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돌 Jan 13. 2022

쓰지 않고 읽지 않는 날들

육아템을 준비하는 마음

임신을 하게 되면 나는 내가 더 크리에이티브한 창작자가 될 줄 알았다. 일단 뱃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이 아닌가. 처음으로 겪어보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감탄하며 기록하다 보면 전에 쓰지 못한 종류의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뱃속 아이를 위해 동화를 쓰거나, 아니면 단편소설 쓰기에 도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임신을 하면 법적으로 야근이 어려우니, 더 많은 시간적, 심적 여유가 보장될 것이고, 나는 엄마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오로지 나로서 창작열을 불태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막상 시작된 임산부의 생활은 상당히 팍팍했다. 승진 연차를 앞두고 임신이 된 게 문제였을까. 늘 업무평가를 의식하며 회사를 다녔고, 혹시 평가를 잘 못 받을 경우를 대비해 승진 점수를 확보하기 위해 매달 중국어 시험을 봤다. 업무를 이어받을 후배에게 인수인계를 하느라 바빴고, 막달에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일정을 승진심사를 피해 조율하느라 매일 네이버 날짜 계산기에 들어가 주판을 두드렸다. 사람이 이렇게 일에 매몰되어 살 수 있다니,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디데이를 앞두고 삶은 닭가슴살만 먹는 것 같은 건실한 삶.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불안의 힘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곧 워킹맘이 될 테고, 지금처럼 온전히 백 프로를 다 하지 못하게 될 테니, 지금 승진을 누락하면 또 언제 승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동안 열심히 해온 것에 대한 결과는 꼭 거두고 가고 싶다는 마음. 그래야 내년에 ‘고용불안’ 없이, 덜 종종거리며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예전의 나처럼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성실하게 만들었다.





성실은 회사 업무의 영역에서만 발휘된 게 아니다. 막달이 되면서 출산 준비를 시작했는데, 사야 할 물건은 뭐가 그렇게 많은지. ‘역방쿠’(역류방지쿠션)은 대체 무엇이고 ‘아기 비데’는 왜 필요한 것인지, 외계어 해독하듯 공부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아기용 ‘엠보 손수건’과 ‘가제 손수건’의 차이는 무엇인지 한 시간을 검색해서 아기 손수건을 샀는데 바로 그다음 날에 특가 할인이 시작될 때의 기분이란… 그렇게 몇 번의 육아템 구매를 거치면서, 불필요한 것을 집에 들이는 것을 질색하던 나는 맘카페에 ‘핫딜’이 뜨면 그 물건이 뭔지도 모르면서 달려가 일단 ‘지르고’ 보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마다 온갖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고 회원가입 쿠폰을 받고 또 배송비 무료 금액을 맞추기 위해 물건을 더 담고… 그렇게 점점 집안 한구석에 필요가 증명되지 않은 아기 물건들이 무덤처럼 쌓여가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래, 이제 아기용 수납장을 구매해야겠군, 하고 생각했으며 이런 나 자신에게 놀랐다.


물건을 사들이는 것도 사실 불안의 힘이다. 열 시간 진통을 하고 나면 무릎이며 고관절이 다 망가진다는데, 몇 달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좀비처럼 살게 된다던데, 조금이라도 돈을 써서 편해질 수 있다면 나는 간절히 편해지고 싶었다. 앞으로 그런 식으로 돈으로 해결할 일이 많아질 것이므로, 가능하면 최저가로 가성비 좋은 구매를 해야 했다. 한 시간 동안 검색해 최저가 핫딜을 찾아 육천 원을 싸게 사놓고, 내가 검색하느라 쓴 한 시간이 최저임금으로 육천 원은 될 텐데 하고 씁쓸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듯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생활 속에서 나는 점점 돈만 벌고 돈만 쓰고 글은 쓰지 않는 사람이 되어간다. 하소연할 곳이 필요해 일기는 쓴다. 하지만 독자를 상정하고 쓰는 글은 이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싶을 만큼 감을 잃었다. 어쩌다 쓴 글은 너무 일기장 글 같아서 남에게 글이랍시고 내보이고 싶지 않다. 


