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유리 Jan 09. 2020

내향인 강연자의 무대 공포증

'세바시' 강연 경험과 영화 <본 투비 블루>가 내게 던진 질문

‘나도 저기서 내 이야기 할 수 있는데.’


누군가의 강연이 남긴 여운은 가끔 엉뚱한 상상으로 흐르곤 했다. 그 상상을 뒤로한 채 나를 돌아보는 글쓰기로 몇 년을 보냈다. 두 번째 책을 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잊었던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2019년 9월, ‘세바시’ 사전 미팅을 위해 방송국을 방문했다. 2년 전부터 나를 지켜보았다던 윤 작가님은 험난한 내 궤적에 진정성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누군가 날 알아보았다는 반가움,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설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작가님과 피디님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몸과 마음이 동시에 들떴다. 그러나 이내 두려움이 나를 지그시 누르기 시작했다.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함을 안다는 것과 마음이 준비되는 건 별개였다. 600명 앞에 서야 한다는 것, 몇 대의 카메라가 그런 나를 찍을 거라는 것, 영상 조회 수가 높을수록 책이 잘 팔리고 강연이 많이 잡힐 거라는 것. 결론은 하나였다. 잘해야 했다. 


나는 내 내향성을 부인해야 하는 시점이 오면, 늘 일을 미룬다. 당일 오전까지도 원고는 미완성이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무대 위에선 우울증에서 멋지게 벗어났다고 말해야 했지만, 강연 몇 시간 전에도 난 우울했다.


세 시간 전, 대기실에 도착했다.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거울 가장자리에 줄지어 박힌 전구는 부담스럽게 빛났다. 휴대폰을 꺼내어 녹음해둔 원고 오디오 파일을 틀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내 순서가 되었다. 사회자의 소개와 청중의 환호를 받으며 무대로 나갔다. 내향성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한 글자도 틀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15분의 강연은 긴 아쉬움을 남겼다. 




한 달이 지났다. 운동 중 볼 영화로 별 생각 없이 좋아하는 배우 에단 호크의 출연작을 골랐다. 뉴욕의 유명 재즈 클럽 ‘버드 랜드’ 대기실 거울 앞에 선 그의 불안한 눈빛이 내 맘에 콕 박혔다. 영화 <본 투비 블루(Born to be blue)>는 20세기 중반 미국 재즈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Chet Baker)의 삶을 담았다.


출처 : 다음 영화


1966년, 마약 소지 혐의로 수감 중이던 쳇은 자신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의 주연배우로 낙점되며 보석으로 풀려난다. 영화 속 영화는 10년 전 그의 ‘버드 랜드’ 데뷔 장면을 흑백으로 보여준다. 연주를 마친 그는 관중의 환호가 당연하다는 듯 왼쪽 입 꼬리를 씨익 올린다. 그가 헤로인을 처음 접하던 날의 신이 끝나자, 상대 여배우 제인은 그에게 묻는다.


“왜 약을 시작했어요?”

“약에 취하는 게 그냥 좋아요.”

제인은 가식 없는 그의 모습에 반한다. 그리고 자신의 본심을 에둘러 표현한다.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의 감정이 인간의 정상 상태래요.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사랑에 빠졌을 때 드러난대요.”


그가 약 없이 진정한 자신을 만나도록 돕고 싶었던 거다. 둘의 핑크빛 무드는 쳇이 누군가로부터 얼굴 가격을 당하며 깨진다. 약 값을 갚지 않아 응징을 당한 거다. 영화를 발판 삼아 재기를 바라던 그에게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트럼펫 연주자의 앞니가 다 부러진 건 피아니스트가 손을 다친 것과 같다. 그는 죽고 싶었다. 그러나 다행히 제인이 곁에 있었다.


제인과 함께 고향에 간 쳇은 어머니의 환대와 아버지의 냉대를 받는다. 연주자로서 실패를 맛본 아버지는 자신의 좌절을 묵직하게 아들에게 전가한다. 그러나 쳇에게 삶은 생존이 아닌 존재였다. 게으른 천재 뮤지션에게 어울리지 않는 주유소 알바도, 마약 치료제 복용도, 틀니 착용도 참아낸 채, 그는 묵묵히 연습하고 연습한다.


LA로 돌아온 쳇은 피자 가게 연주를 시작으로 차츰 실력과 명성을 되찾는다.제인은 오디션에서 번번이 탈락하지만, 그의 곁을 지킨다. 사고 후 등을 돌렸던 프로듀서도, 수시로 그를 괴롭히던 보호관찰관도 그의 성실함에 놀란다. 그의 소리는 정교함을 잃었지만, 개성과 깊이를 얻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연주하는 그는 이제 관중의 환호에 자만을 표하지 않는다. 








“달콤하게 연주하더군, 사탕처럼.”


