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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보좌관이 되다

나는 누구의 동지였는가 - 동지는 계약에서 태어난다

by 유노유보

"유 보좌관, 잘 부탁합니다."

의원이 내게 말했다.

2023년 1월 2일, 나는 국회 보좌관이 되었다.

의원과 나는 동지가 되었고,

나의 반려이자 동반자였던 내 아내 W는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의원은 대선 경선 때부터 전당대회, 국감 과정에서 나와 합이 잘 맞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 또한 그랬다.

또한 본격적으로 합류한 지 1년 남짓 된 사람에 대해 믿고 보좌관으로 같이 하자고 정식으로 제안하고, 잘 부탁한다고 직접 말해준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리고 잘해야 한다는 깊은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 했다.

하루는 주말에 임신 중인 아내가 입덧으로 고생하는데 어디든 가야겠다 싶어서

토요일에 데이트를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의원이 전화, 텔레그램으로 어떤 건에 대해서 계속 질문을 해서

이런저런 대답과 조사, 어떻게 조치하겠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급한 건이긴 했다.)

그런 뒤에 의원이 내게 물었다.

"이런 것도 근로시간 산정에 들어가?"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들어는 가죠. 그런데 의원님. 저는 공무원이라서 월 최대 인정 초과근로시간 57시간이고, 그 초과근로수당은 포괄임금으로 제 급여명세표에 이미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하셔도 됩니다. ㅎㅎ.. 국정감사 때가 아니면 웬만해서는 초과하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부 '블랙' 의원실의 경우 국정감사 이외의 여러 시간대에도 자주 초과근무 인정시간을 오버해서 일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여기까지 대답하고 스스로 놀랐다.


난 공짜노동이란 말을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난 왜 토요일에 의원의 업무지시에 응대를 했나.

그때 처음 '몰입'의 얼굴을 보았다.


깨달았다.

이런 게 "몰입"이란 거고 이런 게 "조직시민행동"이란 거구나.


칙센트미하이는 '몰입'(flow)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삶이 절정에 이른 순간,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이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행동이 이어지는 상태, 시간 감각이 왜곡되어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짧은 순간이 길게 느껴지기도 하는 상태, 외부의 방해나 불안감이 사라지며, 과제에만 집중하고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서는 만족감을 제공받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는 상태'


나는 의원의 보좌관 일에 진심으로 몰입하고 있구나.

몰입은 대가 없는 봉사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책임의 다른 이름이었다.


조직시민행동은 우리가 말하는 자발적 노동, "공짜노동"이다.

학문적으로는 "개인이 맡은 공식 업무 외 조직의 원활한 운영과 발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긍정적 활동"을 말한다.


내가 왜 몰입하고,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답은 분명했다.

장시간 노동 그 자체는 오히려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내가 나로서 존중받는지 여부다.


G센터에 있을 때, 센터장님이 점심식사 후 가볍게 산책하면서 내게 해준 말이 떠올랐다.

"유 국장, <귀곡자>란 드라마 봤어?"

"네 봤어요."

"오! 드디어 봤구나. 거기서 난 인상 깊었던 게, 귀곡자랑 위왕이 동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어요.

그게 <뜻을 같이하는 이와의 규칙>, <동지와의 규칙>이라고 나와. 거기에 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이 있어. 그게 뭔 줄 기억나요?"

"아 기억이 날듯 말 듯한데..."

"이익이야. 공통의 이익이 없으면 함께 할 수 없다. 동지와의 규칙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의리는 맨 마지막에 나오고, 이익이 맨 첫 번째로 나와요. 나는 그게 제일 인상 깊었어. 나도 그렇고, 우리 옛날 사람들, 운동권들이 항상 동지관계 이야기하고 동지 운운하는데, 결국 깨지는 때가 엄청 많거든? 무항산 무항심이라고.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없는 거야. 내가 누구를 30만 원 받고 몇 년을 모셨고~ 누구와 함께 할 때는 몇만 원밖에 안 받고 일했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돈 욕심이 없을까? 그 사람들이 사실은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나중에 다 한 자리 챙겨줘야 하는 사람들이야. 동지관계라는 건, 결국 공통의 이익을 지켜줘야, 거기서부터 공통의 목표와 이상 포부가 있는 거거든. 운동권들이 계약관계라는 말을 싫어하고 동지관계란 말을 더 관계의 우위에 두는데, 나는 반대해요.


