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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Oct 21. 2024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운명이 된다.

<선재 업고 튀어>속 선재에 대하여

문학 작품은 저마다 나름의 구성을 갖고 있다. 그 구성이라는 것은 작품속 인물의 변곡점마다 존재하며, 그 변곡점을 지난 이후로 그 인물의 삶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어떤 시기를 지난 인물은 그 이전의 인물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이 여러 장으로 구성된 하나의 문학 작품과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인생에서도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존재한다. 마치,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가 더 이상 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호기심과 낯섦의 감정이 익숙함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그 익숙함의 감정으로 권태로워지는 일 역시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삶의 어떤 순간들은 결코 막을 수 없고, 삶의 다음 장으로 가기 위해선, 어떤 결과를 반드시 봐야만 한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삶 역시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어떤 장에서 내가 다치고 깨지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이 피할 수 없는 삶의 어떤 사건들을 어쩌면 우린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다. 이 피할 수 없는 사건들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것을 피하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깨지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를 희망하는 경우도 있다.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속 선재의 경우가 그렇다. 류선재는 고교시절 수영부였고, 수영 국가 대표가 되는 걸 꿈꿨으나, 그의 꿈은 전국체전에서 부상을 얻으며 무산된다. 수영 선수가 되는 꿈을 포기하게 된 선재가 못내 마음에 걸렸던 23년의 임솔은 13년으로 돌아오자마자 선재에게 전국체전을 나가지 말라고 강하게 권유하지만, 선재가 전국체전에서 부상을 당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의지는 막을 수 없고, 선재의 한 장은 그렇게, 좌절로 끝나게 된다. 여기에서 좌절이란 정신적인 굴복까지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꿈이 좌절되었음을 말할 뿐이다. 훗날 선재는 임솔에게 비록 부상을 얻더라도 전국체전에 나가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비록 다치고 꿈이 좌절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전국체전에 나갔을 것이다. 결말이 어찌됐든, 결말을 알 수 없는 선재의 입장에선 지금 자신이 전력을 다해 즐기고 있는 그 일을 후회없이 계속 해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선재에게 사랑도 수영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수영과 꿈에 전념하던 한 시절이 끝나고, 선재의 두 번째 장은 사랑의 마음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언제나 타이밍이라고 했나. 처음 본 순간부터 짝사랑했던 고등학교 동창 임솔을 향한 마음으로 그는 노래를 했고, 연기를 했을 것이다. 그의 순수하고 투명한 노래와 연기는 그를 인기 스타의 반열에 올렸지만, 그는 이루지 못할 사랑 때문에 공허하고 외로웠을 것이고. 그는 그렇게 자살을 택했을 것이다. 어긋나기만 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원망을 담아서.


선재가 자살을 선택한 순간, 임솔은 우연히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그의 자살과 자신의 하반신 마비를 막기 위해 과거로 돌아간다. 그 시간여행 속에서 어떤 미래는 막을 수 있지만, 어떤 미래는 막을 수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가령, 임솔이 당한 교통사고는 막을 수 있었고, 임솔의 집에 발생한 화재도 막을 수 있었는데, 선재의 부상과 선재의 죽음은 좀처럼 막기 힘들었다. 왜일까. 그건 아마도,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계가 깊은 것 같다. 그 결말이 어떻든 자신이 좋아하는 수영으로 어떤 결과를 보고 싶어하는 선재의 마음은 임솔의 의지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선재의 바람은 그 자체로 불가역적인 운명이 된다. 마찬가지로 선재가 임솔을 향해 품은 감정 역시도, 분명히 사라져야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임솔을 알아본다. 이 또한 선재 자신의 바람에 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품은 강렬한 의지와 바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운명이 된다. 마치 선재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 의지와 바람은 타인이 막아설 수 없다. 임솔이 선재를 막아서는 것을 실패했듯이 말이다. 차라리 스스로 무너지고 쓰러진다면 몰라도, 타인은 다른 타인의 운명과 삶을 바꿀 수 없다. 


<선재 업고 튀어>는 선재를 파괴적인 운명으로부터 “업고 튀”기 위한 임솔의 노력이 극 전체를 채우고 있고, 임솔을 적극적인 구원자로 선재를 구원을 기다리는 인물로 그려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 임솔은 선재를 업고 튀지 못했다. 임솔은 임솔대로, 선재는 선재대로. 자신들의 삶에 충실한 것으로 스스로 그저 삶의 다음장으로 나아갈 뿐이다. 미래는 예정되어 있고, 어떤 미래는 불가역적이지만. 그 미래 이후의 삶은 언제나 그 사람이 정하는 것이다. 선재가 수영을 포기하고도 길을 찾은 것처럼, 그리고 임솔을 계속해서 알아보고 다시 자신의 운명을 찾은 것처럼 말이다. 삶은 과거의 반작용을 딛고 더 큰 작용의 힘으로 끝없이 다음 장으로 흘러 간다. 그러니 간절히 바라고 간절히 원하는 것을 향해, 힘껏 전진하고, 힘껏 맞서고, 결과에는 연연하지 마시길. 삶은 그렇게 계속해서 다음 장으로 흘러가는 것이고, 그렇게 계속해서 맞서는 것으로 누구보다 멀리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니까. 이와 관련하여,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개츠비>에 남겨놓은 문장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면 좋을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선재 업고 튀어>, 2024,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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