에서였고, 천을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무리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물결의 오묘함이 좋아서였다, 그런데 저 멀리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중년의 남자가 보였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그가 군복바지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굳게 했다. 편견이라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군복을 입은 중장년의 남자는 어쩐지 내 마음을 경직되게 하는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주저함 없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기세에 나는 ‘이렇게나 한산한 곳에서 굳이, 내 쪽으로?’라는 물음을 지울 수 없었고, 당황스러워 지려는 찰나 아저씨는 내가 앉은 곳을 지나쳐 흙길로 들어서더니 무릎을 꿇었다. 어안이 벙벙한 나를 전혀 개의치 않는 그가 군복바지 주머니를 뒤져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휴대전화였다. 카메라를 켜고 사진을 찍는 그의 앞으로 겨우 내 엄지손톱만한 노란 꽃이 보였다. 키만 컸지, 꽃대궁이 아주 얇고 여리여리하여 내내 앉아있었음에도 나는 미처 보지 못하고 있던 꽃이었다.
손톱만한 들꽃을 내내 들여다보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니 나는 맥이 탁 풀리며 갑자기 우스운 마음이 들었다. 무슨 상황을 상상하고 나는 긴장한 걸까. 부끄러운 마음을 비집고 이내 나는 마음이 한껏 누그러졌다. 이 계절 안에서 나는 어쩐지 내내 볕을 찾아 일광욕을 하고, 누군가는 무릎을 꿇은 채 꽃에 마음을 빼앗긴다. 모두들 참으로 속수무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침내 사진을 다 찍은 그가 벌떡 일어나서 다가올 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멋대로 그가 봄꽃 사진을 아내에게 전송하는 상상을 하며, 웃음지으며 뒤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