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밝히는 빛, 일상의 경이로움

돈 드릴로의 <제로K>를 읽고

by 책선비


인간의 생로병사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었지만 급속도로 성장하는 과학 기술로 인해 노화를 멈추고 생명 연장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항노화 치료제’ 시장이 활성화 되고, 실제로 냉동보존술을 시도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는 중이다. 만약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최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일시적 죽음을 유지하겠다면 우리는 그 기술과 인간의 결정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미국 문학의 대표 작가인 돈 드릴로는 장편소설<제로K>(은행나무, 2019)에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소설은 인간이 냉동보존 기술을 이용하여 미래의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순을 드러내며 현재 삶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


화자 ‘제프’가 억만 장자인 아버지 ‘로스’의 요청에 따라 ‘컨버전스’에 들어오면서 시작한다. 컨버전스는 새로운 기술이 발전할 미래까지 육체를 냉동 보존해주는 시설을 갖춘 비밀스런 곳이다. 불치병에 걸린 로스의 두 번째 아내인 ‘아티스’가 이곳의 냉동보존 장치에 들어가고 제프와 로스는 그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컨버전스의 여러 곳을 탐색하던 제프는 마네킹처럼 처리된 냉동 보존된 육체들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2년 뒤, 조력 자살로 냉동보존을 선택하는 ‘제로K’가 되겠다는 로스의 부탁으로 제프는 다시 컨버전스로 가게 된다.


작품은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죽음 없는 삶을 욕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모든 사람은 세상 끝을 소유하고 싶어하지”(p.11)라고 말했던 것처럼 로스는 죽음을 통제하여 영생을 소유하기 위한 선택을 한다. 불필요한 장기를 적출된 뒤 나체로 투명한 캡슐에 보존된다. 과연 로스는 자신이 바라던 먼 미래의 신 기술로 냉동에서 깨어나 이런 선택을 한 자신을 대면할 수 있을까. 먼저 냉동인간이 된 아티스는 “지금의 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p.172)라며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부유한다. 로스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신을 찾지 못한 채 아티스와 비슷한 상태에 있지 않을까. 이는 인간이 기술을 이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기술에 의해 이용당한 채 현재와 미래의 삶까지 잠식될 수 있는 암울한 미래를 보여준다.


작가는 죽음의 의미를 ‘존재’와 ‘실존’의 차이로 설명하고 있다. 돌은 존재하지만 실존하지 않고 “오직 인간만이 실존”(p.222)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존은 죽음 이후에 더 명확하게 인지하기도 한다. 제프는 아티스와 로스의 (일시적) 죽음 말고도 ‘매들린’과 ‘스택’의 죽음을 목격한다. 제프의 엄마 매들린은 고된 삶을 살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죽고, 제프의 애인인 ‘에마’의 아들 ‘스택’은 자신의 고향 우크라이나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그들은 질병과 테러로 안타깝게 생을 끝맺었지만 제프는 이들을 통해 실존의 의미를 알게 된다. 명백한 죽음 앞에서 그들의 삶과 그 소중함이 제프에게 더 뚜렷하게 각인된 것이다.


“평범한 순간들이 삶을 구성한다. 어머니는 이 명제를 믿어도 됨을 알았고, 나 또한 결국은 우리가 함께 보낸 세월에서 그것을 배웠다. 엄청난 도약도, 추락도 아니다. 나는 이슬비처럼 내리는 과거의 작은 파편을 들이마시고 내가 누구인지 안다.”(p.117)


소설은 평범한 일상의 경이로움을 느낄 때 실존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거대한 상속을 거부한 제프는 자기 일을 시작하며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평범하게, 쉽게 잊으며 하는 일들.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의 표면 바로 밑에서 숨 쉬는 것들. 나는 이런 행위, 이런 순간에 의미가 있기를 원한다.”(p.217) 작가는 과학기술로 인해 수명 연장을 시도하지 않아도 일상의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제로 K>는 60년간 소설을 써온 작가의 죽음과 삶에 대한 통찰이 담긴 작품이다. 첨단 과학 기술과 공존하며 살아가야하는 독자에게 인간으로서 주체성과 실존의 가치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듯하다. 컨버전스 관련자들과 논쟁하던 제프가 수없이 던지는 질문과 대화 속에서 작가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만, 대부분 화자의 시점에서만 서술되고 스토리 전개도 단순하여 어떤 독자는 지루함을 주기도 한다. 구와 어절로 끝나는 문장과 문단들은 불친절하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시대를 꿰뚫는 시선과 관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용한 시각을 제시한다. 90세 노장 작가의 죽음에 대한 사유가 궁금한 독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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