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돌 Dec 26. 2021

한번은 말해야 하는 이야기

어느 평범한 유산 이야기

5월 말은 장미가 한창인 계절이다. 배가 이제 제법 나와 어디서도 양보를 받는 임산부가 된 나는 붉은색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아파트 단지를 걸으면서 장미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아파트 유리로 비치는 나의 배부른 모습을 낯설어하면서도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여기까지 왔다. 다행히도 여기까지 왔다. 이제 두세 달 뒤면 아이를 만날 수 있다.


작년 이맘때의 장미는 달랐다. 일 년 전의 나는 장미꽃 사이를 걸으며 뱃속 아이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초록색 잎사귀 사이에 얼굴을 내민 장미는 너무나 붉었고, 바닥에 떨어진 핏빛 꽃잎들은 혼자 겪었던 유산 과정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했다.


가임기 여성이라면 다섯 명 중에 한둘은 겪는 일인데도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다. 유산이 힘든 이유는 내 몸에서 일어난 가장 가까운 존재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내 피와 살 같은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졌는데 널리 부고를 낼 수도 조문을 받을 수도 없다. 길게 슬퍼할 수도 없다. 유산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 임신이 되어 건강한 아이를 품에 안는 것이라고 모두들 말한다. 이미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으로 새로 올 아이의 발걸음을 막을까 봐, 사람들은 충분히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임신에 매달린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사실은 아주 평범한 유산 이야기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어간 날, 의사에게 아이 심장이 제대로 뛰지 않는단 말을 듣는다. 믿을 수가 없어 다른 병원에 간다. 아직은 속단할 수 없다며 일주일 뒤에 다시 경과를 보자고 한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일주일 뒤 병원에 간다.


아이는 자라지 않은 채 약한 심장을 붙들고 있다. 의사는 90%의 확률로 잘못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 10%를 붙들어야 할지 90%에 기대어 그냥 포기해버려야 할지 혼란스럽다. 일주일 동안 고민과 검색을 거듭하며 지쳐버린 마음은 포기로 기운다. 의사는 심장이 완전히 멈춰야 수술을 해 줄 수 있다고 한다. 뱃속에 살 수 없는 아이가 있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기에 우리는 다음에 왔을 때는 아이의 심장이 차라리 멈춰있기를 바라게 된다.


아이를 내보내기 위해 우리는 걷고 또 걷는다. 옛날의 엄마들이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 했던 방법들을 떠올리며, 오월의 신록과 장미꽃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며 몸을 피곤하고 지치게 만든다. 한때 간절히 심장 소리를 듣고 싶어 했던 아이, 엄마 몸에 딱 붙어있어라 바라던 아이는 이제 심장이 멈춰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나오길 바라는 아이가 되었다.


다음에 찾은 병원에서 우리는 기묘한 기대감으로 진료실에 들어간다. 의사는 말한다. 아이는 여전히 약하지만 심장이 뛴다고 했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듯이, 의사에게 묻는다.


"아직 심장이 뛴다고요?"


우리는 마치 오래 병 투병하며 자식들을 질리게 하던 부모님이 임종 직전이라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병원에 왔다가, 오늘은 안 돌아가실 것 같단 말을 듣고 망연자실하는 불효자식들 같았다.


정상이라면 하루에 1mm씩 커야 하는데 이 녀석은 한 주에 1mm를 자라면서도 그 약한 몸으로 가쁜 숨을 쉬고 있다. 겨우 0.4cm밖에 되지 않는 아이의 투지에 우리는 숙연해진다. 아가, 있고 싶을 때까지 있다가 가렴. 더 이상 빨리 가라고 빌지 않을게.


그렇게 몇 번 더 병원을 방문한 뒤, 드디어 아이의 심장이 뛰지 않는단 이야기를 듣는다.


수술하지 않고 아이를 배출할 수 있는 약을 받아 온다. 그날 엄청난 피를 흘리며 혼자서 아이를 내보낸다. 내 몸은 한 번도 배운 적 없던 출산의 과정을 자연스레 수행한다.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사자, 표범, 기린 암컷과 나는 전혀 다르지 않았다. 모든 과정이 끝난 후 나는 아마조네스 여전사처럼 의기양양해진다.


