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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외의 Jan 24. 2022

칭따오씨



찬 공기가 깔린 이른 아침, 문 열고 들어가 홀과 주방 불부터 켰다. 두 손에 무거운 종이 가방을 내려두고 앞치마를 두르고, 채소와 육류를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고 마늘 빻는 일로 아침을 시작한다. 파리에서 몇 안 되는 한인 식당 셰프, 중국인 칭따오씨다. 중식당은 이미 채용이 끝나서 무턱대고 한식당에 지원해 들어오게 됐다. 이곳도 요리사가 갑자기 관둔 탓에 급하게 주방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으니 운이 좋았다. ‘BAB’ 큰 글씨가 적힌 문이 열리고 딸랑- 기분 좋은 종소리가 울린다. 오픈 시간 맞춰 온 손님은 칭따오씨에게 인사 건네며 착석한다. “Miso, comment est Le bulgogi aujourd'hui? La qualité de la viande est bonne.” (미소씨 오늘은 불고기 어때요? 고기 상태가 좋아요) 서툰 프랑스어 실력으로 묻는다. 미소씨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여 불고기를 주문했다. 미소씨는 칭따오씨가 오기 전부터 ‘BAB’ 단골이다. 잠시 후, 참깨가 뿌려진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냄새가 올라온다. 미소씨는 상추 위에 불고기를 올리고 밥을 크게 한 숟갈 떠 올린다. 입안이 가득 차게 욱여넣은 채, 칭따오씨에게 웅얼대며 말한다. 발음이 뭉개져 알아들을 수 없지만, 열심히도 저작 운동을 마친 미소씨는 칭따오씨에게 오늘 저녁 약속이 있느냐고 묻는다. “이번에는 제가 요리해 드릴게요”


따뜻한 조명이 비추는 작은 주방. 프라이팬에 알맞게 익힌 불고기와 김치찌개 거품을 걷어내고 있는 미소씨가 보인다. 식탁 위엔 탑처럼 쌓인 김밥, 서빙 포크가 꽂혀 있는 잡채가 있다. 칭따오씨는 샴페인을 하나 사 들고서 미소씨 집 앞에 도착한다. 초인종이 울리자 미소씨는 앞치마를 두른 채 서둘러 나갔다. 오는 길은 어렵지 않았냐며 샴페인을 받아들고 감사를 표한다. 매일 손님을 맞이하는 입장인 칭따오씨는 손님이 되어보니 복합적인 감정이 비빔밥처럼 섞인다. 묘한 감정에 명쾌한 답이 나오지도 않을 때, 차려진 음식을 보고 눈이 커진다. 미소씨는 어서 앉아 먹어보라며 겉옷을 뺏어 걸어둔다. 이내 자리에 앉은 칭따오씨 앞에 팔팔 끓고 있는 뚝배기 김치찌개를 내려놓는다. 식사를 시작한 칭따오씨는 맛에 놀라, 오늘 아침 미소씨에게 내놓은 불고기가 부끄러워졌다. 그때 미소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Puis-je vous apprendre à cuisiner ?” (제가 요리를 알려드려도 될까요?)


미소씨가 유일하게 고향의 맛을 느꼈던 한인 식당이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점심시간에 찾아갔는데 이게 웬걸. 바로 어제 먹었던 김치찌개와 딴 판인 찌개가 나왔다. 엉망인 맛은 아니지만 미소씨의 입맛에는 퍽 부족한 실력이었다. 아쉬운 식사를 마친 미소씨가 계산하며 주방을 내다보니 셰프가 바뀌어 있었다. 그 이후 멀리 있는 한인 식당까지 찾아봤지만, 만족을 주진 못했다. 아쉬운 대로 다시 ‘BAB’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인상 좋은 칭따오씨와 친해지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묻는 미소씨에게 ‘부끄럽지만 그래도 된다면 부탁드리겠다’고 답한다.


그날 저녁 이후 그들은 퇴근 후 매주 3일씩, 문 닫은 식당 주방이나 미소씨 집에서 한식을 한가지씩 가르치고 배워갔다. 수업한 지 두 달이 됐고 꽤 친해진 둘은 퇴근 후 일상이 되었다. 실력이 는 만큼 손님도 늘었고 그만큼 칭따오씨 월급도 인상됐다. 변한 건 요리 실력과 월급뿐이 아니었다. 퇴근 후 미소씨가 기다려졌고, 완성된 요리보다 마주 앉아, 완성된 요리를 맛본 미소씨의 웃음이 좋았다. 칭따오씨는 미소씨를 만나고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거 같았다. 그날도 요리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칭따오씨는 설레는 마음으로 식당 마감을 하고 미소씨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어두운 조명 속, 더 어두운 미소씨의 얼굴이 보였다. 거두절미하고 미소씨는 ‘직장에서 부당 해고를 당했다’고 했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어 버렸다. 퉁퉁 부은 눈에 화장이 다 지워진 얼굴에 칭따오씨는 마음이 안좋았다. 오늘은 수업 대신 미소씨에게 저녁을 차려주었다. 칭따오씨는 본인도 외국인인지라, 도움은 주지 못하고 고작 밥 한 끼 차려줄 수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미소씨는 저녁을 먹고 양해를 구한 뒤 집으로 곧장 갔다. 미소씨는 당장에 내야 할 월세나 공과금을 어떻게 해결할지 머리가 아팠다. 며칠의 공백만으로도 타격이 커서 당장 직장을 구해야 했다. 미소씨는 며칠 전 칭따오씨와 대화 중, 칭따오씨가 받게 된 급여 액수를 떠올린다.

