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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이후 우리 사회는? (I) - 펨코와 우리

Feat. 정체성 정치, 감정 설계, 인정의 제도화, 그리고 이준석

by Sui generis

# 21대 대선 이후, 나는 우리의 좋은 삶을 위한 조건들 중 하나로써 '사회 통합'에 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사회 통합'으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포괄적으로 좌파 헤겔적 접근 속에서, 사회 내부의 모순과 분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규범적 총체성 또는 상호 인정의 가능성을 우리 사회의 조건 속에 적용해 보려는 시도이다. 다시 말해, 나는 사회 통합을, 다양한 주체들이 상호 인정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권리를 사회적으로 - 혹은 공동체적으로 - 승인받으며, 공통의 규범적 질서 안에서 공존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협상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 첫 번째 시도로써, 이 글은 '정체성 정치'에 관해 다룬다 #




I. 들어가며

한국 사회의 주요한 정치-사회적 갈등은 체제 안정성을 위한 이념적 분열 (냉전적 보수-진보 구도)을 기반으로 경제 성장과 분배 주변에서 발생해 왔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민주주의 제도의 점진적 안정화, 그리고 경제적 번영을 따라, 세대 간 가치 분화, 젠더 이슈와 같은 개인의 정체성 문제가 새로운 긴장의 축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갈등은 더 이상 '이념 대립'이나 '성장과 분배'라는 전통적 틀 속에서 포착되지 않고, 그보다 '자기 정체성의 사회적 승인'을 둘러싼 문제들과 깊이 관련된다.

새로운 정부가 지난 윤석열 정부의 계엄령과 관련된 문제들을 해소해야 할 과업을 떠안고 있는 것처럼, 이념적 잔재는 여전히 한국 정치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성장 담론 역시 앞으로도 우리 정치-사회에서 주요한 의제로써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와 별개로, 나는 이번 21대 대선을 계기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관련된 이슈들이 한국 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정치-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간 지속되어 온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 소수자 공동체, 고령 빈곤층, 장애인 권리, 다문화, 탈북민 등 이들 주변에서 발생한 목소리들의 점진적 정치화를 따라, 이번 대선에서 좀 더 또렷해진 또 다른 정치적 주체들을 떠올려보자. '이준석 팬덤', '펨코 정갤', 혹은 '이대남'등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비국가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화'의 등장을 알린 그 주체들 말이다.

21대 대선 결과 속, 이들의 약 8% 남짓의 비율은, 양당 정치에 대한 거부감 표출과 혼재되어 있긴 해도, 나는 이들이 기성 정치-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던, 혹은 특정 집단이 선점하고 있던 이슈들을 이제 다른 방향에서 본격적으로 겨누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공선' 혹은 '공적 담론'보다는 '무시'의 감각과 더 가까이 있는 이들의 요구들. 그간 언론이나 학자들은 이 집단을 주로 '젊은 남성들의 극우화', 혹은 '반페미니즘의 세력화' 정도로 규정해 왔다. 나는 이 규정이 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화들을 구조화하는 '잘못 설정된 틀', 혹은 조금 약하게, '불충분한 틀'이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나는 그 이면에 자리한 감정, 경험, 그리고 배경을 토대로, 이들을 '왜곡된 갈등의 결과'가 아닌 '표현되지 못한, 혹은 인정받지 못한 정체성의 분출'로써 '정체성 정치의 틀' 속에서 평가하고 싶다. 정체성 정치의 틀이 이들과의 접속 가능성, 나아가 사회 통합의 가능성을 위해 '극우화'나 '반페미니즘의 세력화'라는 틀 보다 더 유망하게 작동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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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서구 사회 속 정체성 정치의 계보

먼저, 우리보다 '정체성 정치'가 먼저 논의되기 시작했던 서구 사회 속 관련된 전통을 간략히 살펴보자.

