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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i generis Jun 18. 2022

아침부터 커피를 쏟았다

여러분 모두 오늘 하루도 안녕히

아침부터 커피를 쏟았다. 그렇게 나의 하루 루틴이 망가졌다.



골방에서 논문이나 쓰는 학생인지라 나의 하루 일과는 매우 단순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화장실로 향한다.

필요한 일을 보고 사워를 마친 후, 탈모관리를 위해 약을 뿌려댄다. 내 모발은 소중하니까.

뿌린 약이 두피 속으로 잘 스며들어야 하니까 그 사이에 양치질을 한다.

그리고 모발만큼 소중한 내 피부를 위해 전신에 로션을 발라대고, 얼굴엔 종류별로 화장품을 치덕 거리기 시작한다: 알로에 젤 - 스킨 - 로션 - 수분크림 - 영양크림.

왠지 종류별로 얼굴이 잘 먹은 느낌이 들면, 면도를 시작한다.

면도를 마칠 때쯤엔 두피에 뿌려두었던 약이 왠지 또 잘 스며든 느낌이다.

이때다 싶을 때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다. '소중한 내 모발들아 건강해야 해' 하며 에센스 오일도 발라준다.



그렇게 조금 사람처럼 생겨먹었다 싶으면, 방 청소를 시작한다.

우선 샤워실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줍고, 세면대와 바닥 물걸레질로 얼룩들을 닦아낸다.

그리고 나와 침구 정리를 하고, 또 침구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줍는다.

침구 정리를 마치면 바닥 청소를 시작한다.

하루를 묵혀놨던 먼지들이 말끔히 닦이는 걸 보면 상쾌해진다.



이제 커피를 내릴 시간이다.

돌체구스토도 있고, 네스프레소도 있다. 

오늘은 어떤 커피를 마실까 잠시 허세를 부려본다.

그렇게 고른 커피가 담긴 잔을 들고 책상으로 향한다.

오늘은 또 어떤 파트를 쪼개서 한 단락이라도 써야 할지 계획을 세운다.

한바탕 루틴을 마치고 나서 흐른 대략 40-50분의 시간이 아쉬워 '오늘도 열심히 할 거다'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해가 지면 운동하러 가기 전까지 나는 쭉 책상에 앉아있다.



이런 나의 하루 시작이 오늘은 커피를 쏟으며 망가졌다.

책상이며, 방바닥이며 다시 물걸레질이 시작되었다.

새로 꺼내 입은 티셔츠며 바지도 다시 세탁기 안으로 향한다.

갑자기 서러워졌다.

엄마가 보고 싶다. 아부지도 보고 싶다. 응... 동생 너도...

세상 하나밖에 없는 나의 사랑스러운 조카도 보고 싶다.

얼마 전 삼촌이 다시 먼길을 떠날 때 조카가 옷깃에 넣어주었던 사진을 꺼내본다.

서러움이 극에 달한다.



커피 한잔 쏟았을 뿐인데, 또 나의 정신은 서러운 유학생 신세한탄으로 이어진다.

이 순간엔, '하고 싶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지는 않는 유학 생활, 배부른 소리 말고 열심히 하자'는 다짐도 소용없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가 여기서 8년째 이러고 있나..."


다시 커피를 내렸다.

서러움이 진정되니, 공부가 하기 싫어졌다.

그래서 브런치를 열고 이렇게 일기 아닌 척 글을 써본다.


참 이래저래 쉽지 않은 삶이다.

커피 한잔 쏟은 것도 가끔 이렇게 무겁게 다가온다.

삶은 그렇게 인과율에 따라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인간은 기계적으로 설명되지도 않는가 보다.

나에게, 삶이 때로는 같은 일상이 반복돼서 지루하고, 때로는 예측 불가능해서 어렵다.


닦아내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커피 향이 오늘 나의 계획엔 없었지만, 또 그런 삶을 오늘 하루 살아야겠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그런 지루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삶을 살고 계실 모든 분들께, 오늘 하루도 잘 살아가시라고 안부 인사를 보낸다.

커피를 쏟으며 하루를 시작한 나에게도 누군가 마음속으로 그런 안부 인사를 전해 주실 것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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