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수들의 밤은 계속되고 있다.
자궁이 커지면서 방광이 눌리니 새벽 서너 시쯤 깨어 화장실을 다녀오게 된다. 그러고 나면 다시 잠들지 못한다. 임신성 불면증은 출산 후 밤중 모유수유를 준비시키기 위해 호르몬이 일부러 불면증을 만드는 거라고 한다. 아니, 그럼 그때 못 자면 되지 벌써부터 못 잘게 뭐야? 지금 체력을 비축해 놔야 나중에 수유를 할 힘이 남아돌 거 아니야? 아아, 엄마 몸은 너덜너덜해져도 좋으니 갓난아이는 절대로 굶겨선 안된다는 준엄한 진화의 법칙이여.
한번 눈이 말똥말똥 떠지고 나면 갑자기 온갖 걱정들이 떠오른다. 호시탐탐 나를 노리는 밤의 맹수들이 한 놈, 한 놈 찾아와 내 곁을 맴돈다. 회사는 언제까지 나갈까. 출산휴가는 최대한 늦게 가라던데 몸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38주, 39주까지 버티다가 혹시 무리해서 애가 잘못되는 건 아닌가. 남은 기간 동안 대체인력에게 인수인계는 잘할 수 있을까. 만삭이 되면 손이 붓는다는데 글 쓰는 것도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이 걱정 저 걱정을 하고 있노라면 문득 외로워지려 하는데, 그때쯤 뱃속의 아이가 내 배를 퉁퉁 치면서 신나서 꿈틀거린다. 엄마는 걱정이 많은데 너는 뭐가 그렇게 신나니? 모로 누우면 모로 누운 그 바닥면을 계속 발로 차고 똑바로 누우면 오른쪽 배가 튀어나올 만큼 쿵쿵 찬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잠들어 있는 것 같은 밤, 우리 둘은 이 시간에 함께 깨어 있다. 조금 덜 외로워진다.
나는 불면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벌떡 일어나 (아니다. 재빨리 일어나 앉으면 잔뜩 부푼 배 근육이 뭉치기 때문에, 늘 옆으로 조심스레 돌아누웠다 일어나야 한다)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켠다. 내 곁을 맴도는 맹수들의 이름을, 걱정과 불안의 목록을 백지에 하나씩 적는 새벽이다.
올해 하필 승진 연차다. 여름에 아기를 낳으러 가는데 올해 평가는 잘 받기 어렵겠지. 그럼 승진은 할 수 있을까. 설령 육아휴직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출산휴가 석 달의 빈자리는 크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은 다 고만고만한데 평가는 상대 평가라서, 제도는 부재한 사람을 노려 잽싸게 불이익을 주곤 한다. 내가 이전에 이 팀에 어떤 식으로 기여했든 간에, 아이를 낳고 키우러 갔다는 이유로 “비즈니스 기여도”가 낮은 나는 기회에서 배제될 수 있다.
회사 제도상 연간 평가 기간의 1/2 (183일) 이상을 휴직하면 고과 평가 대상자가 되지 못한다. 그 말은, 길게 휴직할수록 다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시점이 늦어진다는 것이고, 승진 또한 계속 늦어진다는 뜻이다. 날짜 계산을 잘 해서 평가 대상자가 되도록 복직한다 하더라도,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기는 쉽지 않다. "너는 '쉬다가' 왔잖아"라는 말로 하위 고과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애를 낳고 키우고 왔다가 몇 년째 승진 누락한 여자 선배들은 능력이 없어서,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 그런 이유로 승진이 늦어졌다.
그래서 어제 회사에서는 점심시간에 혼자 엑셀 창을 열어놓고 고과 평가의 대상자가 되려면, 또는 대상자가 되지 않으려면 언제부터 언제까지 쉬어야 하는지 날짜를 계산했다. 불 꺼진 사무실에서 12월은 며칠인지, 1월은 며칠인지, 내년 2월이 혹시 윤달은 아닌지 네이버 날짜 계산기를 뒤져 하나씩 기입하고 있자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짐승도 새끼를 낳고 물고 빨며 키우는데 사람이 자기 새끼를 낳고 돌볼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건 슬픈 일이다. 일이 뭔데? 회사가 대체 뭔데? 휴직 날짜에 SUM(총합계) 수식을 걸어 계산을 하고 있자니 그냥 나 한 사람이 욕심을 내려놓으면 모두가 편한데, 다 가지려고 무리한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회사 선배의 지인이 회사의 고과 평가 일정을 고려해 아기를 제왕절개로 낳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몇 월 며칠까지 애가 나오지 않으면 고과 평가 대상자에 해당되어 버리고, 출산을 하러 간 자신은 하위 고과를 받을 가능성이 크니, 출산의 마지노선 날짜를 잡아놓고 미리 철학관에 가서 제왕절개 날짜 후보를 받아왔다고 했다. 처음 그 글을 읽었을 때는 아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회사가 뭐라고…라고 생각했다. 회사 평가가 중요하긴 하지, 근데 출산 방식과 출생일을 정할 만큼 중요한가?