동지관계란 말도 다 암묵적인 계약이고 사회적 계약이야. 근로계약은 서로 문서상에 있는 내용만 주고받으면 되지만, 동지관계는 누가 못한 걸, 못 주는 걸 봐주는 게 아니야. 이익, 믿음, 의리 세 가지가 다 한꺼번에 뭉쳐지고 응축된 사회계약관계인 거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 이걸 무시하고 대뜸 동지만 찾는 우리 또래, 혹은 나보다 어린 후배, 유 국장이 싫어하는 운동권들 중에서도 적지 않지. 내가 알아요. 또 그런 건 꼭 지가 불리하면, 자기가 곤궁하고, 당장 남의 생활이나 이익을 보장 못 하는데 자기 하고 싶은 건 또 포기 못할 때, 꼭 그럴 때만 부르짖어요. 나도 내 과거에 그랬던 적이 있고. 나도 지금 생각해 보면 미안한 사람들도 많고. ㅎㅎ


하여간 그 드라마에서 보면 동지에 대해서 말할 때, 이익이 맨 첫 번째고, 그다음이 믿음이고, 마지막에 나오는 게 의리예요.

이익이 있은 다음에 의리가 있다!

난 그게 제일 인상 깊었어. 다시 한번 봐바요."


그때 다시 한번 그 드라마를 봤었다. 그 드라마에 나오는 <뜻을 같이 하는 이와의 규칙>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규칙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사람이 나의 동지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이익이 있어야 한다.
공통의 이익이 없으면 함께 할 수 없다.
뜻이 맞아야 한다.
공통의 목표와 이상, 포부가 있어야 한다.
길이 같아야 한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ㅡ 뜻을 같이하는 이(동지)와의 규칙,

귀곡자(2014) 中。

내가 의원을 뜻을 같이 하는 "동지"로 진심으로 처음 생각했던 때는,

그가 나에게 "육아휴직"을 제안했을 때였다.

난 내가 비서관도 아니고 보좌관이었기에, 육아휴직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남자였으니까.

그런데 아이를 낳고 2주간을 배우자 출산휴가로 쓰게 하고,

바로 돌아오자마자 첫 이야기로 그가 말했다.


"유 보좌관, 육아휴직은 그럼 언제 갈 거야?"

"네? 제가요? 저 가도 돼요?"

"그럼, 안 가게? 안 가면 나야 좋지만 ㅎㅎ"


총선이 1년도 남지 않았던 시기였다.

꿈에도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너무 감사하다고, 와이프와 진지하게 언제 갈지 상의도 했다.

그런데 22대 총선, 그리고 공천에 대한 긴박감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에는 오히려 의원이 아니라 다른 비서관들도 불안을 느끼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육아휴직을 간다고 할 때의 업무공백 문제로

공개적으로 안 갔으면 좋겠다는 K 비서관의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이 조직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원래 생각도 못 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의원에게 "3선하시고 육아휴직 가겠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으로 상황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는 동지를 얻었다.

의원이 자신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게 육아휴직을 권하는 걸 보고,

그를 "사장님"에서 "동지"로 보게 되었다.


나는 운동권들이 툭하면 나는 00당에 있을 때 몇 만 원 받고 상근 했다 어쩐다 하는 소릴 들을 때마다

솔직히 경멸의 감정이 치솟아 오르곤 했다.

막말로

"그래서 뭐 어쩌라고?"

속으로 그렇게 뇌까렸다.


나는 나보다 한두 세대 위의 적지 않은 "운동권"이란 사람들이 계약관계란 말보다 동지란 말에 상하관계를 두는 사고방식에 대해, 참 어쩔 수 없는 세대차이가 있다고 본다.


좋은 사장님, 좋은 계약관계, 자신의 사용자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계약관계에서 비롯된 신의를 지킬 때, 근로자는 자연스럽게 사용자의 동지가 다. 계약에서 신의를 지키면, 뜻은 자연스럽게 통한다. 뜻이 통한 사람, 그게 바로 동지다.


동지와의 규칙 첫 번째가 "공통의 이익"인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 대화를 센터장님과 나눈 지 6년이 넘어가지만, 나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대화야말로 내가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준거틀이 됐기 때문이다.


의원이 만약 동지 운운했다면, 나는 그에게 실망하고

점점 그를 피했을지도 모른다.

"좋은 사장님"이고자 했던 의원의 태도가,

나를 의원의 동지로 포섭했다.


그래서 나의 장시간 노동은 더 이상 장시간 노동이 아니었다.

지휘 감독은 이제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었다.

보좌관이 되고 나서 몇 달 뒤 보훈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있을 때였다.

나의 아내 W는 내가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본인도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드디어 내 삶에도 좋은 날들이 오는구나 하고.