글이 별로인 이유는 명확하다. 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에 내가 좋아했던 산문들, 고매한 학자들, 특히 남자들이 쓴 글은 내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예를 들어 버트란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은 예전엔 형광펜 쳐 가며 읽었던 책이지만 지금은 내가 겪고 있는 고민들에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해서 최근에 책꽂이에서 방출되었다. 형광펜을 쳤기 때문에 중고서점에 팔 수도 없어 슬펐다.






이전에 내가 해결하고 싶었던 질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내 인생을 어떻게 하면 나답게 살 수 있을까요?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로 자아실현이 가능할까요?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요?


이제 나의 질문은 바뀌었다.


꼬리뼈가 아파서 앉을 때마다 눈물 날 정도인데 언제쯤 좋아질까요? 애를 낳고 얼마 정도 지나야 몸이 회복된다고 보시나요? 임신성 불면증으로 잠을 못 자는데 혹시 그것 때문에 아이가 안 크는 걸까요? 워킹맘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에 답을 줄 수 있는 건 맘카페나 육아  게시판, 임신 출산 육아 유경험자의 블로그 글 밖에 없다. 그 짧은 글 한 편이 나에게 어떤 유명한 저자의 책보다 더 큰 효용을 준다. 덕분에 내 휴대폰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장시간 인터넷에 접속하며 늘 발열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오늘은 휴대폰 좀 덜 봐야지! 하는 다짐만큼 지키기 어려운 게 없다.


엄마가 되고 싶었던 건 다. 근데 애도 낳기 전에 너무 빨리 엄마가 되어버렸다. 좋아하던 아이돌의 영상으로 가득하던 내 유튜브 메인 화면이, 어느새 육아템 리뷰와 막달 임산부 요가와 출산 호흡법 영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본다. 이미 내 인생의 축은 크게 기울어 버렸다. 그리고 당분간 이런 생활이 지속될 예정이다. 예전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다시 그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하루 30km를 걷던 그 여자는 이제 동네 마트를 갈 때도 꼬리뼈를 잡고 어기적어기적 걷는다. 그렇게 펭귄처럼 느리게 걷는데도 낮은 계단에서 발목을 삐끗하기까지 했다. 정형외과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더니 의사가 말했다.


“그래도 염증이 심하진 않네요. 원래 임신하면 인대나 관절을 다쳐도 염증이 잘 안 생겨요. 몸에서 태야한테 해가 갈까 봐 염증 반응을 억제하거든요. "


"아니, 임신하면 염증도 덜 생겨요? 이상하게 이번에 분명 많이 삐었는데 덜 아프다 했어요..."


"사실 그게 좋은 건 아니죠. 염증은 정상적인 면역 반응인데, 아기를 위해서 그걸 억제하는 거니까. 아마 출산 후에 또 같은 자리를 다칠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다. 내 몸은 모든 우선순위를 아기에게 맞추고 있다. 심지어 염증까지 덜 만들면서! 모체의 건강을 쏙쏙 빼내어 후세대에게 전달하는 생명의 법칙이여. 내 정신도 마찬가지로 곧 태어날 아기 중심으로 세팅이 되어간다. 그러니 유튜브 화면쯤 육아 브이로그로 어지럽혀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이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일단 지금은 이렇게 가 보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무거운 몸으로 남은 의지력을 짜내어 옷장에 내 옷을 비우고 아기 옷 칸을 만들었다. 한때 설레는 마음으로 구입했으나 이제는 입게 된 옷들 커다란 쓰레기봉투에 버렸다. 이런 짧은 치마는 출산 후에는 도저히 못 입겠지... 이런 쫄쫄이같은 스키니진에 몸을 구겨 넣을 수 있었다니... 하고 과거의 나를 신기하게 여기면서. 돌아오지 않을 시절의 물건들을 버리며 좁은 집 안에 아기 물건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내가 퍽 억척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평생 일하는 엄마로 살며 퇴근 후엔 지쳐서 9시 뉴스도 시작되기 전에 소파에 기대 졸던 나의 엄마가 떠오르고, 나는 저렇게 퇴근 후 책 한 권을 못 읽는 삶은 살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던 사춘기 시절의 내가 떠오르면서, 나는 옷장을 정리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만다. 엄마도 그랬겠구나,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을 텐데. 내가 입다 버리려는 옷들을 받아 차곡차곡 개어 쌓아 둔 엄마의 옷장을 떠올리자 코가 시큰해진다. 나는 또 망할 놈의 임신 호르몬 탓을 하며 삐질삐질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