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미안 Oct 27. 2024

거짓된 욕망은 모두 불사르고.

<안나>속 유미에 대하여

<안나> 속 유미를 갉아먹는 것은 무엇일까. 왜 그녀는 안나라는 타인의 이름을, 타인의 삶을 살고 싶어했을까. 드라마로 본다면 유미의 행동이 굉장히 괴상해보인다. 그리고, 난 이렇게 정직하지 못한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를 싫어한다. 그런데도, 말못할 고통을 꾹 참고 끝내 이 시리즈를 다 봤다. 이 시리즈를 보는 동안 느껴진 고통의 원인은 아마도 내가 드라마를 통해서 나 자신이 가장 감추고 싶어하는 본능이 자극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은 한 번도 끝까지 해볼 수 없었던 사람.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 평범하기를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평범해질 수 밖에 없는 사람. 현실과 이상의 낙차에서 발생되는 열등감과 정체성의 균열. 작은 균열로 부서진 정체성, 타인의 시선에 맞춰서 재조립되는 만신창이의 정체성. 물론, 내 경우엔 유미처럼 극적인 리플리 증후군을 겪진 않았다. 다만. 할 수 없다는 현실과 하고 싶다는 이상 사이에서의 낙차로 발생되는 정체성의 균열로 오랜 시간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시간을 보내긴 했다.



나의 한계를 규정하는 세계

<안나>에서 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지쳐가고 시들어가는 유미의 젊은 나날들을 본다. 마음먹은 건 뭐든 할 수 있다는 어린 시절의 포부와 자신감이 꺾이는 것은 순식간이다. 세상은 어떻게든 넌 할 수 없다고, 너처럼 학력도 없는 사람은 게으르고 멍청해서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내 말을 절대 복종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윽박지른다. 세상은 당신의 겉모습을 보고 당신을 그저 그런 사람으로 섣부르게 판단하고 모욕한다. 유미의 분노는 그 지점에서 폭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마음먹은 유미는 타인의 삶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이미 힌번 타인의 삶을 모방한 경험이 있는 유미는 이미 그것이 오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유미는 실패로 얼룩진 과거를 굳이 다시 기억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만을 고민한다. 하지만, 운명은 배드 엔딩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 현주가 유미에게 이미테이션 시계를 선물한 것은 일종의 암시가 아니었을까. 기껏해야 네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일 뿐이라고. 그러니, 너는 그 정도로 적당히 만족하고 살라고.


세상이 나의 한계를 규명해 보일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이런 것밖에 안된다고 비웃을 때면, 나는 언제나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노력했다. 유미 역시 세상이 자신에게 어떤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내보일 때마다,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지만. 보통의 노력으로는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런 유미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다름아닌 타인의 삶을 모방하는 일이다. 유미의 모방은 아주 적극적인 모방으로, 안나의 이름을 빌리고, 지위를 빌리고, 안나의 삶 자체를 빌려온다. <안나> 속 유미의 소름끼치는 이 선택은 유미를 기이한 존재로 만들고, 불편하고 나쁜 존재로 전락시킨다. 하지만, 나는 <안나>를 보며 유미의 마음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세상이 규정해놓은 한계. 그리고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 밖에 없지 않았을까. 저 한계 바깥에서 살아가는 어떤 사람의 삶을 모방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었을까.



타인을 모방하는 것으로 공허감은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삶을 모방하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욱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그런 욕망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자극한다.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는 <안나>의 유미처럼 리플리 증후군을 겪을 수밖에 없다. <안나>의 유미는 그저 극단적인 리플리 증후군의 모습과 결말을 보여줄 뿐이다. 허구의 말을 진실이라고 믿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를 일컫는 리플리 증후군을 겪는 주인공을 보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싶겠지만, <안나>의 유미는 단순한 반사회적 인물에 그치지 않고, 이상앞에서 좌절한 수많은 현대인들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현대인들의 초상인 유미를 전면으로 내세운 이 작품의 결말 속에서 온갖 욕망이 전시되는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잘못된 욕망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얻을 수 있는 답이 있을 것 같다. <안나>의 마지막 화를 보면, 유미는 결국 자신이 타인의 삶을 훔쳐서 얻게 된 것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자신에게 지위와 성공을 약속해준 거짓말이 어느순간 자신을 속박하게 되고, 유미는 욕망을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자유와 자유로운 상태에선 얻을 수 없는 욕망의 사이에서 망설이는데, 결국 최종적으로 유미는 자유와 욕망 중 자유를 선택한다. 유미는 마침내 타인의 삶을 모방해서 얻게 된 것들을 모두 불태운다. 그리고,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진, 그 지평에 닿기까지 주변엔 아무것도 없는 황야를 끊임 없이 걸어간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 드라마는 한국이 아닌 타국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유미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마침한다. 이때 그녀의 표정은 안나의 삶을 훔쳐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었을 때보다도 더 자유롭고 평온해보인다.



모두의 삶은 저마다의 궤적을 그리며 뻗어가니까.

드라마 <안나>에서 유미 역시 안나라는 이름을 버렸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안나>속 처량하게 타인의 삶을 갈구하고 욕망하는 유미를 본다. 그리고, 그 파국적 결말을 지켜보며, 그 파국의 끝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유미를 본다. 나의 마음 역시 그렇게나 혼탁하지는 않았는가. 욕망을 권하는 현대사회이지만, 그 욕망이 온전히 나 자신의 자유적인 의지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타인의 삶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안나> 속 유미의 좌절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갖고 싶은 타인의 삶이 있지만, 어떤 식으로도 가질 수 없는 타인의 삶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질 수 없는 어떤 삶이 더 가치있거나, 쉽게 가질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삶이 더 가치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저마다의 방향과 속력으로 드넓은 우주에서 궤적을 그리며 어딘가를 향해 끊임없이 뻗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궤적은 저마다의 개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많은 유미들이, 미디어에 잘 포장된 타인의 삶만을 좇다가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어떤 장면들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안나>, 2022, 쿠팡플레이

이전 14화 나의 멸망마저 사랑할 수 있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