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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외의 Jan 10. 2022

수줍씨

part 1



남자 정보와 사진 그리고 장소 일시가 적힌 쪽지를 내려둔다. 수줍씨는 거울 앞에서 작은 진주 귀걸이를 하고 칼이 든 핸드백을 챙겨 나간다. 호텔에 도착해 맞선 장소인 라운지 카페로 갔지만 사진 속 남성은 보이지 않는다. 커피를 시켜둔 지 한참 지나서야 누군가 수줍씨 앞에 선다. 그는 ‘미팅이 길어졌다’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고, 수줍씨는 괜찮다며 미소 지어 보였다. ‘죽는 날까지 열심히 일만 하다 가는구나!’ 안쓰럽기까지 했다. 둘 사이엔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짐작했지만, 그는 경쟁 업체에서 청부 살인을 의뢰할 만큼 꽤 잘나가는 기업 자산가였다. “사실…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여성분은 처음입니다”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한다. 수줍씨는 그 말을 듣고 욕심이 생긴다. ‘운이 좋네?’ 죽을 날이 미뤄진 그에게 미소 지어준다.


뜻대로 그는 수줍씨에게 푹 빠졌고, 위독한 어머니 탓에 하루라도 빨리 식을 올리고 싶어 했다. 수줍씨는 그에게 허례허식은 싫다며 ‘결혼식은 생략하고 제주도에서 소박하게 식을 올리자’고 한다. 여권 위조도 번거로울뿐더러 의뢰인에게 더는 시간 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혼인 절차를 잘도 혼자서 준비했다. ‘사업가 맞긴 하네’ 생각하던 수줍씨에게 그가 제주도 비행기 티켓 두 장을 꺼내 보이며 웃는다.


제주도에서 도착한 곳은 그의 친구가 소유한 별장이었다. 수줍씨가 ‘호텔은 보는 눈이 많으니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한다. 낯선 곳이라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수줍씨는 베테랑이었다. 그에게 멍석만 깔아주면 알아서 구색을 갖춰 놓으니 고맙기까지 했다. 지금도 그는 별장 밖 정원에서 사투를 벌이며 초를 켜고 있다. 일만 하느라 LED 촛불 따위는 모르는 모양이다. 한참 지나서야 그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수줍씨를 불러냈다. 수줍씨는 잠에서 깬 척하며 밖으로 나간다. 표정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며 그가 만들어 놓은 촛불길을 따라 걷는다. 무릎까지 꿇고 ‘당신은 나의 빛’이라며 반지를 끼워주는 그의 꼴에 웃음이 난다. 반지까지 얻어 냈고, 시간 끌 필요가 없었다. 수줍씨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떠올리며 그에게 차 안에 있는지 찾아봐 달라고 한다. 차는 언덕 아래 주차돼 있었고,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수줍씨에겐 충분했다.


수줍씨가 바비큐 그릴 옆에 세워진 기름통을 마당부터 집 안까지 뿌린다. 그리고 그쪽으로 불붙은 초 하나를 던졌다. 불길이 집 안까지 퍼지는 시간은 단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수줍씨는 구석에 몸을 숨기고 활활 타오르는 광경을 구경한다. 뒤늦게 저 멀리서 뛰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에이… 빨리 왔어야지. 이미 죽었겠네, 쯧.” 마땅찮다는 듯 읊조리며 그의 행동을 기대해본다. 그는 기대에 부응하듯 코와 입을 막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치 ‘불나방’ 같은 그의 모습을 본 수줍씨는 박수를 치며 구석에서 나온다. 수줍씨는 구조물까지 무너지고 있는 집을 배경삼아 엄지손가락 치켜들며 활짝 웃는다. 찍은 사진과 함께 [정리 부탁] 문자 한 통 보내고 자리를 뜬다.


반지는 생각보다 고가였고 비싼 값에 팔렸다. 돈다발을 소중하게 안고 냄새를 깊게 마신다. 그의 사랑이 풍겨와 수줍씨는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절절한 사랑이 느껴지는 돈으로 수줍씨는 긴 여행을 갈 참이다. ‘파리를 갈까, 조용한 남부지방으로 갈까?’ 고민하던 중, 핸드폰이 울린다. 여행 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 건만 처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여행 가서 맘껏 쓰고 놀아야 하지 않겠어?” 가당치도 않았지만, 이번 건은 금액이 꽤 크다고 한다. 수줍씨는 일부러 한숨을 크게 내쉰다. “쪽지 보내세요.” 항공권 예매 창이 켜져 있는 노트북을 닫고서 자리를 뜬다.



Copyright: Stephen Beadles,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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