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도 통역이 되나요?

by Yeongse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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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생활의 가장 어려운 점을 하나 꼽자면, 유머코드가 마치 규격이 다른 콘센트처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순한 언어 장벽의 문제가 아니다. 유머감각이란 개인의 기질이나 사고방식뿐 아니라 문화와 민족성을 망라한 거대한 집합체니까. 한국의 유머는, 품위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나라와 비교해 보아도 다소 점잖은 편이다. 우리는 소위 황금시간대 주말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웃음을 소비하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해 왔다. 뉴스 앵커에게 속된 표현이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기대하지 않는 대신, 공개 코미디나 리얼 버라이어티에서는 유독 바보 같은 캐릭터가 인기를 끈다. 비판적 의도가 없는 어리숙한 말과 엉뚱한 행동일수록 더 큰 호감을 얻는다. 우리 사회가 공감과 결속을 중시하다 보니, 유머가 조심스러움을 넘어 자조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요즘은 스마트폰과 OTT 플랫폼 덕분에 더 이상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유머를 공유할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우리는 숏폼 코미디 영상과 밈(meme)을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한국인에게 유머감각이란 곧 공감능력인 것이다.


반면, 유머만큼은 프랑스가 한국보다 훨씬 더 매운맛이다. 몸개그나 직설적인 농담도 있지만, 그보다는 말장난, 아이러니, 블랙 유머처럼 해석이 필요한 풍자를 선호한다. 이를 '1차적 유머(premier degré)'와 '2차적 유머(second degré)'로 구분하는데, 농담에도 등급을 매기는 프랑스에서는 구성이 복잡하고 수위가 셀수록 세련된 유머로 여겨진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웃음만을 위한 농담이 아니다. 프랑스 특유의 비판적 문화와 논쟁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토크쇼 포맷이 프랑스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전히 실제 방청객을 동원해 호스트와 게스트를 에워싼 프랑스의 토크쇼는 현대판 콜로세움을 방불케 한다. 경기장에 들어선 전사는 종교·정치·인종·성(性) 같은 터부의 지뢰밭을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른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뿐 아니라, 혁명 세대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 '표현의 자유'를 무시한 꼴이 되고 말 테니까. 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2015년, 파리에서 12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 사건의 불씨가 된 것은 샤를리 엡도 주간지에 실린 단 한 컷의 만평이었다.


통제력을 잃고 웃음 짓게 하는 유머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도 하고, 때로는 갈라놓기도 한다. 고정된 의미와 기존 가치 체계를 무너뜨리고, 차이를 뒤섞을 수 있는 정치적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 코미디(Comédie), 즉 희극은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는 엔터테인먼트를 의미하지 않는다. 프랑스 희극(Comédie française)의 아버지라 불리는 몰리에르에게 유머란, 웃음과 사회적 풍자를 넘어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진지한 예술 작업이었다. 당시 무대 위에서 일상생활을 재현하며, 폭소를 유발하는 장치와 해피엔딩을 함께 제공하던 것이, 오늘날 코미디 장르의 근간이 되었다. 코미디를 통해 우리는 삶의 부조리를 직면하고, 가벼이 여기고, 조롱하며 위선자들의 콧대를 꺾어놓는다. 유머, 농담, 코미디—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 안에는 인간만이 가진 자유를 향한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니 '유머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가벼운 위기가 아니다. 함께 웃지 못하거나, 혼자만 즐거운 농담을 던지는 '웃픈' 순간은 더 이상 곤란하다. 이곳에서 늘 진지한 사람으로 오해받지만, 나는 마음껏 웃고, 또 웃길 수 있는 존재로 남고 싶다.




*프랑스 한인 주간지 '파리광장'에 연재 중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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