큰 맥락에서, 서구 사회의 정체성 정치의 역사는 세 단계로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1960-70년대, 흑인 인권 운동, 여성 운동, 성소수자 운동과 같은 해방의 흐름은 새로운 주체 등장의 신호탄이었다. 특히 1977년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발표한 "Combahee River Collective Statement"에서 명시적으로 등장한 'identity politics'라는 용어는 기존 정치-사회 담론 어디에서도 포착되지 않았던 이들의 '억압(oppression)', '비가시성(invisibility)', 그리고 '비규정성(Indeterminacy)'을 공론장으로 끌어올린 선언이었다 ("Combahee River Collective Statement"에 관해 다음을 참조하라: https://americanstudies.yale.edu/sites/default/files/files/Keyword%20Coalition_Readings.pdf)

1980-9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들이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보편주의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차이와 다양성이라는 특수성에 초점을 맞췄던 아이리스 M. 영(Iris M. Young), 반복적 수행성으로써 성 정체성의 구성적 성격을 분석한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성별, 인종, 계급 등 억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정체성 형성에 주목했던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 헤겔의 인정 개념을 인정의 정치 영역에서 재해석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그리고 정체성 정치의 사회-경제적 균형에 주목하고자 했던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등은 이 영역에서 탁월한 성취를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과 재구성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정체성 정치의 자기애적 쾌락화를 비판했던 슬라보예 지젝 (Slavoj Žižek), (정체성 정치 일반에 대한 비판은 아니지만) 기존 질서 안에서 재현된 정체성 정치가 치안적 질서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함축적으로 지적한 자크 랑시에르 (Jacques Rancière), 흑인 정체성 정치의 기형적인 자기 재생산을 비판했던 케네스 워렌 (Kenneth W. Warren), 정체성 정치가 공화주의적 시민 의식을 약화시키고, 민주주의를 분열주의로 이끈다고 지적했던 마크 릴라(Mark Lilla), 정체성에 기반한 인정 요구가 민족주의나 배타주의로 전이될 수 있음을 경고했던 프란시스 후쿠야마 (Francis Fukuyama), 사회적 연대와 통합의 가능성에 반작용으로써 정체성 정치의 맹점을 짚어낸 아미타이 에치오니 (Amitai Etzioni), 정당한 인정 요구와 그렇지 않은 인정 주장을 제도화된 규범적 질서 (혹은 인정 원리의 제도화) 속에서 정교화하고자 했던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그리고 정체성과 관련된 감정들을 시민적 덕성과 공적 감정 문화 속에서 윤리화를 시도했던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등이 이 흐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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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한국 내 정체성 정치의 현주소, 그리고 과제는?

이러한 정체성 정치에 관한 서구 사회의 발전적 과정을 참조하여, 한국 사회에서 정체성 정치를 둘러싼 논의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지점에서 지체되어 있는지를 가늠해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에 관한 평가는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면서, 나는 우리 사회의 정체성 정치 담론들이 대체로 1980~90년대 서구 학계의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고, 이후 비판적 재구성의 흐름은 비교적 덜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정체성을 둘러싼 주장들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예를 들어, 누스바움이 강조한 것처럼, 이 주장 속에 '감정의 시민화'가 빠져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 누스바움의 주장과 관련하여, 다음을 참조하라: Martha C. Nussbaum, Political Emotions: Why Love Matters For Justice,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13. 특히 다음 구절은 '감정의 시민화'에 관한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Since emotions, in my view, are not just impulses, but contain appraisals that have an evaluative content, it will be a challenge to make sure that the content of the endorsed emotions is not that of one particular comprehensive doctrine, as opposed to others. My solution to this problem is to imagine ways in which emotions can support the basic principles of the political culture of an aspiring yet imperfect society, an area of life in which it can be hoped that all citizens overlap, if they endorse basic norms of equal respect: the area of what Rawls has called the 'overlapping consensus'... The idea will be to think this way across the range of the 'capabilities' that provide the core of the political conception: How can a public culture of emotion reinforce attachment to all of those norms?" Ibid., 6.

