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요코와 나

누드비치에 가는 법(2-1)

요코와 나 6




- 내일은 꼭 바다에 가자!


각자 점심을 먹자마자 서둘러 만났다.

집에서 30분도 걸리지 않은 시내 해변에 가서 스탠딩 패들 보드를 타기로 했는데,

우리처럼 여름을 놓아주기 싫은 사람이 많았던 것인지 사고가 난 것인지 가는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여름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는데 꽉 막힌 도로에 갇혀 있자니 마음이 급해졌다.



- 요코 어떻게 하지? 돌아갈까?

- 누드비치 가자!



평소 같으면 망설였을텐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나도 모르게 바로 대답이 나왔다.


- 그래! 가 보자!

- Evviva!([엡비바!] 이탈리아어로 신날 때 쓰는 말)





요코도 전 남친과 헤어진 후 오랜만에 가보는 데다 길을 돌아가는 거라 길을 좀 헤맸다.



- 요코, 그냥 가려던 시내 해변으로 갈까? 지금쯤이면 정체가 풀리지 않았을까?

- 아니야, 오늘은 우리가 누드비치에 가라는 운명의 날이야.

- 맞아! 가자!



그렇다. 역시 계획대로 되는 건 없고, 계획하지 않은 일은 언제나 멋지다.



요코는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아냈다.


- 여기서 우회전, 저기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 여기 내 전 남친 부모님 살던 동네잖아.


요코는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들면서 괜히 인사하는 척했다.




요코는 전 남친과 누드비치를 자주 갔다고 했다.

이탈리아 남부는 그렇지 않지만,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게르만의 누드 사우나 풍속처럼,

누드 비치도 꺼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평범하지는 않아 보통 누드 비치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져 있다.

사실 누드비치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자연주의 구역이라고 부른다.

요코의 남자 친구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아마도 그 곳을 알았을 것이다.




나도 한 두번 오스트리아의 누드 사우나에 가본 적은 있다.

사실, 그런 사우나에서 혼자 부끄럽다고 비키니를 입고 있으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규정 위반이고 되고 스탭이 와서 벗으라고 한다.


입고 있어야 할 곳에서 벗어도 민쳬지만, 벗고 있어야 할 곳에서 입어도 민폐이다.



요코는 나에게 자신에게 익숙한 동네를 설명을 해주느라 신이 났다.


- 이 길을 따라가면 바다로 연결되는데, 정말 경치가 예뻐. 근데 경사가 급하고 길이 차 한 대 밖에 못 다닐 정도로 좁으니까 조심해야 해. 저기 봐! 바다가 다 보여!


절벽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길 같지도 않은 길을 굴러가듯 내려가며 바라본 아드리아해는

정말 아름다웠다.

날씨까지 좋아서 마치 바다 전체에 은색 멸치떼들이 춤을 추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절벽 아래 말도 안되는 장소에 차를 세웠다.


- 이 근처인 것 같아. 꼭 필요한 것만 가져갈 수 있어.

- 왜?

- 가보면 알거야. 우린 저 밑으로 더 내려가야 하거든. 근데, 돌길에 정말 가파르고 위험하거든.

너 쪼리 신고 온거야? 일단 꼭 필요한 것만 내 배낭에 넣어. 내가 다 메고 갈께. 나는 여러번 와 봤으니까 괜찮아.


요코는 자기 키만한 배낭에 비치타월, 물, 책, 오리발, 스노클링 장비까지 빵빵하게 넣고는 앞장섰다.

그런 조그만 요코가 왠지 오늘따라 믿음직스러웠다.


요코는 탐험가처럼 길이 나지 않은 길을 잘도 찾아 갔다.


- 아! 찾았다! 여기야!


수풀을 헤집고 들어가니, 정말 한 사람만 겨우 걸을 수 있는 가파른 돌계단이 나왔다.

요코는 나에게 열 번도 넘게 조심하라고 말하며 네팔 짐꾼처럼 능수능란하게 길을 내려갔다.


길이라기보다 낭떠러지 같은 부분이 여러번 나타났다. 주변에 잡고 내려갈 나무들이 없으면 도저히 내려갈 수 없는 가파르고 위험한 돌길을 요코는 그 작은 몸으로 자기 몸만한 배낭을 지고 날다람쥐처럼 날라 다녔다.


- 으악!


요코가 순식간에 미끄러져 돌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 요코, 괜찮아?

- 아야... 괜찮은 것 같아.


얼마나 가파르고 좁은 길이었으면, 나는 그 옆에 가서 요코를 부축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요코는 괜찮았다. 그때부터 나는 요코에게 열 번도 넘게 '조심해. 천천히' 라고 말했다.

요코는 나에게 소중하니까.


길을 따라 올라오는 사람 중 나처럼 호기롭게 쪼리를 신은 사람이 있었다. 요코가 말을 걸었다.


- 안녕하세요, 쪼리 신고도 올라오고 내려왔네요. 하하하, 그럼 제 친구도 할 수 있겠어요.

- 그럼요, 할 수 있어요.


