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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가하는사람 Jun 11. 2024

요가 강사가 된 이유 3

사회 부적응자의 사회 부적응기

장래 희망인 사무직 회사원인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 과학자, 우주비행사, 대통령 등의 직업을 실제로 가능하다며 꿈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장래 희망란에 제가 공무원이나 회사원을 적었다면 오히려 부모님은 저에게 실망했을 겁니다. 하지만 주변의 친구 아들딸들이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결혼을 하기도 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추어 가는 동안, 내 자식은 꿈을 좇는다며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며 내심 이제라도 공무원이나 회사원을 장래로 희망하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라고 썼지만 그럼에도 무한한 응원을 보내주셨다는 것을 사실 압니다.)


<라임크라임>이라는 독립 영화에서 조감독을 맡았습니다. 늘 보던 선후배들과 함께 작업하다 보니 그곳이 직장이었다는 걸 잊었지만, 어쨌든 저의 첫 직장이었습니다. 갑과 을로서 계약을 맺었고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했습니다. 영화가 준비되고 촬영이 되고 마무리되는 동안 여러 사건이 있었고, 그 작품이 끝난 뒤에 저는 영화에의 꿈을, 재능의 한계를 핑계 삼아 노력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지 못하며 포기해 버렸습니다.


수업에 교과서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선생님이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에 총도 없이 왔냐고. 저는 그 기분을 구직 활동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소위 말하는 “스펙”이랄 것도 없었고, 솔직히 스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몰랐습니다(지금도 잘 모름). 전선에 뛰어든 다른 이들이 최소 영어 점수라도 하나씩은 들고 있을 때, 제가 들고 있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수상 경력 없는 단편 영화 제작 경험과 일반인은 들어본 적도 없는 독립 영화의 조감독 경력, 그리고 경쟁자들보다 많은 나이밖에 없었습니다. 취업 준비라는 것을 해야 하는 걸까 고민도 해봤지만, 도대체 취업 “준비”라는 것이 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취업 준비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낚시하러 온 바닷가에 낚싯대 대신 괭이를 들고 선 기분이었습니다.


자기 객관화(라고 쓰고 자기혐오였던)가 잘 되어 있었기에 모두가 알 법한 대기업도, 은근 알짜인 중견 기업도 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괭이질은 해봤으니, 기초체력은 있겠군, 하고 봐줄 만한 소기업에 한 자리 있을까 싶어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영화 업계에, 그다음에는 영화사에, 그다음에는 영상 프로덕션에, 그다음에는 광고대행사에 그리고 그다음에는 어디든 좋으니 어쨌든 영상을 만드는 곳에 지원했습니다. 영상을 만들고 싶어서는 아니었고, 그나마 가진 재주가 그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제 작품을 위해서 필요한 만큼만 쌓은 영상 기술은 전문적으로 그것만 연구한 기술자들에 비해 보잘것없었고, 사실 제 장기는 영상 편집 같은 게 아니라 기획에 있었는데, 그때는 스스로의 가진 것 없음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를 살필 여유가 없었습니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이 고역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회사에 바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근로 노동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받는 돈만큼의 가치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는 게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선언이었습니다. 최저 임금보다는 높은 임금, 야근과 특근이 없는 주 40시간의 근무 시간. 제가 바라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이 시기의 저는 대단한 도전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대단한 실패를 겪은 것 같아 자존감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져 있었고, 앞으로의 인생에 희망이란 없을 것이며, 사회의 아주 작은 톱니바퀴라도 차지해서 최소한의 사람 구실은 하며, 영혼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위로나 응원은 고까웠고, 나만이 나를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자신을 위로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충격 실화. 최저 임금보다 높은 임금, 워라벨이 지켜지는 주 40시간 근무 환경은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때의 제 마음은 어떤 빛살도 거부하며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이거라도 해야지, 라며 지원했던 회사들에게도 연락을 받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고, 가까스로 면접이라도 보러 가면 연봉 2200과 함께 야근과 주말 출근을 일자리를 인질 삼아 은근히 강요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는 세상의 허들이 높게만 느껴졌고, 점점 허들을 오르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자기소개서에 이렇게 쓰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주제에 지원해서 죄송합니다.”


처음 들어간 회사는 편집 및 색보정 솔루션을 하는 회사였습니다. 희망 연봉을 묻는 대표님의 말에 노예처럼 주시는 대로 받겠다고 말해버렸습니다. 그러자 대표님은 호쾌하게 웃으며 우리는 그런 회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대신에 처음 일하는 거라 배울 게 많으니 몇 달간은 정규 근무가 끝나고 한 시간 동안 나머지 공부를 할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거둬주신 것에 감사해야 할 입장이니 당연히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면서 계약서는 보지 못했습니다.


구로디지털단지로 출근을 시작했고, 영문 매뉴얼을 하루 종일 보고 익히는 게 제 일단의 업무였습니다. 평생 읽은 영어 지문보다 많은 지문을 읽었고, 대표님의 감시하에 색보정 실로 들어가 나머지 실습을 했습니다. 20시가 다 되어서 회사에서 빠져나오는데, 보통의 퇴근 시간보다 늦은 시간임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퇴근을 위해 지하철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출근하고 퇴근하고. 앞으로의 삶에서 바랄 수 있는 것이라곤 없고, 그저 사회 구성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을 최소한의 역할만 주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또 결심했는데……


마지막이 될 퇴근길에, 미처 구로디지털단지역까지 도달하지도 못한 어느 길거리 위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건물 속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힘들지 않게 자신의 역할을 잘해 나가고 있는데, 어려움이 있더라도 각자의 방식대로 극복해 나갈 텐데, 현대 시민에게 지워진 의무를 큰 불만 없이 이행하고 있을 텐데, 왜 나만 이것이 이렇게 힘들까, 내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어디서부터의 선택이 잘못되었던 걸까, 어쩌면 나는 사회 부적응자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이 꼬리를 물며 울음은 거세졌고, 눈물 범벅인 모습이 초라하고 창피해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당장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사회 부적응자의 증거인 거 같아서 또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마음에 남아 있는 욕망이 저를 쿡쿡 찔렀습니다. 그런 식으로 시작된 겁니다. 너 톱니바퀴 되고 싶지 않잖아. 포기한 척하는 거잖아. 아직 바라는 거 많잖아. 희망이 무서운 거잖아. 이것도 거짓말이잖아. 도망치는 거잖아. 도망치는 것에서도 또 도망가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욕망을 쓰레기통에 토해버렸습니다. 혓바닥 끝에 끈질기게 늘어진 욕망에서 더러운 냄새가 났습니다.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무단결근을 했고, 사회부적응 1등급 낙인을 제 몸에 찍으며 비로소 완전한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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