임신 중에도 그 흔한 00 과일 먹고 싶다고 날 괴롭히지도 않고 그랬던 W였다.


그래서 난 집에 가서도 인사청문회 자료를 뒤졌다.

밤에 장관 후보자 P의 인사청문회 자료들을 뒤져가며, "국회 법사위원 시절 변호사 겸직하면서 16건 사건 수임으로 변호사법 위반", "조직폭력배 폭력사건 수임", "주가조작과 시세조종을 혐오한다며 주가조작 유죄 확정사건 변론" 등의 언론 공보 작업을 했다. 의원도 당시 눈의 실핏줄이 터져가며 열심히 전력투구 했었다.

의원도 나도 최선을 다해 만족했던 한 때였다.


문제는 W였다.

사장님이었던 의원은 나의 동지가 됐지만,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동지이고 동반자인 내 아내를,

나는 한 없이 외롭게 만들었다.

동지가 계약관계에서 오는 거라면,

결혼도 사회적 계약이란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집에 와서 일을 하고 있는 내게 W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자기는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어 아니... 미안하지..."

"뭐가 미안한데? 아니, 고마워는 해? 내가 남들처럼 자기한테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남들은 임신하면 다 남편이 몸조리도 해주고 안마 마사지도 해주고 가사도 다 하는데, 일 때문에 청소나 설거지 요리 제대로 못하는 거 좋아. 양갱이 밥 주고 똥 치우는 것도 제때제때 못하는 거, 좋다 이거야. 자기 보좌관 된 지 얼마 안 돼서 바쁘니까. 근데, 임신해서 배 나오고 입덧도 심한데도 내가 자기한테 별로 말도 안 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기는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는 거 같아.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나는 W에게 미안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엄청 고마워하고도 있었다.

하지만 표현하지는 못했다.


"나 비염 때문에 힘든데도 임신해서 약도 제대로 못 먹는데, 자기 이런 내 몸 상태 제대로 보기나 했어?"


"......"


"하다못해 나한테 미안하다 고맙다, 내가 몇 년을 손 편지 받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임신하고 입덧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집안일 못 가져가는 거 좋아, 최소한 나한테 편지라도 한 장 써주든가, 고맙단 표현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자기는 내가 당연히 집안일하는 사람이야? 내가 그런 사람이랑 결혼한 거야? 아기가 원 씨가 되는 거, 그건 왜 정한 거야? 아니 그런 거 페북에 글 써서 자랑하고 나 깨어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뭐 하세요. 현실이 이런데. 자기는 나보다 박용진이 먼저지? 어떻게 와이프가 임신했는데 집에서도 집안일도 제대로 안 하고 나한테 고맙다 미안하다 제대로 말도 안 해주고 편지도 안 써주고. 어떻게 사람이 그래?"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서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고 하니,

이제 와서 내가 말하니까 말로 그렇게 또 넘어가려고? 라는 말이 돌아왔다.

내가 요 몇 달간 너무 도취되어 있었다.

의원도 한 번 열중하면 일에만 열중하는 스타일이었고, 나도 거기에 같이 보조를 맞추다 보니,

가정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W에게는 엄청난 상처였다.

W는 가정에서의 동반자이면서 내가 임신과 육아의 동반자이기도 바랬다.

자신도 변호사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똑같이 힘든 일을 하는데 심지어 돈은 자기가 더 많이 버는데,

임신과 육아에 대한 기획은 여전히 W가 하고, 나는 "돕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마지못해 하고

일하다가 이거까지 한다고 푹푹 한숨이나 쉬는,

나는 그런 한심한 예비 아빠였다.

밖에서 국회 보좌관이면 뭐 하나.

너무 초라하고 미안한 일이었다.


몇 번에 걸쳐 미안하다고, 고마워하고 있다고 사과하고 육아에 대해서,

병원 스케줄도 조금이라도 같이 가려고 더 노력했다.

아마 W는 이 글을 지금 봐도 그때 생각만 나면 나한테 아직도 부아가 치미고 화가 난다고 할 것이다.


엄마가 나에게 틈만 나면

"너, 니 와이프 임신했을 때 제대로 못하면 너 평생 욕먹어. 최소 10년이야. 니네 아빠 그래서 내가 아직도 뭐라 그래. 그러니까 좀 잘해."

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난 너무 늦게 깨달았다.

엄마 말도 잘 듣고 볼 일이었다.


출산 예정일이 다 되도록 아이는 나오지 않았다.

산부인과 의사는 "힘들더라도 좀 걸으시면 아이가 나오려 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래서 함께 병원 근처의 용왕산을 가볍게 걸었다.