10년 전 ‘버드 랜드’ 데뷔 무대를 마친 쳇에게 당대 최고의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가 날린 혹평이다. 흑인의 한을 담은 재즈가 곱상한 백인의 음악은 될 수 없다는 거다. 주류가 될 수 없다는 열등감과 실패의 두려움. 그는 이 모든 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를 버티게 해준 건 헤로인이었다. 


이제 그는 달라졌다. 밑바닥을 맛본 그는 자기만의 소울을 연주한다. 그러나 자신의 새 콤플렉스인 틀니가 오랜 콤플렉스를 덮을 진짜 무기가 될 수도 있음은 알지 못했다.


LA 스튜디오에서 쇼케이스를 멋지게 마친 그는 마일스의 단짝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와 재회한다. 쳇은 디지에게 ‘버드 랜드’ 복귀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쳇, 넌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연주 말고 네 마음 말야.”


쳇은 절박한 마음을 슬쩍 숨긴 채 특유의 입담으로 기회를 얻어낸다. 그런데 다시 정상에 근접할수록 불안도 함께 왔다. 그에겐 제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녀는 헐리우드의 중요한 오디션을 놓칠 수 없다.


쳇에게 제인은 완벽한 연인이었다.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고, 그가 해내리라 믿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실 제인에게 쳇은 완벽한 연인이 아니었다. 쳇 베이커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가 전 부인 일레인에게 원한 건 육체의 쾌락이었고, 제인에게 원한 건 정서적 의존이었다. 그는 헤로인을 끊은 대신 제인의 건강함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제인과 살면서도 그녀가 일로 만나는 남자들을 질투했고, 배우가 되려는 제인의 삶을 존중하지 않았다. 쳇은 제인의 기대와 달리 제인 곁에서 정상 상태 언저리만 경험했다. 그는 자존의 의지가 없었고, 제인은 그를 구원할 수 없었다.


제인 없이 뉴욕으로 간 쳇은 공연 시간이 임박해서야 ‘버드 랜드’에 등장한다. 그리고 객석에서 마일스를 발견한다. 대기실의 쳇은 부담감에 압도되고 만다. 그러나 그 공연의 성공이 보장할 것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주류 재즈인들의 인정, 음반 계약, 유럽 투어,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연주하는 연주자의 삶.





결국 그는 헤로인을 다시 택한다. 헤로인이야말로 트럼펫 한 음 한 음마다 스며들어 그를 완성시키는 마법의 약이니까. 


능숙한 연주가 시작되고 모두가 감탄하지만, 오디션을 포기하고 나타난 제인은 그의 변화를 알아챈다. 쳇의 시선은 등을 돌린 제인을 따라가다 이내 디지와 마일스에게로 향한다. 연주를 마치고 그는왼쪽 입 꼬리를 올린다.  ‘봤지?’라는 듯.









어둠을 밝히고 싶을 때 자신감과 자존감 중 어떤 전구를 택할 것인가?



영화 <본 투비 블루>가 나에게 던진 질문이다. ‘해 냈다’에서 자기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 자신감이라면, ‘못 하면 뭐 어때. 그게 나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마음은 자존감이다. 쳇 베이커의 세계에서 어둠을 밝히는 전구는 자신감이었다. 맨 정신일 때도 자기다움을 표현할 수 있고, 그 어눌한 발걸음으로 한 발 씩 내딛어도 자신이 원하던 바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쳇 베이커는 그걸 몰랐다. 그는 자신감이라는 화려한 전구를 밝히기 위해 연인과 마약이라는 에너지에 의존했다. 


“작가님은 오늘 강연 많이 아쉬웠나 봐요. 그런데 작가님 강연은 정말 ‘세바시’ 다운 강연이었어요. 나의 변화는 우리의 변화가 될 수 있다는 게 ‘세바시’의 정신이거든요. 자기 아픈 얘길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솔직하게 공개한다는 게 쉽지 않아요. 작가님의 얘기는 오늘 안 온 누군가에게 반드시 닿을 거예요.”


윤 작가님의 말씀은 맞았다. 떨리는 표정과 말투로 전한 내 얘기는 누군가에게 조용하고 뜨거운 위로를 건넸다. 나는 나에게 없는 쇼맨십으로 청중을 휘어잡고 싶었다. 또 내 영상이 100만 뷰를 넘겼으면 했다. 그러나 나는 늘 알고 있었다. 내가 너무 쉽게 성공해 버리면 지금까지 써온 글은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걸.


쳇 베이커는 화려한 재기 이후 연주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헤로인 중독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성공을 택하느라 자기다움을 버리는 삶. 그게 내가 원하는 존재 방식은 아니다. 


내향성을 떨치지 못한 채 무대 위에서 떠는 나도 나였다. 나는 험난한 내 궤적에서 자가발전으로 얻어온 에너지가 좋다. 그리고 그 힘으로 자존감이라는 소박한 전구를 오래 밝히고 싶다. 


















http://blog.naver.com/sujy62/22187441449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