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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Jun 17. 2018

커피를 끊었습니다

'하기'가 아닌 '하지 않기'의 시작

커피를 끊었다. 자유를 얻었다.


커피를 끊은 지 3주가 되어 간다.

생명수같이 마시던 커피를 끊게 된 것은 3주 전,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 생리통이 한꺼번에 찾아온(!) 날부터였다. 식도염으로 인한 가슴 통증, 위염으로 인한 속 쓰림, 생리통으로 인한 복부 통증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조퇴를 했다. 죽이 아닌 미음을 먹으면서 하루 반을 꼬박 쉬었다.


그날의 어머어마한 통증으로 인해 그동안의 삶의 방식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휴직하면서 부지런히 해 먹었던 건강한 밥상이 무색하게, 복직 후 나는 빠르게 예전의 삶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상태에 적응하기 힘들어 커피를 매일 한두 잔씩 마셨다. 밤에는 하루 종일 긴장했던 몸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맥주와 안주로 심신을 달랬다. 스트레스를 싸안고 돌아와 그걸 내 몸에 풀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스트레스의 중심에는 욕심이 있었다. 잘 하고 싶은 마음. 잘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 휴직 전과 달라지고 싶은 마음. 지금/여기의 내가 아니라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마음.

 

식도염으로 인해 화병에 걸린 것처럼 가슴 통증이 느껴지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총 맞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가슴 아파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뭔가 하나 끊어야 했다. 스트레스, 커피, 술, 매운 음식, 짠 음식, 튀긴 음식 등등 건강에 안 좋은 것들을 리스트업해 보았다. 스트레스를 끊을 수 있다면 최고겠지만 일단 가장 만만한 커피부터 끊어 보기로 했다.


커피 없는 삶이 준 변화


커피를 안 마신 첫날은 생각보다 견딜만했다. 그런데 이틀, 사흘째에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끝도 없이 졸리고, 몸은 나른하고 처졌다. 우울 감마저 느껴졌다. 카페인에 길들여져 있던 몸은 커피를 넣어주지 않자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퇴근하면 씻고 바로 잠을 자면서 며칠을 더 버텼더니 몸이 카페인 없는 상태에 점점 적응해 갔다. 그리고 이제 삼 주째 커피를 마시지 않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신체적/정신적으로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커피 끊기를 강력 추천한다. 고소하고 향긋한 커피를 마실 수 없는 것은 아깝지만, 커피 끊기가 주는 이득이 더 크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던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커피를 끊으면서 내가 느낀 신체적 변화는 다음과 같다.


1. 잠을 잘 잔다. 수면 패턴이 규칙적으로 변했다.  

커피를 끊11시에 잠자리에 드는 습관을 들였다. 퇴근하고 많은 걸 해야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잠을 같은 시간에(이게 중요하다) 충분히 자기 시작했더니 커피 없이도 많이 피곤하거나 졸리지 않다. 전에는 가끔 밤에 과긴장 상태가 되어 잠을 잘 못 자거나, 새벽에 깨면 계속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그런데 커피를 끊으니 졸음이 규칙적으로 찾아온다. 잘 시간이 되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잠에 빠진다. 새벽에 깨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2. 화장실을 규칙적으로 간다.

이게 얼마나 생활을 안정적으로 만드는지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잘 흡수하고 잘 배출하는 것이 건강의 기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3. 달달한 간식에 대한 식탐이 줄었다.

케이크, 빵, 마카롱 등 세상 모든 달달이들의 맛은 쌉싸름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할 때 절정을 이룬다. 커피 없는 디저트는 생각보다 달고 느끼해서 커피 없이 조각 케이크 한 조각을 다 먹기도 어렵다. 여전히 카페라는 공간이 주는 여유를 좋아하지만, 카페에서 파는 음료와 간식에 대해 전만큼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4. 위염, 식도염이 많이 완화되었다.

많이도 아니고 하루 한두 잔 마시는 커피가 뭐 그렇게 속에 안 좋겠어? 했는데 정말 안 좋은 거였다. 이 주째 커피를 끊었던 어느 날, 업무적으로 공짜 커피를 얻어먹게 되어 한두 모금 마셨는데 몇 시간 뒤에 익숙한 통증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나는 선천적으로 소화기가 약한 편이라 커피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 같다. 체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커피 끊기는 위염, 식도염에도 효과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커피를 끊으면서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다.


