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이후 나는 아주 이상한 별의 주민이 된 기분이다.
이 별에는 한 번에 사십 주, 약 십 개월을 머무를 수 있는데 기회는 일생에 많아야 몇 번뿐이다. 이 별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매주 다른 몸 상태와 마음 상태를 맞이하며 그걸 ‘주수 일기’라는 이름으로 기록을 남긴다. 우리는 "17주 체중", "20주 태동" 등의 검색어로 남의 주수 일기를 찾아가 지금의 내 몸과 마음이 정상 범주에 속한다는 위안을 얻는다. 이맘때쯤 살이 이만큼 찌는 게 이상한 게 아니구나! 졸려 죽겠는데 새벽 세시마다 눈이 반짝 떠지는 것도, 겨드랑이와 목주름이 시커멓게 착색되는 것도 다 임신 증상이었구나!
분홍색 배지를 달랑달랑 가방에 달고 다니는 이 별의 거주자들은 사실 서로를 배지 없이도 알아볼 수 있다. 임신 전에 선호하던 패션 스타일이 무엇이었든, 이제 우리는 펑퍼짐한 원피스, 위에 입은 옷과 어울리지 않는 편하고 낮은 신발, 화장을 해도 어딘지 푸석하고 부어 보이는 얼굴로 다니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이 별에 머물러 봤던 사람은 이 별의 주민을 마주치면 "어머, 몇 개월이에요?"를 묻는다. 몇 개월이요, 하면 본인 임신 시절의 기억을 잠시 회상하며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단함을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꼭 이렇게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다. "그래도 뱃속에 있을 때가 편해요. 낳고 나면... 정말..."
사람 몸 하나에 사람 하나만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 몸 하나에 사람 둘이 들어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매일 피로하다. 그런데 애가 뱃속에 있을 때가 편한 거라니! 출산 후 겪게 될 “쑥과 마늘의 날들”, 한동안 집에 갇혀 종일 애를 보게 될 미래를 생각하면 정말 지금이 편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이 별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관심과 배려는 아마도 그들에게 닥쳐올 희생과 헌신의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별의 주민이 된 이후로 내가 아는 모든 가치들이 흐물흐물 무너지고 있다. 다들 나에게 아기가 최우선이라고, 스트레스받지 말고 많이 쉬고 잘 먹고 잘 자라고 한다. (그러면서 일은 똑같이 준다) 누구를 만나도 다 그렇게 말한다. 나는 이 별의 평가 기준 앞에서 혼란스럽다. 이제까지 큰 성취를 하거나 빠르게 뭔가를 해내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나를 평가하는 세상의 가치였다면, 이젠 영양소가 고루 함유된 좋은 음식을 먹고 늘 평온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나의 KPI(Key Performance Indicator), 핵심 성과 지표가 되었다. 문제는 전과 다름없는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몸과 마음까지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임원의 의중과 어긋난 보고가 끝난 회의실에서 자비 없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날 때, 팀원들은 나를 보며 귀를 막으라는 시늉을 한다.
"(소곤소곤) 태교에 안 좋아!"
심지어 나의 상사는 업무 보고가 끝날 때마다 나에게 엄숙하게 묻는다.
"근데 지금, 보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단백질은 잘 챙겨 먹고 있나?”
내 단백질 섭취량까지 생각해주는 상사가 고맙고 또 쑥스러워서, 나는 착색이 일어나기 시작한 목주름을 긁으며 잘 먹고 있다고 대충 둘러댄다. "그래, 안 좋은 건 먹지 말고, 좋은 걸 많이 먹어야지." 그 말에 나는 회사 생활의 생명수처럼 마시고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남을 씹고 싶을 때 우적우적 씹어 삼키는 감자칩을 슬며시 뒤쪽으로 감추고 싶어진다.
커피와 술을 몸에 들이부으며 이전과 다름없이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내가 좋아했던 모든 기호식품들을 박탈당한 채 갑자기 최대한 슬로 다운(Slow down)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이야기하는데 정작 그 말은 내 마음은 편하게 해 주지 않는다. 이전과 똑같이 일하고 생활하는데 단지 뱃속에 사람이 하나 들어 있다고 마음이 온순하고 평화로워질 수가 있을까?
회사에 아주 미운 사람이 있어 속이 부글부글 끓던 중이었다. 맘카페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임신 중에 누구 미워하면 애가 그 사람 닮는데요."
아, 안되는데... 그 사람은 이 지구 상에서 내 아이가 가장 닮지 않았으면 하는 모습인데...
나는 위대한 모성을 발휘하여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친구에게 말했다.
"나 이제 그 사람 욕 그만 하려고. 임신했을 때 누구 미워하면 애가 그 사람 닮는대."
"야 그게 말이 되냐? 그럼 차은우를 미워해. 애가 차은우 닮게."
"아 맞네! 그럼 나는 우리 석진이*를 미워할래. 스케일 크게 월드 와이드 핸썸을 낳아야지."
* 그룹 방탄소년단의 멤버 진의 본명.
"하여간 우리나라 속담은 너무 여자한테 죄책감을 주는 경향이 있어. 임산부 괴롭히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지, 임산부도 사람인데 어떻게 남을 다 사랑해?"
고맙다 친구야. 나는 다시 평온하게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별의 주민에게 보여주는 관심과 배려가 나는 아직 쑥스럽다. 늘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좋아하지도 않는 분홍색의 임산부 단복을 입고 돌아다니게 된 기분이다. 출퇴근길에는 임산부 배지를 가방에 달랑달랑 달고 다니지만 가끔은 그 배지를 가방 안으로 감추고 싶기도 하다.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을 때였다. 퇴근시간이 시작되는 즈음이라 비어있는 임산부석을 찾지 못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다 나처럼 먹고 사느라 바쁘고 힘들 거라 생각하니 배려를 요청하기도 불편했다. 가방 밖으로 내놓은 배지가 자리를 비켜달라 시위하는 것 같아 민망해 다음 칸으로 옮겨갔다. 이 칸에도 임산부석이 비어 있지 않으면 그냥 서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어가던 중, 한 아주머니가 인파 속에서 손을 흔들며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저기요, 저기요! 여기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고 자리에 앉자 지친 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너무 편안해서 오늘 내가 피곤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다른 칸으로 건너가는 사람을 붙잡아 굳이 자리를 양보해 준 정성이 고맙고 괜히 쑥스러워 나는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을 한다. 언젠가 이 별을 떠난 뒤에 나도 이런 배려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감은 눈 사이로 보이는 배지의 선명한 분홍색은 여전히 낯설고 배려를 받을 때마다 몸속 솜털을 간질간질 간지럽히는 것 같지만, 오늘의 따뜻함을 잘 기억해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