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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Oct 06. 2024

꿈을 쫓는 당신은 이미 그 꿈만큼이나 아름답다.

<나빌레라> 속 심덕출에 대하여

꿈이라는 단어처럼 허망한 단어가 또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꿈을 쫓으라고 말하지만, 꿈이란 현실과 같은 말이 아니다. 꿈을 현실로 만들라는 말은 그래서 얼마간 허황된 것이다. 현실에서 꿈은 그저 잔상만으로 존재할 뿐, 구체적인 형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꿈을 찾는 일이란 모호한 것이다. 현실에서 꿈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면, 그건 꿈이 아니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그것은 꿈보다는 ‘목표’라는 이름에 어울린다. ‘꿈’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형태로 현실에 존재한다.


이를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꿈은 나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것-나빌레라-’과 같이 모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꿈을 이루었는가, 이루지 못했는가를 말하는 것은 타인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모호한 잔상을 따라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현실속에서 그 모호한 꿈의 잔상을 따라가고 있는 그 자신뿐이다. 이렇듯 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은, 드라마 <나빌레라>가 꿈이란 것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지만, ‘꿈’이라는 것을 이 드라만의 방식으로 슬기롭게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빌레라>가 정의하는 꿈은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덕출이 자기 자신에게 건넨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덕출아, 나중에 기억을 다 잃어도 이것만은 안 잊었으면 좋겠는데. 심덕출. 네가 발레를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꿈이 있었다는 것. 잊지마. 알겠지?” 이 말속에서 덕출의 꿈은 발레 선수 같은 것이 아니라, “발레를 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이 모호한 정의는 현실에 투영된 꿈의 잔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발레 선수”라고 말한다면, 구체적인 어떤 모습이 떠오르지만, “발레를 하는 사람”이라고 꿈을 정의한다면 이 꿈은 어떤 모습이든, 어떤 형태든, 어떤 결과물이든 구체적인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그저 발레를 하는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의 꿈은 현실속에 반영된다. 꿈의 잔상이 포개어진 현실은 꿈의 잔상을 걷어낸 삭막한 회색 빛의 현실보다 깊은 채도의 색으로 칠해지고, 꿈결이 포개어진 삶은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빛난다. 꿈은 정성적 가치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꿈을 정량적으로 계산하고 분석하려고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사회가 부과하는 꿈의 이미지라는 것은 가령 발레 국가 대표가 되어 온갖 찬사를 받는 이미지들이다. 그저 발레를 하는 것만으로도 찬사를 받아 충분함에도, 우리 사회는 “발레”라는 종목에서 특별한 성과를 이룬 이미지들을 꿈의 이미지에 가깝게 그려낸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정량적 가치로 산출해 낸 꿈이라는 거대한 무게를 짊어지고 버거워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그저 지금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그것의 성과에 얽매이지 말고,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하면, 당신은 보다 꿈에 가까운 사람이 된 것이고, 당신의 삶은 그것으로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이다.

- <나빌레라>, 2021, TV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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