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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Oct 06. 2024

나의 멸망마저 사랑할 수 있다면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속 동경에 대하여

변변치 않은 삶이었다. 부모님은 없고, 어린 동생을 키운다고 일찍부터 일 중독에 빠져 일만 하며 살았다. 학자금 대출은 계속해서 목을 조여 오고, 남자 친구에게는 바람을 맞았다. 슬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무던하다. 삶은 그저 그렇게 무던하게 흘러간다. 이 삶에는 희망도, 절망도 없다. 모든 것이 그저 감내해야만 하는 어떤 것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그저 삶을 흘러가듯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멸망이 찾아 왔다.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3개월 후 죽는다. 지금 당장 수술하면 1 년은 살 수 있다. 하지만, 수술이 성공할 것이란 보장은 없다. 수술을 하다가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수술을 하는 게 맞는 걸까? 그렇게 더 얻은 삶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의 주인공 탁동경이 1화에서 마주한 상황이다. 죽음을 개인적인 멸망이라고 부르는 게 틀리지 않을 테니, 동경의 죽음을 멸망이라고 불러보자. 갑작스러운 멸망을 맞이한 동경은 허무와 비관에 빠져 세상을 멸망시켜 달라는 소원을 빈다. 행복하지 못할 바에, 모조리 멸망해버렸으면 좋겠다. 이대로 나와 함께 이 세계도 완전히 멸망해버렸으면.


그런 바람을 입 밖으로 내자, 수많은 것들의 죽음을 관장하는 신적인 존재 ‘멸망’이 동경의 집을 찾아온다. 멸망은 인간을 미워하고, 인간의 세계가 멸망하기를 바라는 동경의 소원을 반갑게 받아들인다. 멸망은 동경이 세계의 멸망을 빌기를 바라며 동경의 곁에 머문다. 이제, 동경이 소원을 빌면 모든 것이 끝난다. 동경이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것과 함께 모두의 삶을 함께 비관하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이 세계를 저주한다면. 모든 것이 끝날 터였다. 하지만, 동경이 100일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난 이후로 삶을 대하는 태도를 점차 바꾸게 된다. 이전까지의 동경이 자신의 감정을 죽인채로, 무던하게 살아갔다면,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난 이후로 점점 대담해진다. 하지 못하던 쓴 소리도 하고. 누군가를 치열하게 사랑해본 적도 없었던 동경이지만, 말 그대로 목숨을 담보로 한 치열한 사랑도 시작하고 말이다.


죽음이 찾아온 순간, 얼마남지 않은 삶은 곧 멸망이나 다름 없다며 포기하는 순간. 멸망을 치열하게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동경의 삶은 이전과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멸망”은 죽음 역시 함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멸망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사랑하는 것이기도 한 셈이다. 죽음을 사랑하는 것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것. 죽음을 곁에 두지만, 그것에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가는 것. 비록 허락된 삶이 찰나에 불과하더라도. 치열하게 사랑하고, 치열하게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 그것으로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하는 게 아닐까. 흔한 양산형 웹소설의 제목을 빌려온 것만 같은, 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는 얼핏 보기엔 흔한 판타지 로맨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게 이해해보자면(혹은 약간의 과대해석을 덧붙이자면), 이 드라마는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삶속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삶 근처에 두었을 때, 죽음이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되고. 무던하게 흘러만 가던 삶이 치열한 격류에 휘말릴 때. 오히려 삶은 그 치열함에서 더 빛을 낸다. 순탄하게만 흘러가고 있었다고 믿었던 삶은, 어쩌면 순탄하게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고여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고여있는 상태에서의 주변 환경에 의한 작은 물결의 일렁임을, 우리는 어찌되었든 우리가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삶의 매순간 순류만을 만날 수는 없는 일일테니까. 무던하고 순탄하게 흘러만 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치열하게 부딪히고, 치열한 충돌로 얇은 물결이 깨질 때에야 말로 삶이 어딘가를 향해 흘러가고 있음을 명백하게 증명할 수 있다.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를 보며, 동경과 같이 죽음을 곁에 두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을 생각한다. 100일이라는 기한이 있기는 했지만, 죽음은 예상보다 더 빨리 찾아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찾아온 죽음을 나는 되돌릴 것인가. 만약 되돌린다는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나 역시 동경처럼 무의미한 삶에 내심 어떤 후회감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죽음을 생각하며 삶을 생각한다. 죽음마저도 사랑할 자세로 삶을 살아간다면, 이 삶의 엔딩도 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의 엔딩처럼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하는, 짧은 고민을 남겨본다.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2021,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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