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반쯤 읽었을 때, 너는 늘 겸연쩍은 얼굴로 나타난다.
미안하단 말과 나무람 대신 이제 막 신호가 바뀐 횡단보도를 가리키는 손짓이,
지갑을 두고 나왔다는 상투적인 변명 대신 '그 책 재밌어?'라는 다정한 인사가 오간다.
그 익숙함 속에서 나는 알게 된다. 우리가 나눈 하루치의 말들이 가리키는 하나의 의미를.
좋아한단 말 대신 우리는 항상 많은 말을 한다.
꽃이 예쁘다고 말하고, 커피가 맛있다고 말한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은 '조금 걷자.' 말하고,
걸음이 유독 빠른 네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다 '같이 걷자.' 말한다.
기다려줘서 고맙단 말 대신 왜 기다렸냐는 말을, 서운하다는 말 대신 밉다는 말을 한다.
일상적인 말들이 핑크빛 은유를 띄는 순간을 만나게 될 때,
통화 연결음이 끝나길 기다리는 찰나의 순간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
하늘을 나는 새떼를 바라보다 공연히 울고 싶어질 때, 우리는 또 알게 된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사랑이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