내가 해냈다. 수술 없이 해냈다. 더 이상 괴롭지 않아도 된다.


출산 후의 샤워가 금기인 것도 잊고 오랫동안 샤워를 한다. 그리고 한동안 손목 관절이 시큰거려 휴대폰도 오래 들고 있지 못하는 몸이 된다.


어르신들은 말한다. 몸 관리 잘하고, 잘 준비해서 아이는 다시 가지면 된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나 아는 누구도, 또 누구도 겪었던 일이다. 다 지금은 애 둘씩 낳고 잘 산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다시 임신을 해서 건강하게 출산을 하면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까. 그런다고 그 슬픔과 상실감이 없던 일이 될 수가 있을까.


같은 시기에 임신한 동료가 하루하루 배가 불러오는 걸 본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부른 배를 자랑하듯 걷는 그녀를 보면 제발 이쪽 통로로 다니지 말아 달라고 짜증을 내고 싶어 진다. 나는 그녀가 보기 싫은 마음 반, 내 불운을 그에게 전염시키고 싶지 않은 맘 반으로 그녀를 피해 다닌다. 그녀가 출산휴가를 떠나 자리를 비우자 나는 마침내 해방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출산예정일 즈음 그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들리자 나는 짧게 축하 메시지를 보낸 후 그 문자를 지워버린다. 






다시 임신을 시도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한의원에 다닌다. 몸이 차다고 한다. 커피가 몸을 차게 한다고 해서 좋아하던 커피를 끊는다.

임테기 한 줄이 뜬다. 임테기를 형광등에 비추어 보며 정말 한 줄인 지를 다시 확인한다.

생리를 시작할 때마다 내가 못 참고 커피를 몇 잔 마신 탓인가, 하고 자책한다.

여전히 임산부로 등록이 되어 있기에 보건소에서 이유식 교육을 받으러 오란 연락이 온다.

이젠 매달 생리를 할 때마다 우는 나를 보고 남편이 상담을 받아보는 게 어떠냐고 말한다.

상담을 다닌다. 상담사는 내가 임신에 너무 집착한다고 한다. 상담을 그만 가게 된다.

어느 날 성당 근처를 걷다 햇살 아래를 걷는 수녀님들을 보고 갑자기 그 옷자락이라도 붙들고 싶어 눈물을 흘린다.


사람들은 마음을 비워야 아이가 찾아온다고 했다.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온갖 기대와 실망으로 마음에 상처를 실컷 내 본 뒤에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려면 극도로 힘든 고비를 넘어야 한다. 아, 이제 더는 이렇게 못 하겠다, 싶을 때 비로소 마음을 비울 수 있다.


최고로 마음을 비우지 못한 달, 지금 뱃속의 아이를 만났다.


새로 찾아온 아이는 건강하다. 병원에 갈 때마다 심장소리를 꼬박꼬박 들려주고 주수에 맞게 자라고 있다. 사람들은 내게 안 좋은 일도 있었지만 결국은 잘 되지 않았냐며, 다행이라 말한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남는 공간이 없을 정도로 부른 뱃속에 여전히 0.4cm의 공백은 남아있다고 느낀다.


누군가는 그때 그 아이가 엄마에게 오는 길을 기억했다가 다시 온 거라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왠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그 죽음이 다른 생명으로 대체될 수 없을까. 슬픔다른 기쁨으로 잠시 잊힐 수는 있을지언정 사라지진 않는다.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슬픔은 언제든 다시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슬퍼하지 말라는 말에 속지 말고, 좋은 것만 생각하라는 말에 눈 질끈 감지 말고, 그때의 슬픔을 충분히 바라봐 주었더라면.


나는 로 온 아이를 건강히 만나 아이의 통통한 볼을 만질 수 있는 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하지만 동시에, 작년에 우리를 떠난 어린 영혼의 거취를 궁금해한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또 어느 집 문을 두드리고 있니.


세상에는 다른 좋은 일로 대체할 수 없는 상실이 있다. 아무도 모르게 그 상실의 자리를 조금 더 지켜주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