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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2 06화

사유와 자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by 조융한삶





학생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꿈이 뭐냐고 묻게 된다. 어느새 나도 답이 없는 질문으로 상대를 난감하게 만드는 어른이 된 듯하다. 어쨌거나 내 착한 학생들은 기꺼이 답해준다. 보통은 의사, 공무원, 교사, 변호사 등의 대답이 나온다.


좋은 대답들이지만 직업은 꿈이 아니다.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그것도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I 'have' a dream, 우리는 언제부턴가 꿈을 소유의 대상으로 착각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사는 것, 그것이 진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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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꿈꾸는 하루는 어떤 모습인가.


충분히 수면한 뒤 개운하게 깨어나고, 창문을 열어 상쾌한 바람을 맞이하며, 따뜻한 차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고양이를 챙기고 간단히 식사한 뒤, 도서관에 가거나 천변을 걷거나 물속에서 몸을 움직인다. 돌아와서 씻고 점심을 먹는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오후엔 낮잠을 잔다. 저녁에는 체육관에서 몸을 단련한다. 밤이 되면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 몸을 맡긴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잠자리에 든다.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이 일상의 리듬을 적어놓고 보니, 내가 꿈꾸는 것은 시간의 주인이 되는 삶인 듯하다. 시계가 아니라 몸의 리듬에 따라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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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털을 쓰다듬을 때 손끝에 전해지는 감촉을 생각해본다. 부드럽고 따뜻한 그 촉감 속에는 고양이만의 시간이 흐른다. 인간의 조급함과는 전혀 다른, 느리고 깊은 시간. 고양이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의 햇살, 지금 이 순간의 포만감, 지금 이 순간의 졸음이 전부다.


또 욕조에 몸을 담글 때의 그 순간을 상상해본다. 따뜻한 물이 몸 전체를 감싸면서, 몸의 무게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 중력으로부터의 일시적 해방. 욕조 속의 시간은 메시아적 시간에 가깝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으로 응축되는, 충만한 시간.


하지만 그 충만함은 결국 욕조라는 제한된 공간, 제한된 시간 안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인간의 시간을 포기할 수 없다. 미래를 기획하고,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의미화하는 그 복잡한 시간 의식.


고양이를 쓰다듬는 손이 부드러울수록, 그 부드러움이 얼마나 많은 노동 시간의 댓가로 가능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욕조에서 나오는 순간 다시 무거운 몸으로 돌아가야 하듯이,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다시 현실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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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낭만적인 청사진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숨어있다.


이런 삶을 영위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시간을 팔아야 하고, 시간을 팔다 보면 정작 자유로운 시간은 사라진다. 현대 사회에서 자유란 대개 경제적 독립을 전제로 하지만, 그 경제적 독립을 얻는 과정에서 자유는 질식한다.


여기서 들뢰즈의 '되기' 개념을 생각해본다. 꿈은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가 아니라 '자유롭게 되어가기'의 과정이어야 한다. 완성된 자유가 아니라 자유해지는 운동. 그렇다면 어떤 인간이 '되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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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경험을 통해 나는 '나'라는 인간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초중고 생활, 기숙사 생활, 대학 생활, 각종 아르바이트, 군대 생활, 공장 생활, 강사 생활, 연애, 운동, 시련, 결핍, 관계... 여러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내가 얼마나 모순적인 존재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육체 노동을 기피하면서도 몸을 단련하고 싶어 하고, 단순 반복을 혐오하면서도 루틴의 안정감을 추구하고, 얕은 관계를 견디지 못하면서도 깊은 관계의 부담을 두려워한다. 지적 허영을 즐기면서도 그런 자신을 경멸하고, 영적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물질적 풍요를 포기할 수 없다. 사랑하고 싶으면서도 자유를 추구하고, 자유롭고 싶으면서도 외로움에 잠긴다. 오늘 좋아했던 것을 내일 싫어하고, 어제 혐오했던 것을 오늘 갈망한다.


정체성은 얼마나 불안정한가. 일관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고, 상황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이고, 스스로도 예측할 수 없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 정체성의 파편을 주워담는 과정까지가 '나다운 삶'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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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내 꿈을 이미 상당 부분 이뤘다. 알람 없이 일어나고, 원하는 시간을 보내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낮잠도 잔다. 욕조는 없지만 고양이와 함께 살고, 용산은 아니지만 근처에 영화관과 산책로가 있다. 아침에는 운동을 하고, 오후에는 일을 한다.


그런데 왜 아직도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까. 왜 더 완벽한 자유를 꿈꿀까. 이상의 「날개」 속 주인공이 "날개야 다시 돋아라"고 외쳤을 때,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물리적 자유였을까, 아니면 자유라는 관념으로부터의 자유였을까.


어쩌면 꿈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꿈은 도달점이 아니라 경유지다. 우리가 꿈을 꾸는 이유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꾸는 행위 자체를 통해 삶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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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의 주인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일까. 나만의 완벽한 하루를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완벽함이라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일까.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이 작은 생명체는 꿈을 꾸지 않는다. 아니, 꿈을 꾸지 않기 때문에 매 순간이 꿈 같다. 계획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경이롭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가 충만하다.


인간은 꿈을 꿀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불행하고, 동시에 꿈을 꿀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행복하다. 이 역설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 다만 그 역설을 더 정확하게 인식하고, 더 섬세하게 감각하고, 더 깊이 있게 사유할 뿐이다.


욕조에 몸을 담그는 순간을 다시 상상해본다. 물의 부력이 몸을 떠받쳐주는 그 순간, 무거움과 가벼움이 공존한다. 가라앉지도 않고 완전히 뜨지도 않는 그 미묘한 균형. 어쩌면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떠 있는 것.


그 떠 있음을 견디는 것.


그것이 어쩌면 꿈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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