유독 푸른 하늘이 눈에 띄었다.


예정일 당일, 가진통이 왔다.

그녀는 이건 가진통이니까, 우선 안과부터 가자고 했다. (그날 눈이 좋지 않았었다.)

안과를 다녀올 때는 비가 세차게 내렸다.

가진통으로 배를 끙끙 부여잡고 안과에 다녀오니 배가 고팠다고 했다.

그래서 이삭토스트를 한 줌 베어 물고,

가진통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찐진통이 5분, 3분 간격으로 왔을 때.

아 지금 가야 되는구나, 하고 산부인과 근처 김밥천국으로 갔다.

W는 자연분만하면 주스도 못 마시고 밥도 못 먹고 계속 7시간, 8시간 힘을 빼야 하니 가기 직전에 반드시 밥을 먹고 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병원에 갔다.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아이가 태변을 먹었다. 너무 늦게 오셨다.

태아 심장박동수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응급제왕을 해야 한다.

?!


알고 봤더니 W의 가진통은 찐진통이었다. 찐진통이 온 지 8시간 만에 병원에 온 것이었다.

이 와중에 제왕절개는 꼭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

나는 응급인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서도 설명을 조금이라도 빨리빨리 해주길 바라면서

얼른 사인해서 넘겼다.


알고 봤더니 그런 상황에서조차 자연분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무리 응급이어도 제왕절개 동의서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


신세계였다.

제왕절개 수술은 1시간 정도 남짓 걸렸다.

수술이 끝나자, 거짓말같이 세차게 비가 오던 날씨가 개었다.


"한 번 안아보시겠어요?"

아이는 생각보다 좀 쭈글쭈글했고, 엄청 작았다.

2.38 킬로그램. 저체중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안 나오려고 했구나. 엄마 배가 편했구나.



그리고 이제 2년 넘게 키워보니 그때 태변을 먹은 건,

나간다 나간다 계속하는데 엄마가 안 내보내주니까 빡쳐서 태변을 먹은 게 아닌가... 란 생각도 가끔 한다.


100일의 기적이 오기 전까지,

아이는 늘 울어댔다.

지금 생각해 보면 6개월이 될 때까지,

가장 엑기스의 나와 W, 가장 원형질의 나와 W의 모습이 형성되던 때가 바로 그때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가 70일 정도 되었을 때, 상임위를 옮기게 되었다.

법사위는 정무위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훨씬 더 전투적이었다.

그리고 언론노출도도 높았다.


양쪽 지지층 "민원인"의 전화도 정무위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전투적"이었다.

어쩔 때는 보좌진들의 업무가 거의 마비될 정도의 전화가 오기도 했다.

"일하는 국회"를 만들라고 아우성치는데, 정작 그 아우성 제일 많이 하시는 분들은 전화하시는 분들이 아닌가...? 란 볼멘소리가 한 3초 동안 생각날 정도로, 많은 전화가 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원인들의 전화에는 함부로 응대할 수 없었다. 녹음을 해서 자기들끼리 000 의원실 보좌진이 이렇게 불친절하게 응대하더라!라고 또 단체톡방이나 텔방에 올려서 조리돌림을 하기 때문이었다.

상임위마다 지지층과 민원인들의 분위기도 온도차가 있었다. 달랐다.

임신과 출산을 지나 육아의 긴 여정을 지나는 와중에도 국회는 그렇게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의원은 대법원장 인사청문회 간사가 될 것 같다고 했다.

대법원장 후보자 청문회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 여느 때처럼 대한민국 관보를 들여다봤다.

대한민국 관보에는 공직자 재산목록이 매년 올라온다.

그곳은 언론사 "단독"기사의 보고이기도 했다.


후보자의 이름을 향해가는 스크롤 속에... 한 판사의 이름이 내 눈에 걸렸다.

오래전 내가 대학 다닐 때 사귀었던 분의 아버님 이름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민망했다.

영탁의 노래가 내 머릿속에 울리면서

"아니 왜 여기서 나오세요"란 혼잣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녀 재산의 고지거부가 안되어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았는데... 알고 싶지 않았는데...

활자화된 전 여친의 재산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내 머릿속에서 노래가 울려 퍼졌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그리고 동시에

...아, 정말 잘 살고 있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건 일종의 산재 같은 것이라고 둘러댈 참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대법원장 인사청문회에서,

우리 의원은 간사로서 맹활약하였고

35년 만에 대법원장 후보자의 낙마를 이끌어냈다.


그렇게 22대 총선, 우리 직장의 지속가능성이 정해지는 선거철이 다가오고 있었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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