 

[Le dernier plat est Le bulgogi porcin. Préparez seulement 400 grammes de porc !] (마지막 요리는 돼지 불고기예요. 돼지고기만 400g 준비해주세요!)

마지막 요리와 필요한 재료를 텍스트로 보내 둔 미소씨는 마지막 날이니만큼 레드 와인도 한 병 챙긴다. 주방 불만 켜진 ‘BAB’ 매장 안, 칭따오씨가 재료를 준비하며 미소씨를 기다린다. 문이 열리고 밝은 표정의 미소씨가 들어온다. 밝은 미소씨를 본 칭따오씨는 한시름 놓지만 동시에 애잔한 마음이 든다. 미소씨는 평소와 다름없었고 칭따오씨는 열심히 메모해가며 함께 요리를 완성해냈다. 미소씨는 바싹 볶아진 돼지 불고기를 넓고 오목한 그릇에 보기 좋게 담아주고 그 옆에 파채를 동그랗게 모아 놓는다. 칭따오씨가 사진 찍으려 휴대폰을 들자 미소씨는 잠시만 기다려보라 하고는 주방 밖으로 나가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go t de feu” ‘불 맛’ 이게 비밀 치트키라며 칭따오씨 손에 토치를 쥐여준다. 그때 앞치마 속에서 미소씨의 휴대폰이 울려댔다. “Excusez-moi.” ‘실례합니다’ 칭따오씨에게 빠르게 조작법을 알려주고 마무리를 맡긴다. 울려대는 핸드폰을 들고 식당 밖으로 나온 미소씨가 설정해둔 타이머 알림을 끈다. 단 몇 초의 정적 뒤, 식당 안에서 큰 폭발음이 들린다.


새하얀 천장과 벽돌, 누워있는 칭따오씨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내리까니 하얀 환자복과 하얀 깁스를 두른 팔 한쪽이 보인다. 그 옆에 엎드려 자고 있던 미소씨가 잠에서 깨어 칭따오씨를 본다. 미소씨는 다급하게 간호사를 호출하고 칭따오씨에게 정신이 드는지 재차 물었다. 들어 온 간호사는 몸을 일으키려는 칭따오씨를 제지했고 곧 의사도 자리했다. 의사는 안타까운 표정과 달리 무던한 목소리로 설명한다. 의학용어 남발한 설명이 이어졌고, 결론은 ‘왼쪽은 2도 화상에 그쳤지만, 오른쪽은 불가피했다.’ ‘그나마 운 좋게 손목까지는 있으니 의수를 맞추면 된다’ 였다. 칭따오씨는 고개를 떨군다. “손이 잘렸으니 일도 잘리겠죠?” 미소씨는 대답 없이 그를 세게 안아 토닥였다.


미소씨는 병원을 나와 ‘BAB’으로 향한다. 식당은 화재 경위 조사를 위해 게이트 쳐 있었다. 미소씨는 사장에게 다가가 안타까움을 표하며 칭따오씨의 상태와 사고 당시 전후 상황을 설명했다. 사장이 한숨을 쉬며 담배를 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폭발 범위가 넓지 않답니다. 주방 기구 교체하고 정리하면 바로 재오픈 할 겁니다.” 사장은 까맣게 타버린 주방을 보며 연신 연기를 뿜는다. 그때 미소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Puis-je cuisiner les plats ?” (제가 요리를 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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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씨가 다녀간 후, 폭발사고 경위 조사 결과가 나왔고, 칼로 찢긴 가스 배관 선에서 새어 나온 가스 누출이 원인이었다. 사장은 곧바로 미소씨를 떠올렸지만, 동시에 하루하루의 매출이 중요할 때라는 사실도 떠올린다. 사장은 관리 부주의 단순 사고로 무마시킨다. 안쪽 주머니를 뒤적여 미소씨 번호가 적힌 쪽지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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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식당‘BAB’의 저녁 시간, 예약된 테이블에 의자를 빼 앉아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어색한 듯 기다리는 칭따오씨. 그 앞에 한 상 가득 정갈하게 차려진 쟁반이 놓인다. 작은 찬기에 갖가지 반찬이 담겨 있고 갈비찜과 하얀 쌀밥에서 김이 따끈하게 올라온다. 앞에 앉은 미소씨는 의수가 아직 불편한 듯한 칭따오씨 밥그릇에 갈빗살을 발라 올려 준다. 오늘도 미소씨는 사려 깊고 다정하며 오늘도 칭따오씨는 본인 신세와 잘려 나간 손이 원망스럽다. 그때 앞치마 속에서 미소씨의 휴대폰이 울려댔다. “Excusez-moi.”(실례합니다) 칭따오씨 밥그릇에 발라 둔 갈빗살을 더 올려 주고는 울려대는 핸드폰을 들고 식당 밖으로 나온다.


“Allô”(여보세요)

미소씨가 전화를 받고 수화기 너머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수줍씨 잘 지내? 아, 미소씨라 불러야하나?”


 




倾倒 [qīngdǎo]
1. 넘어지다, 무너지다 2. 탄복하다, 매혹되다 3. 경모하다, 흠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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