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삶은 다른 곳에>를 읽고
“당신은 역사란 이미 일어난 일이므로 완전히 끝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역사의 옷은 날실과 씨실이 나는 타프타 천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래서 우리가 돌아볼 때마다 매번 다른 색깔로 보이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장편소설 <삶은 다른 곳에>(민음사, 2021)의 한 구절이다. 작가는 1948년 체코의 공산화 혁명에 참여한 뒤 이념의 한계를 경험했고 이를 바탕으로 1973년에 위 소설을 출간한다. 2023년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 소설을 읽어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작가의 말대로 새로운 관점을 던져주는 ‘역사의 옷’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젊은 서정 시인 ‘야로밀’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배경은 공산당 혁명이 시작되던 1940년대 체코슬로바키아다. 야로밀은 어머니의 과잉보호와 집착 속에서 청소년 시기를 보낸다. 아들의 예술적 재능을 발견한 어머니는 화가에게 미술 수업을 맡긴다. 야로밀은 자신의 시를 화가에게 보여주고 잠재력을 인정받는다. 대학생이 된 그는 시를 쓰며 한 여학생을 만나지만 관계가 진전되지 못한다. 우연히 만난 가게 점원인 ‘붉은 머리’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가지고 연인이 된다. 자신의 시와 정신세계에 관심이 없는 그녀에게 화가 났던 야로밀은 혁명에 더 매료되어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시인이 된다. 급기야 붉은 머리 오빠를 당국에 고발하여 그녀와 가족들이 고초를 겪게 만든다.
작품은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공산주의 정권을 비판한다. 어머니에게 억압된 채 자라난 야로밀은 시를 통하여 자유를 얻으려고 하지만 공산주의는 자유로운 시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혁명을 무장폭동이라는 비난하는 이모부에게 반박하다가 “자신의 언어를 포기하고 누군가 다른 이의 매개체가 될지도 모르는 쪽을 택”(p.206)하게 된다. 혁명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연인의 오빠를 고발하는 행동까지 저지르며 그는 혁명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혁명은 아주 짧은 기간이고 그동안에는 앞으로 폭력이 완전히 금지될 사회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 폭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p.208)이라는 설명이 통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작가는 혁명을 경험한 자신의 삶을 드러낸다. 밀란 쿤데라는 야로밀처럼 젊을 때 서정시를 써서 등단하였다. 그의 첫 시집 <인간, 그 광활한 정원>(1953)은 서정시 모음집으로서 마르크스 이론을 생기 있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1948년에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2년 뒤에 쫓겨났고 다시 복권되지만 ‘프라하의 봄’이 좌절되고 1970년에 다시 당에서 제명된다. 작가는 이 시기에 문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갈등하며 변질되는 사회주의 체제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망명 직전 1973년에 완성한 이 작품에서 혁명에 대한 회의와 고민을 담아내면서 그는 혁명을 했던 이유가 “실제 삶은 다른 곳에 있”(p.291)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 삶은 다른 곳,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작가는 소설 후반에 야로밀과 대조적인 ‘사십 대 남자’를 등장시켜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는 조국을 위해 히틀러에 대항하여 싸웠던 군인이었지만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추출되어 자기만의 인생을 살고 있는 인물이다. 현실의 임무에 충실했고 실패한 결과도 받아들인다. 붉은 머리의 애인이기도 했던 중년 남자는 감옥에서 돌아온 그녀와 “가면을 벗고 아무 걱정 없이 이야기를 나”(p.455)누면서 위안과 안전과 행복을 준다. 그녀는 처음으로 “아름다운 삶의 한 조각”(p.454)을 경험한다. 실제 삶은 바로 고루한 현실의 한 켠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현실을 가르고 ‘삶은 다른 곳에’를 외치며 이상적인 혁명만 강조되었을 때 혁명 후의 삶이 현실로 이어질 수 없었던 것은 필연적이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각 시대마다 주어진 과제가 있고 다양한 모습으로 해소되는 과정이 있다. 혁명기 시대 때 시행착오를 그려낸 <삶은 다른 곳에>를 통하여 우리 시대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독자로 하여금 돌아보게 만든다. 어떤 이슈에 대해 진영 논리로만 이해하거나 몇몇 정치인이 해결해주길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상적인 구호와 선언을 막연하게 믿고 있는 모습도 있을 수 있다. 밀란 쿤데라가 처음에 신봉했던 체제를 나중에 강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반성과 고민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삶은 다른 곳에>는 공산주의 혁명과 그 후의 삶을 그려낸 밀란 쿤데라의 자전적 소설이다. 전지적 화자가 야로밀을 중심에 두고 그의 주변 인물들을 그려낸다. 그가 꿈꾸는 상상의 인물인 ‘자비에’를 병행해 이야기를 서술하거나 가끔 작가의 목소리가 등장하여 구체적으로 장면을 설명하기도 한다. 꿈을 통하여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등 초현실적 기법도 활용하고 있다. 탁월한 심리묘사와 여러 기법들은 당시 체제의 모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어머니와 하녀, 여대생, 붉은 머리 등 여성을 묘사할 때 외모를 비하하거나 대상화시키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시대적 배경과 소설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몇몇 독자들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다른 작품을 읽었거나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