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지 않는 새를 날게 하는 방법
날지 않는 매를 생각해본다.
본능적으로는 창공을 향해 치솟아야 하지만, 길들여진 환경에서 그저 주어진 자리에 안주한다. 가지는 편안하다. 먹이는 정기적으로 주어지고, 포식자의 위협도 없으며, 날씨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전함의 대가는 무엇일까.
바로 자신이 매라는 사실, 즉 날기 위해 태어났다는 본질적 정체성의 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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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는 현대인의 은유다.
현대인의 정체성은 여러모로 가지 위의 매와 닮아 있다.
안정된 직장, 예측 가능한 월급,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함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어떤 가지 위에 앉혀두고는, 날아야 한다는 원초적 충동을 서서히 마비시킨다.
융이 말한 '페르소나'의 완성이 곧 '그림자'의 억압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사회적 성공의 가면이 견고해질수록 내면의 야생은 잠들어간다.
'영웅의 여행'은 언제나 일상으로부터의 소명(calling)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현대인의 서사에서 소명은 종종 침묵의 형태로 찾아온다. 그것은 웅장한 모험에의 부름이 아니라, 오히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정적에 대한 자각이다.
가지를 부러뜨리는 농부의 손길은 폭력일까, 자비일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언제나 파괴를 동반한다. 기존의 질서를 해체해야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기 마련이다.
개인 신화에서 '농부'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때로는 실직이나 이별 같은 외적 사건으로, 때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내적 공허감으로. 중요한 것은 농부가 외부에서 왔다는 점이다. 매 스스로는 결코 자신이 앉은 가지를 부러뜨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가지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죽어야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가지 위의 자아'다. 사회가 규정한 잣대,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자아, 안전함을 위해 모험을 포기한 자아. 이런 거짓 자아의 죽음 없이는 진정한 자아의 탄생도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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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는 언제부터 날 수 있었을까. 태어날 때부터다. 그런데 왜 날지 않았을까. 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날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은 바로 이런 망각된 능력들의 회복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완전한 존재였지만, 사회화 과정에서 그 완전성의 많은 부분을 억압하거나 망각한다. 특히 현대인의 경우, 감성이나 직관, 내면성 같은 특질들을 일찍부터 억압하도록 학습받는다.
하지만 진정한 자아상은 이런 억압된 부분들과의 재통합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가지를 떠난 매가 처음에는 서툰 날개짓을 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개성화의 여정을 시작한 자아도 처음에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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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학에서 영웅은 여행을 떠날 때 특별한 도구나 부적을 받는다. 현대의 개인 신화에서 이런 도구들은 더 이상 마법의 검이나 신비한 반지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관점을 가능하게 하는 일상적 사물들이다. 자전거가 될 수도, 카메라가 될 수도, 드릴이 될 수도, 도복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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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니" - 백석의 이 시구는 운명론적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겸손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신보다 큰 무언가에 자신을 맡기는 것, 그것은 때로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는 사르트르에 의해 실존주의의 핵심 테제가 되었지만, 키르케고르 자신은 오히려 신 앞에 선 단독자의 실존을 강조했다. 즉, 진정한 실존은 절대적 타자 앞에서의 자기 발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개인 신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태도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자신보다 큰 무언가(운명, 무의식, 혹은 신성)에 자신을 열어두면서도, 동시에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해나가는 것. 이런 역설적 태도야말로 성숙한 자아상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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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를 떠난 매에게 찾아오는 첫 번째 감정은 아마도 불안일 것이다. 안전한 거처를 잃었다는 불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 혹시 날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
하지만 이 불안이야말로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불렀다.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 앞에 서 있다는 어지러움.
현대인이 경험하는 정체성의 혼란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통적 성 역할이 해체되면서 생긴 공백, 새로운 자아상을 스스로 정의해야 한다는 부담.
하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야말로 진정한 개별성이 싹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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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실제 삶에서 개인 신화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가지를 떠났다고 해서 곧바로 자유로운 비행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 다시 가지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완벽한 비행이 아니라 비행 자체다. 서툴더라도, 때로는 추락할 위험이 있더라도, 날개를 펴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매의, 즉 인간의 본질적 운명이기 때문이다.
개인 신화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써나가는 것이다. 매일매일 새로운 가지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매일매일 우리는 그 가지를 떠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들의 총합이 곧 우리의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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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사에서 농부는 한 번만 나타난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 가지를 꺾어야 한다. 이것이 현대인의 과제다. 외부의 개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안전지대를 해체하고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
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지는 편안하고, 비행은 위험하다. 실패할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를 꺾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매이기 때문이다. 날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지 않는 매는, 아무리 안전하고 편안해도, 결코 진정으로 살고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날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새로운 가지들을 향해 손을 뻗는다.
부러뜨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