얼마나 걸어 내려갔을까. 드디어 나무 사이로 쨍한 빛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빼꼼히 눈이 부신 바다가 보였다.


- 바다다!

- 와!

- 우리 여기서부터 조용해야 해.

- 알았어.


드디어 해변에 다다랐다. 조용한 해변은 작은 조약돌들로 길게 이어졌다.

파도도 없는 잔잔한 바다에 가끔 큰 바윗돌들이 작품처럼 자리잡고 있었다.여기 수년을 살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가 있는 줄은 몰랐다.




몇 발짝 걸으니 바위에 물감으로 글씨가 씌여있었다.


'Zona Naturalistica(자연주의 지역)'

요코는 복화술로 '여기서부터 누드비치야'라고 말했다. 나도 고개만 끄덕였다.


사람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이 모든 것이 그림 속 풍경 같았다.


처음엔 사람들이 불편해 할까봐 일부러 보지 않았다. 하지만 쭈구리는 되고 싶지 않은 우리는 당당하게 걸으며 익숙한 듯 자리를 잡았다.

살짝 눈치를 살피니 정말 다들 누드였다.

아무도 우리를 신경쓰지 않거나 않은 척했다. 나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원피스를 벗고 비키니 차림이 되었고, 요코도 살짝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무슨 용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곧바로 비키니 상의를 벗고, 또 하의도 벗었다.


- 너 이럴 줄 몰랐어.

요코도 웃으며 다 벗었다. 우린 해변에 알몸이 되었다!



- 요코, 우리 야생 동물 같지 않아?



그래도, 좀 어색한지라 비치타올에 배를 깔고 괜히 책을 읽는 척 했다. 요코도 배를 깔고 누웠다.

이 곳의 사람들은 정말 세렝게티의 동물같았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다른 비치와 다른 점은 낮은 돌담을 쌓아 각자의 영역을 표시해 구역을 나누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영역을 마른 나뭇가지나 조개껍질로 귀엽게 장식한 사람까지 있었다.

마치 원시시대 사람들 같기도 하고 80년대 미국의 히피 같은 느낌도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순수하고 평화로워서 놀랐다.

사람들은 대부분 책을 읽거나, 바다를 보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었었다.


마치 예전에 tv에서 본 숲길을 걸으며 정기를 받는다는 자연주의 명상원 느낌이었다.

그렇다. 여기는 단순한 누드비치가 아닌 것이다.

자연주의자들의 천국인 것이다.


그 누구도 핸드폰을 보거나 꺼낸 사람도 없었다. 나는 바로 이게 이곳을 룰임을 깨달았다.


온 가족이 함께 와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반려견에게 나뭇가지를 던져주는 한가로운 사람들,

바위 위에서 대자로 태양의 정기를 받는 사람들.


우린 모두 발가벗었다.


근처로 요트나 작은 배들이 지나가기도 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 요코, 너 왜 계속 배만 깔고 있어?


요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사지를 대자로 벌리고 하늘을 보고 누웠다. 나도 몸을 뒤집어 하늘을 보았다.


- 너한테 가장 추천하는 건, 알몸 수영이야. 따라 나와.



요코는 벌거벗은 몸에 오리발을 신고 스노클링 장비를 쓰더니, 내 거라며 나에게도 스노클링 장비를 건넸다.

바다는 예상대로 차가웠다. 벌써 9월 중순이니.


요코는 이럴수록 바로 바다에 풍덩 빠져야 안 춥다며 이내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심장마비에 걸릴 것 같아서 천천히 천천히 물 속으로 들어갔다. 물이 목까지 잠겼을 때 요코가 빌려준 스노클링 수경을 쓰고 바닷속을 바라보았다.


물 속은 더욱 고요했다.

하늘거리는 해초들, 부유하는 플랑크톤, 은빛의 멸치떼들.


그리고 나.

이 물속의 정적이 좋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덧 나도 육지와 멀어져 있었다.

순간 겁이 나서 나는 다시 해변으로 돌아와 다시 햇볕에 몸을 녹였다.





책을 읽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규칙적으로 찰랑이는 물소리가 암자에 울리는 목탁 소리 같았다.

누드 비치에서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이야.



그래, 이런 장면 많이 봤다.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에서.

아프리카 평원에서 띄엄띄엄 몸을 뉘이고 각자의 시간에 집중하는 사자들.


온몸을 통해 태양, 바다, 돌, 바람 모든 좋은 기운들이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나중엔 이 분위기에 취해 정말 여기에 살고 싶을 정도였다.



멀리 알몸으로 스탠딩 패들 보드를 타는 노부부가 보였다.



올해 초 나는 혼자 남겨졌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혼자 있는 이탈리아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덜 외롭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 나 혼자야 말로 가장 큰 의미가 아닐까.



나는 나를 찾고 싶었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를 데려가 내가 누구인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누드비치를 선택했다.



알몸인 이곳에서 예상을 뒤엎고 희한하게도

나는 다른 사람들을 신경쓸 마음이라곤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반면,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온전한 나에게로의 집중.





- 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 누드비치를 가는 법 2편 https://brunch.co.kr/@daram/40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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