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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딴방 Apr 20. 2022

35살, 어린시절 상처 뒤에 숨지 말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다.

부모라는 존재는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주지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적어도 내 부모님은 그랬다. 상처를 주지 않은 부모님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그 사람은 마음 부자일것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렵지 않고 본인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그대가 부럽다.


나의 부모님은 나를 너무도 사랑했을 것이라고, 지금의 내가 엄마가 된지 만 3년이 자나서야 그 사실이 확신으로 다가온다.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정말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고. 다만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거나, 당시의 '상황'이 좋지 않아 그 사랑이 잠시 가렸려졌을 뿐이다. 부모도 부모가 사실 처음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3남매를 연년생으로 낳아 기르셨다. 안 그래도 내향적이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약간은 무뚝뚝해도 너그럽고 아기자기한 사람인데 하필이면 우리 아빠가 많이 철이 없어 엄마에게 많은 상처를 줬다. 엄마는 한번도 나에게 사랑한다고 육성으로 말을 해주신 적이 없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에는 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나의 어린 시절부터 생각해보면 한 번도 없는것 같다. 당시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엄마가 힘이 든다고, 요즘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 우리딸, 한마디라도 해줬더라면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의 사랑이 매말라있다고 늘 생각했다. 연년생 동생이 둘이나 있었기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마 스스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익숙했을 것이다. 그래도 늘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했다. '동생이 둘이나 있어서 네가 많이 힘들지? 엄마가 그래도 늘 고마워, 우리 큰 딸 없으면 엄마가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하며 꽉 안아주셨더라면 내 인생은 아주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요즘 내가 딸을 키우면서 엄마가 우리를 키웠을 때 느꼈을 것 같은 감정들이 오버랩이 될 때가 있다. 내 아이에게 먹일 반찬을 만들면서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늘 손수 차려주던 밥상이 어렴풋이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 때 엄마가 발라주던 생선 가시, 그 때 엄마가 해주던 오므라이스와 빨간 고기 (제육볶음을 나는 이렇게 불렀다). 엄마는 없는 솜씨였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매일 아침, 점심, 저녁을 우리에게 차려주었고, 집을 늘 깔끔하게 정리정돈을 잘 하셨다. 우리가 읽어야 한다고 아빠랑 차타고 다같이 동대문시장에 가서 문학 전집을 사주시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조르던 귀 뚫기도 초등학교 1학년때 허락해주셨다. 동생들이 대들면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셨던 기억도 난다. 그것이 엄마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나는 엄마로부터 '받지 못한 것'에만 그렇게도 집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는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내가 갓난 아기였을 때 아빠는 당시 취준생이던 친구들에게 용돈을 주느라 엄마가 분유값을 받으러 회사까지 찾아간적이 있다고 한다. 육아와 집안 살림에 많은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것이 엄마를 심적으로 더 매마르게 했을 것이다. 시부모와 형제들에게 싹싹하게 못한다고 엄마에게 늘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내가 중학생일 때, 아빠는 한동안 도박에 빠져 우리 집을 경제적으로 한 순간에 무너지게 했다. 나는 왜 나에게는 남들처럼 평범한 아빠가 없는걸까 생각했었다. 그리고는 많이 울었다. 우는 엄마를 보면서도 몰래 많이 울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늘 마음 한켠에 돈에 대한 압박감과 우울감이 있었다. 아빠와 친밀하지 않다 보니 사회생활을 하며 만나게 되는 어른들이 무서워 친근하게 대하지 못했고, 이는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나는 돈에 휘둘리는 삶을 살았던것 같다. 나 자신을 위해 백화점 가서 사는 옷이 너무 아까워서 늘 지하 상가에서만 옷을 사왔고, 대학 생활을 하며 늘 아르바이트를 겸했다. 직장을 잡을 때에도 돈이 우선순위였다. 결혼자금을 스스로 모아야 했으니까.


그래도 기억나는 것은, 내가 전학을 와서 친구들에게 잠시 따돌림을 당했을 때 아빠가 내 신발에 장문의 편지를 써서 넣어주었었다는 것이다. 등교길인가 하교길에 그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쏙 뺀 기억이 있다. 아빠는 엄마와는 달리 내가 공부를 하고 있으면 과일을 손수 깎아 책상 위에 올려주시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고생한다고 한마디 해주신 기억도 난다. 그리고 어렸을 때에는 아빠가 우리 가족을 넓은 잔디밭 광장에 데려가, 텐트를 치고 돗자리를 깔고 놀게 해주었던 기억도 있다. 장시간 운전을 하여 여행을 갈 때에도, 뒷자리에 앉은 삼남매를 위해 좌석 앞에 커다란 쿠션 같은 것을 사와 넓게 펴주시기도 했다. 수영장에 데려갔을 때에도 우리 삼남매 빠지지 말라고 팔 튜브에 후후 공기를 불어넣어 우리들의 얇은 팔뚝에 쭈욱 끼워주시기도 했다. 빨간 눈을 하면서도 회사 생활 성실히 하셨고, 결혼 전 잠깐 엄마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에도 내 남편을 만나 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나는 정말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리도 부모를 원망하고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내 상처를 어루어만저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만 생각했을까.


사실은 내가 어린 아이를 키우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사실은 더 늦게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내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이렇게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면서도 행복하고 감사하다. 내 아이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나를 거지로 만들어도 좋으니 내 아이만 내 곁에서 뺏어가지 말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다.


부모는 자식이 있기에 버티고 산다. 우리 엄마 아빠도 아마 거지같아 때려치우고 싶었을 때 자식들 생각하며 버틴거겠지.


지금 당신의 부모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당장 주지 못한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분은 아마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자산이 당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당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을 보며 그나마 그 정도라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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