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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Oct 06. 2024

그것으로 충분하다. 충분하고, 또 충분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속 여름에 대하여


“지금, 행복하신가요?”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적어도 OECD 의 통계적 지표들-자살률 1위, 출산율 뒤에서 1위, 연간 근무시간 5위, 가계채무 5위 등-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지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는 행복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부질없다고. 그것이 실체가 없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의 획득과 추구가 삶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말하기도 한다. 그 말은 일견 옳은 것처럼 보인다. 행복한 삶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피터지게 입시 공부를 했고, 모욕과 멸시가 쏟아지는 사회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하루하루를 그저 버텨내며 살아간다. 하지만, 항상 행복은 먼 곳에만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삶의 대부분은 일과 관계속에서 억압당하고, 피로스럽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이란 것에 그리고 삶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피로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된다. 행복이란 것은 과연 그 많은 인내와 고통을 감수해가면서 획득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하는.


행복은 삶의 목표가 될 가치가 있는 것일까? 행복이란 가치는 그 자체로 추상적이기 때문에, 그 추상적인 가치를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가치인 행복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행복한 삶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에게 토마스 칼라일의 대답을 인용할 수 있을 법하다. “그렇다면 당신은 몇십 년 전에 무슨 권리가 있어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토마스 칼라일의 이 말은 인간이 결국 행복을 추구하는 동물이며, 행복 추구의 권리는 모든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해석된다. 하지만,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힘들기만 한 걸까. 이 길고 긴 고통과 인내를 견디고 견뎌내다보면, 과연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고, 한편으론 이 긴 고통과 인내의 끝에 얻게 된 행복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게 된다. 행복의 추구는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라고는 하지만, 과연 그것이 획득 가능하긴 한 것일까?


왜 우리는 불행할까?

우리는 행복한 삶의 추구를 위해서 평생을 무던하게 애쓰며 살아가는데, 자살률과 출산률 등의 여러가지 지표들을 볼 때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행복한 삶을 획득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경제 지표가 극심히 낮아서 국민들이 빈곤에 허덕이느라 불행한 것은 아니다. OECD 가입국중 경제규모만 놓고 보았을 때, 최소한 중위권은 되는 경제규모를 갖고 있는데, 우리 나라는 비슷한 경제 규모를 갖고 있는 국가들 보다 더 불행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불행’한 것이 결국 우리 사회 내부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행복에 대한 기준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행복한 삶에 대한 정형화된 공식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항상 미래를 위한 공부를 했다. 주입식 교육과 함께 아주 정형화된 삶의 방식도 주입받았다. 가령 이런 것이다. 10분만 더 공부하면 남편 또는 아내의 얼굴이 바뀐다는 등, 성공만 하면 호화롭고 여유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등의 말들 말이다. 우리 사회는 아주 오래전부터, 행복의 기준을 각 개인들에게 맞추지 않고, “사회구성원이 누리는 평균 이상의 소득과 그에 걸맞는 삶”에 맞춰 왔다. 성공이 곧 행복의 척도가 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 즉 우리 사회가 제시하는 ‘성공’은 과연 행복한 삶을 보장할 수 있을까?



 ··· 1+1은 2가 아닌 소음일 뿐이다.

“샤하르 교수는 꿈에 그리던 물건을 소유하는 것을 행복이나 즐거움을 느끼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 해도 지나치게 많으면 없느니만 못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좋아하는 음악 두 곡을 들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일 더하기 일은 이가 아니라, 소음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삶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일에 ‘No’라고 할 줄 알아야 시간과 정력을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에 사용할 수 있다. 그럴 때 행복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 <행복이란 무엇인가>, 탈 벤 샤하르 강의, 왕옌밍 엮음