하지만 이제 출산휴가를 앞두고 임산부의 별에 속해 보고서야 깨닫는다. 여자들이 출산과 육아로
인한 공백을 앞두고 얼마나 큰 불안감에 시달리는지를. 뭐라도 확실히 해 두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자 한다는 것도. 왜냐면 애를 낳고 난 뒤의 나는 더 이상 지금의 내가 아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애를 낳고 나면 지금처럼 내가 하는 일에 몰두할 수 없다는 걸 수많은 매스컴과 SNS에서 너무나 상세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임신만 하면 나는 자유로운 보헤미안처럼 훌훌 칼퇴하며 편히 살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임신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적인 문제,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앞으로 예상될 커리어 공백 기간에 대비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남은 N일 동안 무엇 무엇을 해 두면 나중에 나와 아기가 좀 더 안정적인 환경에서 같이 자랄 수 있을 것인가.
그걸 위해서라면 전에는 귀찮아서 또는 쑥스러워서 하지 못했던 일들도 할 수 있다. 오늘은 상사에게 이러이러하니 저는 올해 꼭 좋은 고과를 받아야 한다고, 저 진짜 큰일 난다고 천연덕스럽게 자기 PR을 했다. 전 같았으면 괜히 낯 뜨거워서 입을 다물었을 테다. 나중에 시간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 링크드인에 이력을 업데이트해둔다. 그동안 쓴 토막글들을 모아 다음 기회에 투고할 수 있게 모아 둔다. 동면의 겨울을 앞둔 불안한 다람쥐처럼 부지런히 눈에 불을 켜고 도토리를 모은다.
오늘은 한동안 방치해 두던 인스타그램 글쓰기 계정에 근황을 업데이트하다가, 다른 작가님의 소식을 우연히 접했다. 한동안 업로드가 뜸한 것 같더니 몇 개월 전에 아기를 낳았다는 포스트가 올라와 있었다. 그 뒤로도 드문드문 하지만 꾸준히 이어지는 포스트를 보고 무척 기뻤다. 그녀는 아기를 낳은 후에도 소규모 팟캐스트에 출연하고, 작은 잡지에 글을 써 올리며 글 쓰는 일을 꾸준히 계속하고 있었다. 애를 낳고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게 힘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기를 낳아도 계속할 수 있다. 조금 더디게 갈지언정 또는 방향을 조금 수정할지언정 가고 싶어 했던 방향으로 계속 걸음을 옮길 수 있다고, 내 뒤에 올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사람 말이다.
꾸준히 쓰고 또 공유하고 싶다. 혼자 외롭지 않기 위해선 스스로를 먼저 드러내고 또 나누어야 한다. 쓰지 않으면 나 자신조차 나를 이해할 수 없고, 공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런 나를 알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임신 이후 계속 돌려보게 되는 한 임신한 직장인 유투버의 브이로그가 있다. 출산 전 인수인계를 마치고 퇴근한 그녀는 퇴근 후 클라우드 제로 무알콜 맥주를 소주처럼 콸콸 들이키더니 말했다. 출산휴가만 쓰고 돌아올 생각이고, 그동안 업무가 문제없이 돌아가도록 인수인계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돌아갈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괜히 "고용불안"을 느낀다고. 남은 무알콜 맥주 한 모금을 입으로 털어 넣으면서 그녀가 삼킨 말은 아마도 이것인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갈 수 있겠죠?
그리고 다시 계속할 수 있겠죠?
왜인지 모르게 몇 번이고 돌려보게 되던 그 장면 같은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그 글이 나 다음에 이 바람을 만날 사람, 꼭 나 같은 딱 한 사람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부른 배로 맹수들의 밤과 싸우는 당신, 일을 마치고 목 타는 심정으로 무알콜 맥주를 콸콸 넘기는 당신, 엄마가 되어도 나로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