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일은 번거롭다
임신, 출산의 노고에 대해 말하기
배가 점점 나오고 있다. 작은 수박 하나를 뱃속에 짊어지고 다니는 기분이다. 여름철 마트에 가서 잘 익은 수박을 골라 끙차, 하고 들고 집에 올 때의 고단함을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느낀다. 가끔 부모님과 통화하며 근황을 전하는데, 항상 아빠와 엄마의 반응이 달라 흥미롭다.
아빠, 나 이제 배가 점점 더 나와서 몸이 좀 힘들어.
라고 하면 아빠는 늘 이렇게 말한다.
그럼, 우리 딸은 지금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데 힘든 게 당연하지!
아빠는 내가 위대한 업무를 수행하는 중이라고, 여자들이 힘들다는 이유로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진작에 멸망했을 거라고 한다. 아빠의 말을 들으면 임신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은 뭐랄까, 적당한 거리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도 그렇다. 남편은 점점 불러가는 내 배가 ‘신기하다’고 한다. 네 뱃속에 정말로 사람이 있단 말이야? 배가 부풀어 오르며 마침내 배꼽이 까뒤집어지자, 남편은 드디어 배꼽의 바닥을 볼 수 있는 거냐며 흥분과 경이에 찬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임신은 위대하고, 신비하고, 경이로운 일. 본인은 절대로 할 수가 없는 일이다. 평생 임신을 경험해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적당한 거리를 갖고 바라보는 시선이다.
반면 임신을 경험해 본 사람들의 말은 다르다.
엄마, 이제 좀 몸이 무겁고 힘들어.
라고 하면 엄마는 말한다.
어떡하냐, 이제 배가 더 나올 텐데. 나중에는 태동 때문에 아파서 잠도 못 잘 텐데. 지금이라도 많이 돌아다니고 놀아라.
엄마는 나에게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배가 계속 더 나올 텐데 회사는 어떻게 다닐지를 걱정한다. 밥하지 말고 무조건 시켜먹으라고 이야기한다. 애는 어떻게든 알아서 잘 크니까 네가 먹고 싶은 걸 먹으라고 한다.
중힉교 때 담임선생님은 자기 와이프가 가장 예뻤던 순간은 막 아기를 낳고 그 아이를 안고 있던 순간이라고 했다. 오랜 진통으로 입술은 다 부르트고 실핏줄이 다 터진 얼굴로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성모 마리아처럼 아름다웠다 했다. 지금의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님, 사모님은 방금 지옥 문턱까지 갔다 왔는데 그걸 보고 이쁘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모님도 지금 내가 너무 이쁘다고 생각했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말은 아내는 하늘이 노래지도록 생사를 넘나들 때 자기는 밖에서 초조하게 담배나 피우며 기다리다 탯줄이나 잘라주었을 사람의 말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려서, 그 말을 외우듯이 흡수해서 여기저기서 말하고 다녔다. 선생님이 한 말이니 틀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과 후 토론 수업을 할 때였다. 내가 저희 담임선생님은 애 낳고 난 뒤의 아내분이 제일 예뻤대요,라고 말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듣던 기혼 여자 선생님의 뜨악한 표정을 기억한다. 그 표정이야말로, 할 말은 많지만 애 앞이니 하지 않겠다... 는 표정이었다.
직접 몸으로 이 과정을 겪어본 사람, 또는 그걸 몸으로 겪어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해 주는 말과, 평생 그런 가능성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해 주는 말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직접 겪어본 사람, 또는 직접 겪은 사람을 가까이서 유심히 지켜본 사람은 안다. 그 위대한 일은 대단한 번거로움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번거로움이란 이런 것들이다.
배가 나와 엎드리지도 못하고, 이리 누워도 저리 누워도 느끼는 불편함.
전에 입던 옷들이 안 맞아서 부른 배가 다 들어가는 커다란 봉지 같은 펑퍼짐한 임부복을 사 입어야 하는 번거로움.
순례길 800km도 걷던 사람이 이젠 작은 경사길도 헥헥거리며 몇 번씩 멈춰 서게 하는 피곤함.
입덧 때문에 향이 강한 손소독제를 바르면 한참을 구역질해야 하는 거북함.
호르몬 영향으로 겨드랑이가 까맣게 착색되고 목주름이 짙어지는데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겠는 부끄러움.
커진 자궁이 혈류를 막아 하지정맥이 생기고 푸르고 검은 핏줄이 다리에 울룩불룩 돋는 징그러움.
철분제 때문에 변비가 생겨 야채를 코끼리처럼 먹어대도 화장실에서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당혹스러움.
무엇보다도, 출산예정일이 다가올 수록 느끼는 엄청난 불안과 두려움.
나는 위대함보다는 이런 번거로움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좋았다. 위대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늘 이런 번거로움은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작은 것들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 뱃속에 또 다른 사람 하나가 크고 있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하는 자세다. (아니, 본인은 감수해 본 적도 없으면서!) 하지만 번거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서 뱃속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임신의 위대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번거로움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것이 이 일의 위대함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는 것은 단지 새 생명을 세상에 탄생시키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크고 작은 번거로움과 그 끝판왕인 출산의 고통을 거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번거롭지 않은 위대함이 있을까. 그런 위대함은 그저 우아하고 팬시할 뿐 허상일 것 같다. 마치 오피스 드라마 속 커리어우먼처럼. 드라마 속 오피스 생활이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최종보고서 하나를 완성시키기 위해 그가 몇 개의 파일을 만들고 버려야 했는지, 그래서 그 사람의 눈이 얼마나 충혈되었는지, 몇 통의 인공눈물을 비웠는지, 피로를 견디기 위해 커피를 하루에 몇 잔씩 마셔야 했는지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위대한 일을 수행한 누군가에게 ‘와, 정말 대단하다. 엄청난 일을 했네.’라고 말하기보단 ‘아이고, 그동안 정말 수고가 많았겠네.’ 하고 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가 그 수고의 목록에 대해 긴 수다를 시작할 수 있도록 기다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