우리가 생각하는 부유한 삶, 성공한 삶, 행복한 삶은 모두 물질적 퓽요를 등에 업고 있다. 흔히들 물질적 풍요가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은 사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얻어 낸 결과값이 아니다.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장한다는 우리의 생각은 우리 사회가 각 구성원들에게 주입한 욕망의 형태일 뿐이고, 우리 사회가 구성원들이 이 사회에서 최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유도한 거짓된 동기의 형태일 뿐이다.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순간, 우리의 삶은 끝없는 욕망의 소음 속에서 신음하게 된다. 소유하지 못한 물질들에 의해 불행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불안을 느끼게 된다. 물질적 풍요가 어느정도 행복에 기여하는 바가 있긴 하지만, 행복을 전적으로 보장해주지 않는다, 물질적 풍요가 보장해주는 것은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는 길 뿐이다.



행복의 전제조건은 ‘시간’이다.

그렇다면, 물질적 풍요는 어떻게 행복에 가까워지는 방법을 제시해주는가? 아래의 예시를 들어 대답해보기로 하자. 한때 농담삼아 젊은 사람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돈 많은 백수가 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돈 많은 백수라니? 단순 밈처럼 보이는 이 말은 사실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돈많은 백수”라는 꿈의 맹점은 백수라는 무직 상태다. 즉, 먹고 사는데 지장없이 그냥 ‘놀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의미다. 돈은 바로 그런 부분에서만, 즉 그것이 시간을 보장해줄 때에만 행복을 보증하는 수단으로서 유효하다.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장한다는 말은 엄밀히 말하면, 시간의 풍요가 행복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의 중요성보다도 물질의 중요성에 온 마음을 빼앗긴다. 그건 생산성을 중요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가 구성원들을 매혹시키는 탓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세속적인 사회 앞에서 온전히 자립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상에서의 로그아웃”으로 휴식을 찾아가는 여름을 주제로 한 TV N의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는 여름을 일상으로부터 탈선시켜 한 시골 마을로 보낸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는 시청자들을 세속으로부터 탈출시키고, 물질적 풍요가 아닌 시간의 풍요속에서 주인공 ‘여름’이 치유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권모술수가 판치고, 우직하게 일만 하는 것으론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속세의 삶에서 겨우 단돈 500만원만을 들고 시골 마을로 떠나온 여름은 시골 마을 안곡에서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


번아웃으로 지칠대로 지친 여름을 다시 일으켜준 것은, 시골 마을 안곡에서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것이나 하는 시간들이다. 특히 이 시간, 텅 빈 그녀를 다시 가득 채워준 것은 다름아닌 안곡의 도서관에서 책 속의 인물들과 독대하는 순간들이고, 안곡의 순박한 사람들과 마주하는 순간들이다. 이를 통해서 여름은 행복의 중요한 전제가 바로 자기 자신이 온전히 이 삶의 주인임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풍요한 상태, 즉 ‘시간의 풍요’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서울에서의 바쁘고 고된 사회생활에 지친 그녀가 안곡 살이를 하며 느낀 것은 돈 벌이가 조금 부족해도, 비싼 차를 타지 않아도, 그 잘난 남자 친구가 없어도, 그럴싸한 직업이 없어도. 자신에게 온전히 주어진 시간이 있다면, 그저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즉 “충분하다”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열망과 동경은 우리 자신을 망치고, 동시에 우리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개인의 욕망을 부추기는 시스템 아래에서 작동하고, 심지어 그것, “개인의 사적인 탐욕의 추구가 공공의 입장에선 선”-애덤 스미스, <국부론>-이라고 옹호하기 까지 한다. 하지만, 실제의 사례들. 특히 요즘 말이 많은 부동산 전세 사기와 같은 사례들을 보면 오히려 이 잠언이 더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그 잠언은 바로 “탐욕스러운 자는 이웃에게 독을 전파한다”는 것이다. 끝없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을 적극적으로 두둔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사회가 무분별하게 퍼뜨린 독으로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이 몸을 추스르고 다시 행복한 내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2022,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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