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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2 07화

작사의 세계

불가능한 사랑의 문법

by 조융한삶



2022년 6월, 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작사라는 언어.


처음에는 김이나의 화려한 이력에 매혹되어, 전국민이 내 가사를 따라 부르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순진한 오해였다.


작사는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음악과 언어 사이의 불안한 경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놀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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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해, 나는 쑥과 마늘을 먹었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인간이 되기 위해 감내했던 그 시련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새로운 배움의 단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작법서를 밤새 탐독하고, 온라인 강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합평회에서 동료들과 나누던 설렘 가득한 대화들. 그 시간들에는 어떤 빛이 있었다. 마치 새로운 종족이 되어가는 설렘처럼.


하지만 신화는 언제나 잔혹한 이분법을 요구한다. 곰은 인간이 되거나 곰으로 남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문명과 야생 사이에는 어떤 완충지대도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그 이분법의 폭력을 서서히 체감했다. 작사를 배우면서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었으니까. 책장에서 꺼내들던 시집들, 연인과 나누던 느긋한 대화, 아무 목적 없이 거리를 걸으며 떠올리던 사유의 조각들. 그것들이 단순히 교환된 것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당황스러움을 기억한다.


두 번째 해에 접어들면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 등장하는 와타나베를 생각했다. 음악을 사랑하지만 음악에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기타를 포기하며 느꼈을 쓸쓸함을. 하지만 내 상황은 와타나베와 달랐다. 나는 작사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작사에게 사랑받지도 못했다. 내가 사랑한 것은 작사가 아니라 작사가라는 정체성, 혹은 그 정체성이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던 어떤 반짝이는 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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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이 시작됐다. 매일 아침 모니터 앞에 앉는 의식, 멜로디라는 불가해한 구조에 언어를 끼워 맞추려는 애를 쓰는 시간, 발음과 내용과 운율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다 결국 모두 놓치고 마는 오후들. 그리고 저녁마다 찾아오는 공허함.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하는 자는 반복의 포로"라고 했는데, 나 역시 반복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 아니라 의무의 포로였다.


일요일 오후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 팔자에도 없는 아이돌의 교태를 목격하며, 내 취향과는 정반대편에 위치한 멜로디와 몇 시간씩 씨름하던 시간들.


현대인의 취미란 모두 이런 식으로 오염되는 것일까. 순수한 즐거움이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그 전문성은 다시 자기계발이라는 논리와 결합하여 포기할 수 없는 의무가 되어버린다. 취미조차 생산성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에, 과연 진짜 여가란 존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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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년간의 작사 경험이 내게 남긴 것은 좌절만이 아니었다. 언어에 대한 다른 감각, 운율과 의미 사이의 긴장에 대한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 불가능성에 대한 깊은 인식. 그것들이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감지한다.


진정한 포기란 무엇일까. 그것은 체념도 아니고 도피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직시하고, 그 한계 안에서 가능한 최선의 관계를 모색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와타나베가 기타를 포기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사랑은 잃지 않았듯이, 나 역시 작사를 떠나면서 언어에 대한 애정만큼은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의 애정은 소유하려는 사랑과는 다른 것이다. 지배하려 하지 않고, 정복하려 하지 않으며, 그저 적절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사랑.


2024년 2월, 나는 작사라는 긴 여행을 마친다. 동굴에서 나온 곰이 인간이 되는 대신, 나는 곰으로 머물기를 선택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곰도 인간도 아닌 어떤 애매한 존재가 되었다. 변신을 완수하지 못한 존재, 두 세계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존재. 그것이 실패인가, 성공인가? 그런 이분법적 판단은 이제 의미가 없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가장 정확한 사랑의 방식일 수 있으며, 포기라는 행위 안에도 어떤 창조적 가능성이 숨어 있을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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