번역: "내가 보기에, 감정이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평가적 내용을 지닌 인지적 평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승인된 감정의 내용이 특정한 포괄적 교리의 것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은, 감정이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정의를 지향하는 사회의 정치 문화가 지닌 기본 원리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방식들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 이는 모든 시민들이 동등한 존중이라는 기본 규범을 지지한다면, 서로 중첩된다고 기대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이다: 롤스가 '중첩적 합의'라고 명명했던 그 영역 말이다... 나의 구상은 이러한 방식으로, 정치적 개념의 핵심을 제공하는 '역량들' 전반을 사고해 보는 것이다: 감정의 공적 문화가 이러한 모든 규범들에 대한 (시민들의) 애착을 어떻게 강화할 수 있을까?"


물론 1980~90년대 억압과 차별에 관한 서구 이론가들의 논의는 급진적 사고의 토대를 제공하고 이론화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이후 서구 사회 내부에서 진행된 이 영역의 비판적 재구성이 - 예를 들어, 정체성의 경계 해체, 교차성 이론의 제도화, 정체성 정치의 상품화 비판 등등 - 국내 관련된 담론이나 실천에서 충분히 반영되어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급진적 사회 운동이 - 특히 페미니즘 - 여전히 겪고 있는 문제들을 떠올려보라.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정체성 정치에 관한 재구성적 접근의 상대적 무관심이나 부재 때문은 아닌가? 이와 관련하여 언급해 볼 만한 지점들이 많지만, 가능한 단순화 해 보면, 이 사회 운동들 속 주체들은 자신의 특수성(particularity)을 사회의 보편성(universality)으로 통합시키는데 지속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자신들의 주장을 더욱 급진적이고 극단적이게 보이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사회 통합과 더욱 멀어지는 길을 향해 가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러한 운동들을 완전히 배척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사회 운동들이 지향하는 목표를 대변하는 정당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이들의 목소리가 아직 완전한 제도화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정책들도 점차 발전해 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과정에서 새로운 '무시'의 감정이 움트기 시작했고, 이 감정은 다른 지점에서 한 데 모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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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펨코, 그리고 이준석

재차, '이준석 팬덤', '펨코 정갤', 혹은 '이대남'이든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이들은 이번 대선을 통해 일정 부분 세력화에 성공한 모양새다. 상당수 시민들은 이들의 극단적 주장, 정제되지 않은 자극적인 언어 사용, 그리고 이를 동반한 극우화를 지적한다. 이 지적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해석이 사회 통합의 관점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선 누스바움의 구절을 다시 참조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과 함께 논의를 이어가 보자: "이 집단적 행위는 단순한 기존 질서에서의 이탈이나 개인적 일탈이 아닌, 공적 문화에 편입되지 못한 주체들의 정서적 호소로 이해될 가능성은 없는가?"