사실 나는 내가 커피 없인 못 살 거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커피를 적극적으로 각성제로 활용해 왔다. 늘 잠이 부족했기 때문에 낮에는 쓰고 맛없는 자판기 블랙커피를 들이마시며(믹스 커피는 살이 찌니까!) 잠을 깨고 수업을 들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편의점에서 파는 달달한 카페라떼를 사놓았다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빨대를 꼽고 입에 물었다. 그 시절 내 몸에 흘렀던 피의 30%는 피가 아니라 커피였을지도 모른다. 직장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에는 따뜻한 라떼 한잔으로 아침밥을 대신하기도 하고 오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식곤증을 달랬다.


커피의 맛과 향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사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건, 커피를 마셨을 때의 그 High 한 기분이었다. 나는 커피와 술을 비롯한 대부분의 약물에 민감한 편이라, 커피를 한잔만 마셔도 확 기분이 좋아지고 정신이 명료해졌다. 지루한 업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쭉 빨아 마시며 몰입하다 보면 금방 해치울 수 있었다. 우울하고 짜증날 때 달달한 아이스 라떼를 쭉 들이키고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으면 웬만한 일은 견딜 만 해졌다. 나에게 커피는 낮에 사무실에서도 떳떳하게 마실 수 있는 술 같은 것이었다. 나 자신을 카페인으로 도핑하면서 커피 기운으로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났다.


멀티태스킹을 돕는 카페인의 힘 Photo by rawpixel on Unsplash


커피를 끊으면서 나는 더 몰입해서, 더 각성된 상태로 뭔가를 해야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졸리고 쳐지고 하기 싫을 때는, 커피를 마셔서 기분을 업시키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상태 자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못하면 못하는 대로, 하기 싫으면 하기 싫은 대로, 졸리면 졸린 대로의 나를 받아들였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집에 가서 충분히 쉬자고 생각했다.


작년에 휴직을 하고 들여다본 나는, 생각보다 의욕이 넘치고 부지런하고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다. 카페인으로 나를 도핑하지 않아도 나는 충분했다.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도 괜찮았다. 더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 속에 좋지도 않은 커피를 들이부으면서까지 해 내야 할 일은 세상에 없었다. 그걸 위염, 식도염을 한바탕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커피 권하는 사회'에서 '커피 안 마시는 사람' 되기


여름 점심시간에 횡단보도에 서서 반대편을 바라보면 아이스 커피를 테이크 아웃한 사람들이 일제히 컵을 까딱까딱 흔들며 서 있다. 저 까딱까딱하는 자세가 가장 도시적인 제스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우리에게 커피는 담배와 같은 기호품이 아니라 쌀, 물 같은 생활필수품이 되어 버렸다.


한때 창조성과 여유로움의 원천이었던 커피가 현대사회에선 수면부족으로 인한 피로를 몰아내고 근무시간을 연장하는 각성제로 활용되고 있다. 하루 6시간도 채 자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아침에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데 커피는 필수품이며, 나른한 오후를 견디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활력제 구실을 하고 있다. 아침 일찍 ‘조찬모임’이라는 이름으로 강연을 듣고 회의를 하는 나라, 노동시간이 긴 데 비해 효율은 떨어지는 나라, 야근이 당연시되는 나라, 퇴근하는 사람들을 술자리로 잡아끄는 나라, 그래도 내일 아침엔 원기충전이길 기대하는 나라. 우리는 지금 그런 곳에 살고 있다.

- 한겨레 [세상 읽기] 카페인 공화국 /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나에게 있어서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는 건 '적당히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남들 다 하는 거지만, 내 몸엔 안 맞으니까 나는 안 할래. 커피 마시면 잠 깨는 거 알지만, 그냥 잠 안 깨고 좀 졸린 상태에서 적당히 할게. 대신 집에 가서 더 잘게. 다들 바쁘게 달려가지만, 나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고 만족해. 남들의 속도에 맞춰가느라 몸에 안 좋은 거 잔뜩 먹고, 집에 가서 양배추즙이며 마즙이며 또 주문해 먹는 게 아니라, 그냥 내 몸에 필요하지 않은 걸 안 먹고 덜 먹을게, 라는 선언.


작년의 휴직('회사를 다니지 않음')부터 시작해서 나는 '함'이 아니라 '하지 않음'을 조금씩 연습해 보고 있다. 절대로 못 그만둘 것 같다고 생각한 걸 한번 안 해 보는 것. 언젠가는 '다이어트를 하지 않음', '스마트폰을 쓰지 않음', '영어 공부를 하지 않음' 까지도 가 볼 수 있지 않을까? 언제까지 커피를 마시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좋다는 걸 더 많이 하는 게 아니라 내게 불필요한 걸 덜 하고 안 하는 자세로 인생을 살고 싶다.





배경 그림: Photo by Matt Hoffm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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