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과 행복의 계절이 반복되기에
불행은 계절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는 계절처럼 불행도 견디고 견디다 보면 사라질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겨울에서 다시 봄으로. 불행은 이름만 바꿔갈 뿐 지치지도 않고 내 옆을 꼭 지켰다.
더위가 사라지면 안구 건조증이 찾아왔다. 안구 건조증이 잦아들면 콧등을 베는 추위가 마중했다. 추위마저 누그러지면 미세먼지가 시작됐다. 오랜 시간 불행을 마주하며 내가 알게 된 사실이란 결국 그런 것이었다.
불행이란 기다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막아내야 하는 것이라는 것.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태수
배와 허리에 약간의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아직 방안은 컴컴했다. 주말의 여유를 누리고 싶어서 이리 저리 뒤척거리며 잠을 청했다. 겨우 일어나보니 오전 6시 반이다. 요가매트를 깔고 유투브를 보며 스트레칭을 한다. 최근에 생긴 루틴이다. 통증으로 이전보다 일찍 일어나 스트레칭을 한다. 숨을 쉬는 것처럼 운동을 하지 않고는 생존이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잔뜩 게으름을 부리고 집안을 어슬렁거리다가 눈에 띈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쓴다. 나는 이 여유가 무척이나 감사하다. 2주간 아껴 읽었던 에세이 책의 구절을 적는다. 일상에서 느낀 담백하고도 통찰력 있는 글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이런 문장력을 갖출 수 있을까? 글을 더 잘 쓰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났다.
역에서 800m 떨어진 회사를 1년 넘게 다니면서, 나는 한국 계절의 혹독함을 온몸으로 겪었다. 따스한 봄날과 시원한 가을은 한낱 바람처럼 지나가버리고, 온 몸을 덜덜 떨게 하는 추위와 땀으로 온통 젖어버리는 더위를 이겨내야했다. 사실 이겨내기보다는 속절없이 버티고 당하는 편에 가까웠다. 냉동과 해동을 반복하다보니 몸뚱아리는 급격하게 쇠잔해졌다.
앉아서 8시간 업무를 하면서 소화불량에 복부팽창으로 음식도 이전보다 많이 먹지 못했고, 음식을 먹은 후에는 꼭 걸어야 한다. 어찌보면 내 몸은 기특하게도 스스로 환경에 맞추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매일 삼시세끼 먹던 습관은 예전일이 되었고, 아침은 안 먹어야지 더 집중도 잘되고 몸이 편했다. 밥과 물은 천천히 먹었다. 아침 저녁 스트레칭은 살기 위해 할 수 밖에 없었다. 피곤해서 밤 10시만 되면 저절로 눈이 감겼다.
소식하고, 일찍자고, 운동하기. 나는 점점 건강해지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내 몸은 진화하고 있었다. 매일 직장에 나가는 건 분명 피곤하고 스트레스도 받는 일이지만 게으름을 따르고 싶은 본성을 거슬러 나를 더 건강하고, 강하게 만드는 훈련을 할 수 있게 했다. 감사한 일이다.
어제는 할아버지 생신이어서 온 가족이 모여서 먹고 마셨다. 청계산의 맑은 공기에 분홍색 벚꽃이 흩날리는 것을 바라보며 맛있는 고기파티를 했다. 게다가 산 속에 있는 카페에서 수제 레몬케이크와 인절미를 곁들인 티타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행복이다.
오늘은 드디어 부활주일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대신 감당하시고, 부활하신 날이다. 부활절 전 일주일 동안은 고난주간으로 부른다. 부활의 기쁨은 고난의 불행 후에 찾아온다. 한국 날씨 덕에 나는 늘 매서운 고난주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항상 고난주간에 힘들고 아팠다. 그리고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따스해진 날씨에 몸은 회복되고 컨디션도 좋아졌다.
고난. 이왕이면 피하고 싶다. 고난을 받으라는 것은 저주에 가깝다. 하지만 고난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에 가까운 것이다. 고난에 잠식되어 불행하다는 비탄에 빠지기 전에, 다가올 '부활'과 '행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감사할 이유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