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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가하는사람 May 20. 2024

요가 강사가 된 이유 2

강사 이전의 삶, 자유를 찾아서

세 번의 수능 끝에 영화과에 입학했습니다. 영화과를 가기 위해서 수능을 세 번 본 것도 아니고, 영화감독이 너무 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첫 수능 때는 성적에 맞춰 철학과/호텔경영학과를 지원했고 7차 추가 모집 끝에 합격했지만 마음에 안 들었고, 두 번째 수능 때는 성적은 그대로면서 재수한 김에 더 좋은 학교를 가고 싶어 상향 지원했다가 모든 대학교에서 떨어졌습니다. 제가 살던 지역의 그 시기에는 중학교 성적에 따라갈 수 있는 고등학교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공부 잘하는 고등학교로 저는 진학을 했고, 대학에 진학 못하면 인생의 패배자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전 지역적인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이라고 왠지 말하고 싶습니다. 교복을 입고 택시만 타도 기사님이 택시가 아니라 비행기를 태워주는 동네였으니까요.


두 번의 대학 진학 실패로 저는 문자 그대로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친구들이 숙제를 과제라고 하는 것도, 선생님을 교수님이라고 하는 것도, 들어본 적도 없는 술 게임 얘기도, 전부 자랑하는 것 같아서 듣기 싫었습니다. 네이트온인지, 드림위즈지니인지, 버디버디였는지(놀랍게도 스마트폰 보급화 전이라 카카오톡은 없었습니다) 친구 목록에 있는 모든 친구들을 차단하고 집에서 스타그래프트만 했습니다. 답답하면 자전거를 탔습니다. 자전거, 스타그래프트, 라면, 계란고추장밥. 그 시기에는 제게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책상과 이부자리 누일 자리만 간신히 있는 고시원 같은 작은 방에서 저는 갇혀 살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엄마는 잔소리 한 번을 안 했습니다. 했을 수도 있는데 기억에는 안 남아 있습니다. 샤라웃 투 마마. 저였으면 방문을 없애버렸을 거예요.


그렇게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던 날에, 삼수 중이던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은인이죠. 산속에 있는 고시원에 이번 달부터 들어갈 거라고, 같이 들어가서 공부하자고 저를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그때에도 여전히 대학을 못 가면 패배자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에, 슬슬 히키코모리 생활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다만, 몇 달 놓아버린 공부를 다시 붙잡을 용기가 없어 모른 체하고 있었습니다. 친구의 격려와 설득 덕분에 저는 산속 고시원, 이름하야 금동 고시원으로 출가했습니다. 수능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공부가 잘 됐습니다. 식당엔 정당한 식비를 지급했어도 말라비틀어진 나물만 나왔지만, 쏟아지는 별들 아래의 밤들, 생전 처음 본 반딧불이 떼, 이불처럼 덮이는 천년수 은행나무 낙엽. 좋은 기억들로 가득합니다.


그렇게 수험 생활이 끝났고, 받아 든 성적표는 ‘뭐, 이 정도면 선방했다’ 수준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때는 스스로 공부를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가장 안 할 수 있는 학과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 고민 끝에 고른 게 연극과와 영화과였습니다. 연극과는 최초합격, 영화과는 추가 합격을 했고, 태어나서 연극은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영화는 주변 친구들보다 훨씬 많이 봤기에 영화과를 선택했습니다. 진학하고 보니 저보다 두 배, 세 배는 영화를 많이 본 사람들이 널렸었지만요.


이때가 저의 첫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경영학과의 입학 점수가 높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사람 구실 못하고 까불다가 2011년도에 입학한 학교를 2020년에 수료, 2021년에 최종 졸업했습니다. 석사 아니고 학사입니다.


언제나 눈치 보며 살았습니다. 집에서는 엄마에게 신경 쓰이지 않기 위해 발 앞꿈치로 걷는 게 익숙했고, 학교에선 밀린 급식비를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까 고민했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나만큼 나를 좋아할까 고민했고, 소풍날 버스 옆 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을까 걱정했고, 남들과 달라 보이고 싶은 동시에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힘들었고, 새로 생긴 음식점 들어가는 것도 무서웠고, 무엇보다 남들 앞에서 이런 내면의 요동을 숨기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여기서의 자유란 남의 시선에 나를 제한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주 옛날에 양동근 님이 토크쇼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봤습니다. 왜 그렇게 자유롭게 행동하냐는 핀잔 섞인 진행자의 질문에,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행동을 더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아포리즘처럼 마음에 담았습니다. 지금의 제가 자유로워 보인다면 그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속박되어 있는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입학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글과 영상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글을 읽는 것을 더 좋아했고, 글을 쓰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영화는 이야기의 한 갈래로써 도달한 취향일 뿐, 영화과에 즐비한 씨네필들처럼 제 마음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진 않았습니다.

소노 시온 감독의 <러브 익스포져>를 보기 전까진 말이죠. 모두에게 인생을 망친 영화가 있다고 친다면, 저의 경우는 이 영화입니다. 추천드리긴 어려운 영화입니다. 변태적이고 문제적입니다.


네 시간의 러닝 타임 동안, 손바닥 만한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손이 저린 것도 모르고, 저는 그저 이 시간이 제발 끝나지 않기를,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세상의 룰-윤리라든가, 도덕적 기준이라든가, 종교적 교리라든가, 관습이라든가, 법률이라든가-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해 버리는 그 모든 장면에서 저는 해방감을 느꼈고, 소노 시온이라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 자유를 외치고 있음을 느껴버렸습니다. 이런 걸 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이 날로부터 영화라는 매체가 "재밌다"고 여겨졌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졌습니다. 저도 소노 시온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네이버에서 300원에 팝니다. 적선 부탁드립니다.


부모님의 지원 덕분에 보통의 학생들보다 더 많은 작품을 찍을 수 있었지만, 망할 놈의 소노 시온 때문에 영화의 의미와 감독의 역할에 대해 오해를 해버린 저는, 9년의 학교 생활 동안 이렇다 할 성과는 내지 못했습니다. 아니, 실은 재능이 없었습니다. 아니, 실은 재능은 있었을 수도 있는데 나태했습니다. 스스로 노력했다고 할 만큼 만족스러운 순간이 없었습니다. 과정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그 마음 상태를 얻지 못했습니다. 노력이라곤 히키코모리 시절 스타그래프트할 때가 마지막인 기분이었습니다.


서른(진)이란 나이에 학교에서 나오며, 저는 제 손에 아무것도 쥐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낙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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