누스바움이 지적한 것처럼, 이들의 혐오나 조롱의 언어를 동반한 행위는 각자의 정체성을 공적으로 승인받지 못했거나, 좀 더 심한 경우, 모멸감, 무시, 수치심 등의 감정이 반영된 결과일 수 있다. 혹은,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인정 이론을 참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사회적 자긍심(social esteem)에 대한 인정이 부재한 집단으로서, 각자의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사적 자율성, 혹은 자기실현의 제약을 모욕감(humiliation)과 함께 경험한다. 이는 사회적 고립감이나 왜곡된 형태의 자기 동일성 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호네트의 인정 이론에 관해서는 Axel Honneth, The Struggle for Recognition: The Moral Grammar of Social Conflict, The MIT Press: Cambridge, 1995를 참조하라). 이 집단의 몇몇 극단적 주장을 근거로 이들을 우경화의 틀 속에서 이해하기보다, 무시, 불의, 모욕 등의 감정의 관점에서, 즉 정체성 정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는 사회 통합과 관련하여 어떤 외관을 그릴 수 있을까? 여기서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일은 또 다른 긴 논의를 요구한다. 그 보다, 나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한 가지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이번 대선을 통해 일정 부분 정치적 세력화를 이룬 이 주체들을 지금까지 그래왔던 방식으로 우리의 공적 논의에서 배제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이들의 감정이 향하고 있는 (이들에게 왜곡되어 보일 수 있는) 사회 질서와 이 질서의 지속적인 재생산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을 간과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대선 결과가 보여주는 것처럼, 앞으로 이 집단의 정체성 정치가 지속되는 한 , 우리는 더 이상 이들을 '극우화된 한 줌'들로 남겨둘 수 없을 것이다. 해소되지 않은 이들의 감정이 향할 곳은 결국 어디일까? 지금처럼,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정당의 수직적 의사소통 구조와 함께, 이들은 더욱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에서 정체성과 관련된 목소리 높이게 될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이제 집권당이 된 민주당과 상당수 지지자들은 여전히 이들을 '극우 프레임'에 가두고 있다는 것이다. 정체성 정치의 관점에서, '극우 세력을 척결하자'는 구호만으로 이들의 정서적 반작용을 충분히 다룰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물론 해방을 위해 (헤겔적인 호네트 용어로) '인정 투쟁'을 벌이는 이 새로운 주체들은, 좀 더 세심한 방식에서 누스바움을 따라, 앞서 언급했던 '감정의 시민화', 즉 자신들의 공적 감정 설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사회 속 공적 담론의 파트너가 되고자 한다면, 이들은 스스로 '펨코인'임을 밝히길 주저하게 하는 자신들의 비문명적인 언어 사용을 철저히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만이, 이들은 자신들의 인정을 위한 요구들을, 호네트의 주장처럼, 타자 속에서 실현되는 자유의 경험을 통해 우리 일상 속에 제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Axel Honneth, Freedom's Right: The Social Foundations of Democratic Life,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2014를 참조하라). 다시 말해서, 이 새로운 주체들은 기존의 급진적 사회 운동들이 겪는 주요한 문제, 즉 자신의 특수성(particularity)을 사회의 보편성(universality)으로 통합하는 방식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이들을 대변하고 있는 정치인 이준석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면서 이 섹션을 마무리하겠다. 이번 대선 이후, 그는 여러 이유들로 상당한 곤경에 처할 것으로 보인다. 그를 향한 개인적인 평가는 뒤로하고, 다시 한번 우리 사회 통합의 관점에서, 향후 이준석의 입지는 (그를 둘러싼 법적, 정치적 의혹들이 말끔히 해소된다는 전제 하에) 자신이 대변하고자 했던 이들의 감정을 공적으로 설계하고 제도화할 수 있는 그의 역량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정치적으로 영악하게 이들을 대표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는 혐의를 얼마나 떨쳐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가 펨코 정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언어 선택과 사용을 지속한다면, 정체성 정치로써 이들의 대변자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의구심이 제기될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정치인으로서 공적 담론의 적절한 모양새에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진심으로 이들의 무시, 불의, 모욕 등의 감정에 귀 기울이길 바란다. 그럴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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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Concluding Remarks

이번 대선을 계기로 다른 축에서 새롭게 부상한 정체성 정치의 주체들을 단지 ‘극우’나 ‘반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에 가두는 것은 이들의 감정과 정체성이 호소하고 있는 지점을 애초에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보다, 이들을 지금껏 공적 감정의 구조 속에 편입되지 못했던 존재들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아직 충분히 조직화되지 않은 ‘인정의 정치’의 빈자리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고, 아마도 앞으로도, 나는 진정한 사회 통합이 모든 주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고자 할 권리, 그리고 이와 동일한 타인의 권리가 조화를 이루는 '민주적인 윤리적 삶' 속에서 가능하리라 믿는다. 이 상상력은 단순히 제도적 뒷받침이나 보완 만으로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 속 새로운 공적 감정 설계를 가능케 하는 정치적·문화적 기획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간 익숙했던 극우화나 반페미니즘과 같은 틀 밖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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